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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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 산다 (1)
그 후배가 한국본사로 돌아간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당일이었습니다. 강고한 독점시장이 오랜 시간 경과하여 마침내 조금 유연해진 독과점 형태가 되었지만 아직도 1위 사업자가 산업의 대부분을 쥐고 흔들던 인도네시아 영화배급과 상영관 사업에서 지난 몇 년간 고군분투하여 마침내 확고한 업계 2위 자리를 공고히 한 끝이었습니다. 그는 현지 영화업계의 지형만 바꾸어 놓은 게 아니었습니다. 웬만하면 파벌을 키운다는 의혹을 피하려고 동문회 같은 개인적인 모임들을 경원하던 다른 대기업 현지법인장들과 달리 그는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그런 모임에 참여하면서 무료 영화 관람권을 대량 배포하며 교민사회를 상대로도 공격적이고도 매우 호의적인 마케팅을 벌였으므로 대사관이나 한인회는 물론 작은 동문회들마저 그의 큰 손 덕을 톡톡히 입어 행사마다 경품들은 더욱 풍성해졌고 많은 자카르타 교민들 역시 그의 재임기간 동안 보다 많은 영화관람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한국에서 김영란법이 발효되면서 그가 자카르타의 모임에 내놓는 티켓의 총액은 이제 일정 선 밑으로 한정되고 말았지만 그가 이례적으로 다른 기업의 그 어떤 법인장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대중적 인기를 누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이제 인도네시아 시장확보의 공로를 인정받아 본사 요직으로 영전되어 가는 것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의 환송사와 덕담이 많은 단체와 동문회들의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넘쳐났지만 그의 본사복귀가 진한 아쉬움을 남긴 것은 이제 더 이상 영화표를 기대하는 일이 요원해져 버렸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회사입장에서는 확장일로에 있는 인도네시아 시장에 또 다른 쟁쟁한 법인장을 보내오지 않을 리 없고 현지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자랑하는 내로라하는 교민단체들은 마치 당연한 권리처럼 새 법인장을 통해 여전히 영화표와 경품들을 얻고 각종 시사회에 초청을 받겠지만 전 법인장에게 일방적으로 혜택을 입었던 모교 동문회들은 이제 더 이상 손을 벌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귀임 며칠 전도 아니고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던 중에, 그것도 자신이 직접 보고한 것도 아니고 한 고참 선배가 그의 귀임소식을 알리면서 동문회 단톡방엔 찬양 일색의 송영가가 울려 퍼졌고 나 역시 영전을 축하한다는 멘션에 앙증맞은 이모티콘까지 하나 붙여 주었지만 사실 특별히 고별사도 없이 떠나다가 들킨 그의 등 뒤에 왜 그리 무심하냐며 핀잔 한 마디 던지는 사람 없는 것이 새삼 생경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이제 지긋한 나이가 되어 본사로 귀임하는 은행장이나 대기업 지점장들, 임기를 마친 대사와 외교관들은 동문회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았어도, 심지어 단 한번도 그런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도 돌아갈 때엔 찬양 일색의 환송을 받곤 했습니다. 물론 그 첫 일성은 대개 한인회나 상공회의소 같이 저 높은 곳에서 늘 교류하며 서로 칭송했던 그럴듯한 직위와 직함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나왔습니다. 대과가 없는 한 편치만은 않았을 인도네시아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덕담과 환송의 인사를 던지는 것은 물론 절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단지, 처참한 실패를 어깨 위에 무겁게 짊어지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등 떠밀리듯 자카르타를 떠나야 했던 수많은 동문들과 지인들에게 아무런 말도 못해주었던, 심지어 그 등 뒤에 가차없는 험담과 욕설을 퍼부었던 기억들이 사람들의 양심을 은밀하게 짓누를 뿐이죠.
인도네시아에 있는 동안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보여주신 관심과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일일이 찾아 뵙지 못하고 이렇게 귀국하지만 모든 분들의 아름답고 따뜻한 격려와 배려는 늘 가슴 속에 간직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모든 찬양의 환송사가 쏟아진 말미에 그는 비행기 탈 즈음이 되자 이런 답글을 단톡방에 남겼습니다. 상대방을 특정하지 않았으므로 아마도 모든 동문회와 지인들에게 수십 번 반복해서 내보냈을 것이 분명한 메시지였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조촐한 규모의 동문회에게조차 그런 식으로나마 최선의 예의를 지키려 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 어떤 창의력 넘치는 문인이라 할지라도 비슷한 내용의 그런 메시지 수십 통에 비장의 실력을 발휘할 리 없는 법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복사와 붙여넣기는 진리인 것이고 더없이 효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 후배로서는 더더욱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의뢰받은 보고서를 쓰기 위해 자카르타 시내에서 그 후배를 인터뷰한 것이 지난 연말쯤의 일이었습니다. 당시엔 그가 곧 본사발령을 받으리라 예측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난 우리들이 동문이란 연결고리로 맺어졌던 10대, 20대의 그 순간으로부터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좀 더 분명히 자각하려 노력합니다. 눈 앞의 후배들은 더 이상 물정 모르는 그 당시의 소년, 또는 청년들이 아니라 이미 불혹을 지나고 때로는 지천명의 고개를 넘은 장년들이며 대개의 경우 나와 비교할 수도 없는, 거대한 사회적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현직 대기업 현지법인장으로 수백 명의 현지직원들을 거느린 그들은 대개, 옛날 내가 일천한 직급으로 대기업을 다니던 시절엔 올려보지도 못했던 상무, 전무급이라는 점을 ‘동문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너무 쉽게 잊곤 하기 때문입니다.
