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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대필해서 제자를 등단시키는 문단 - 진영신문 스크랩

beautician 2017. 11. 29. 11:00

선생이 대필 수준의 작품으로 등단시킨다는 소문 

 

     황 정 산 (시인, 문학평론가)

 

 

 

 

   최근 문단에 작은 파문이 있었다. 존경하는 강인한 시인께서 중요한 문제제기를 했는데도 문단에서 그리 큰 반향이 없다. 특정한 인물에 대한 비판이라 끼어들기 싫기 때문이겠지만 강선생님이 제기한 문제는 무시해서는 안 될 중차대한 것이다.

   이번 한 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자가 다른 사람이 써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작품으로 당선되었기에(본인도 그것을 인정하고) 당연히 당선을 취소해야 한다는 것이 강선생님 주장의 핵심이다. 창작의 의미를 훼손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사실 감독관 앞에서 시험 보는 것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이 써 준 작품으로 응모해도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전에는 이런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부정한 방법으로 시인이라는 이름을 단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몇몇 시인들이 신춘문예 지망자를 위한 문예교실 같은 것을 열면서 바로 여기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선생이 제자들의 작품을 거의 대필해주는 수준으로 첨삭해주어 등단을 시킨다는 소문이 몇 년 전부터 있어 왔다. 나도 그 교실에서 수업 받는 사람으로부터 대강의 얘기를 들은 바 있다. 선생이 주제를 하나 주고 학생들로 하여금 작품 구상을 하도록 한 다음 그 구상을 가지고 일차 첨삭을 해주고, 선생이 손봐준 구상에 살을 붙여 학생이 작품을 완성해 오면 다시 선생이 표현이나 형식 등을 고쳐주어 작품을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작품이 만들어지고 또 신춘문예에 투고되니 거의 비슷한 여러 작품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고 그래서 또한 표절 시비가 일어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의 일차적 책임은 그렇게 해서라도 등단하고 싶어하는 시인 지망생과 그것을 조장해서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시인 선생에게 있다. 그런 방식으로 등단한 시인이 제대로 된 시를 계속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지 신춘문예 출신 시인이라는 허명만 얻을 뿐이다. 시를 쓰고 또 가르치는 선생이 시인으로서의 자세나 철학을 가르치지 않고 등단하는 기술을 가르치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아예 대필 장사를 하는 셈이다. 이런 사람들을 시인이라 칭하면서 문단에서 시인으로 인정하고 대접해줘야 하는 것인지 범문단 차원의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먼저 우리의 등단제도의 문제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나 평론가가 되려면 고시만큼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배운 나의 모국어로 작품을 쓰는데 누군가가 합격 통시서를 줘야 쓸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제도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와 같은 등단 제도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세상에 한 곳도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작가가 작품을 써서 그 작품이 좋으면 편집자가 잡지에 게재하거나 출판사에서 책으로 출판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 무슨 고시공부처럼 많은 문청들이 몇 년을 매달려 신춘 문예에 목을 매는 것은 너무도 불합리하지 않은가. 시대를 잘못 만난 시인들은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전에 몇 번의 좌절 끝에 포기하여 새로운 가능성이 보여주지도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일 것이고 단 한편 번듯하게 잘 만든 작품으로 등단한 후 이름 없이 사라져간 시인들 역시 수두룩하다.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작품을 써야 한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상상력과 가능성이 포기되고 무시되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아주 무서운 일이다. 우리 문단은 이런 무서운 일을 오랜 세월 동안 아무런 반성 없이 저지르고 있다.

   이런 불합리한 등단제도가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것은 이런 과정을 겪은 기성 시인들의 자기들의 레테르에 붙은 기득권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 지망생들에게 자랑스런 자기의 레테르를 존경하고 그것을 추수하기를 강요하면서 그것으로 권력을 틀어잡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름께나 있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은 지금에라도 자신이 왜 신춘문예 심사를 해야하는지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잘 생각해보면 신춘문예 심사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자유로워야 할 문학에 권력의 횡포를 행사하는 폭군이 되는 것이거나 그 하수인이 되는 일일 것이다. 부끄럽고 또 무서운 일이다.

   다음으로는 사회에서의 학벌주의와 꼭 닮은 등단지 등급 매기기가 우리 문단에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을 시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등단한 등단지로 평가하는 풍조가 바로 이것이다. 잡지 편집자나 주간을 하면서 문단에서 권력께나 행사하는 사람들이 보통 처음 인사하는 시인들을 대할 때 첫마디가 “어디로 등단했어요?”이다. 그것으로 그 사람 등급을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더러 많은 시인들은 자신이 등단한 문예지가 수준이 낮아서 아무데서도 청탁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좋은 곳으로 재등단을 시도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시인은 자기가 등단한 문예지가 격이 낮다고 생각해 앞서 얘기한 족집게 등단 전문 선생에게 찾아가 정말 6개월만에 번듯한 일간지로 등단했다가 결국 표절 시비에 휘말려 문학의 길을 영영 접게 되었다. 같은 족집게 선생에게서 배운 두 사람이 1년의 시차를 두고 등단했는데 그 작품이 서로 비슷했기 때문이다. 정말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그것이 유야무야 지나가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또 어떤 문예지는 그 문예지 발행인이 자기들은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나 메이저 문예지 신인상으로 등단한 사람이 아니면 청탁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랑스레 발표하기까지 한 적도 있다. 이것은 바로 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어 시인이 가진 레테르로 그 시인을 평가하려는 천박하고 아주 무식한 짓이다. 그런데도 많은 시인, 평론가, 문예지 편집자들이 이런 짓을 부끄러움 모르고 저지르고 있다. 그것이 권력 행사의 아주 좋은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천박하고 불합리한 풍조와 제도가 있기 때문에 몇몇 물욕에 눈이 어두운 시인들이 등단 장사를 할 수 있게 되고 허명을 얻기 위해 시심마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부도덕한 시인 지망생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전두엽이 제대로 박힌 문인이면 10분만 가만히 눈감고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는 이러한 것을 아무도 고치려하거나 문제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우리 문단의 침묵이 더 무섭 다고 느껴진다. 문제제기하거나 고치는 것이 자신의 권력에 누가 되고 자신의 허명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으로 누렸던 이제까지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을 가지지 못한 조무래기 시인, 작가들은 그 권력에 기생하여 조금의 시혜라도 얻어 기득권을 확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기회를 놓치기 싫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다 이득만을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몰라서 생기는 일이다. 문학까지 이렇게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


출처 http://jinyeong.co/home/s4_8/32930 (진영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