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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협회 동인지 출판기념회 - 작품발표 소감문

beautician 2017. 11. 23. 10:00

2017 문협 출판기념회 작품발표 소감문

 

 

2014 5월 롯데쇼핑 애비뉴의 1층 정문 로비에서 미스코리아 래시라는 속눈썹 브랜드의 대대적인 홍보행사가 열렸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지나는 길에 그 행사를 보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시각 그 몰의 3층에서 열리고 있던 토마토 미술학원의 발표회에도 한국인 관객들이 잔뜩 몰려 있었으니까요. 그 홍보행사엔 JIKS 한국국제학교 출신이자 당시 현직 미스코리아 진이었던 유예빈 양이 주빈이었고 한 물 가긴 했지만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답던 원조 걸그룹 클레오 출신 가수 채은정 씨 그리고 메이크업 아티스트 써니 윤씨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정규 초청공연도 아닌 일반 미용제품 홍보행사에 그 정도 쟁쟁한 출연진을 동원해 온 업체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비자문제 제보를 받은 이민국이 덮쳐 왔을 때 그 쟁쟁함도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미스코리아는 용의주도하게 하루 앞서 출국해 위기를 피했지만 가수와 분장사는 비자법 위반으로 꼼짝없이 이민국 유치장에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단편소설 그대 비탄에 잠긴 밤은 그 사건을 모티브로 합니다.

소설이란 게 원래 그렇듯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여러 종류의 인간군상들과 다양한 상황들을 소개하게 됩니다. 한국혼혈 아이를 키우는 현지인 싱글맘, 뭔가 도저히 정리가 안되는 영세사업가들, 블레셋과 아말렉을 물리치며 자기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교민사회의 모세들, 급할 땐 절대 연결되지 않는 담당영사 직통전화번호, 자기 밥그릇 지키려고 벌어지는 밑바닥 개싸움 등이 등장하는 겁니다. 누군가 눈살 찌푸릴 게 뻔한 이런 이야기를 동인지에 떡 하고 실었으니 문협은 이제 큰일 난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적잖은 시간은 대략 다음 세 단어로 간략히 정리가 가능합니다.

 

고립무원

고군분투

맨땅에 헤딩.

 

그렇게 살아온 사람의 삐딱한 눈에 비친 인도네시아와 교민세계가 아름답게만 보일 리 없습니다. 어쩌면 이게 모두 터무니없는 얘기들일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이 소설은 절대 사실일 리 없는 일들을 다룬 SF 판타지 쟝르로 분류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가 이제라도 만약 아내가 읽는다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그래서 필히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로 분류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 오늘 이 시대에 하필이면 내가 서 있는 인도네시아의 이 한쪽 구석에서만 보이는 숨겨진 각도가 있는 법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래서 우물 안 개구리라고 손가락질 할지 모르지만 날고 기는 본국의 문인들에 비해 딱히 특출할 것 없는 고만고만한 재능을 가진 나 같은 사람들에게 내가 맨땅에 헤딩하며 고군분투해온 고립무원의 그 우물이 어쩌면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인 동시에 나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 되어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나만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쓰고 싶어 펜을 들었던 것이고 그런 이야기들 중 하나를 이번 동인지에 싣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싶습니다 .비록 SF 판타지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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