대기업 임원이란, 별을 단 군 장성들처럼 보통 사람들이 아니어서 일말의 존경심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 한편으론 미안하게도 결코 그 인성을 본받을 만한 인격자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회사생활이라는 게 늘 평탄하고 공정할 수만은 없는 일이고 특히 부하직원들을 거느린 후부터는 자기 자신은 물론 부하들의 성과와 과오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하는데 20년, 30년 대기업에서 일하며 회사가 요구하는 바를 늘 초과완수한 끝에 근무기록에 빨간 줄 하나 없이 깔끔한 실적을 자랑하며 당당히 임원으로 발탁되었다면 그것은 회사 문화에 누구보다도 빨리 적응한 그의 놀라운 관리능력과 기민한 수완이 이루어낸 쾌거가 분명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긴 세월 동안 발생했을 수많은 사고와 문제를 맞아 자신의 기록만은 깨끗하게 관리하기 위해 매번 그 책임을 부하들이나 하청업체들에 돌리며 회피하고, 조직의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밤을 새워 피땀으로 일군 성과를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업적인양 호도하며 사내 라이벌들과 불꽃 튀는 암투를 벌이고 승진을 위한 정치적 술수를 부려 상사의 총애를 얻은 끝에 마침내 임원의 계단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이어가 클레임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대형사고가 나고 만 수출 품의서에 자기 서명을 직직 지우며 실무자들에게만 호통치던 비열한 사업본부장과 본사에도 알리지 않은 채 산더미처럼 쌓여버린 부실채권을 군소리 말고 조용히 인수하라며 후임자를 위협하던 파렴치한 지점장을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후배가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역시 본사의 신임을 등에 업은 현지법인장이자 명실상부한 대기업 임원으로서 그 자리가 분명 거저 얹어진 것은 아닐 터였습니다.
인터뷰 과정에서 팩트에 대한 적시와 분석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밝히는 당사자의 견해에서 앞서 언급한 특이점이 곧잘 드러나곤 합니다. 그가 스크린 쿼터제도에 대한 견해를 밝히던 부분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영화산업 1위 사업자가 헐리우드 6대 영화사 배급권을 전통적으로 독점한다는 얘기를 하던 중 파생된 주제였는데 그는 한국의 유명 감독들과 영화배우들이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해 시위도 불사한 것이 한국 영화계 집단이기주의의 소산이라 생각하는 편이었습니다. 물론 많은 방송인터뷰 경험을 가진 그가 누군가 질색할 의견을 대놓고 경솔하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간의 일반적 흐름이나 납득하던 가치관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견해였지만 그의 입장에서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는 대한민국이나 영화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개 영화수입배급과 상영관 사업을 하는 민간회사의 일선 임원이었으니까요. 그가 속한 회사의 이익이 국가나 영화산업 전체의 이익보다 우선한다는 굳건한 신념이야말로 그가 지금껏 국내외에서 최고의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동력이었고 그의 성공의 기반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늘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그 후배도 자신의 그런 신념을 건드리는 얘기엔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신념을 가진 사람에겐 사람들의 다른 생각 따위를 수용할 그 어떤 틈도 남아 있지 않는 법입니다. 그 신념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말입니다.
치기 어린 정의심에 휩싸여 있던 젊은 시절이었다면 당장 미간을 찌푸리며 내 의견을 쏘아 붙였겠지만 다행히도 이젠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과도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내게도 내공이 쌓였습니다. 동문으로 연결되던 그 순간 별다른 개체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우리들은 20년, 30년이 지나면서 그 위상이 변해간 것만큼 생각 역시 그만큼 변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개인이 처한 입장이 다른 만큼 그 입장이 요구하는 조건이나 강요된 상황에 따라 개인의 견해도 변해간 것입니다. 순종적인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그 입장에 적합한 견해를 만들어내고 반발하는 사람들은 조직으로부터 도태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그래서 그 후배는 상무로 진급해 본사도 영전한 것이고 난 오래 전 도태되어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점조직 독립군으로 고군분투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배가 귀국하던 날 단톡방에서는 사실 동문을 떠나 보낸 것이 아니라 동문회를 대표한다고 생각했던 교민사회의 거물을 한 명 떠나 보낸 것입니다. 그의 앞길을 축복하면서 자카르타에서 이루어진 인연이 앞으로 한국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의 후임 법인장과도 자카르타에서 어떤 식으로 든 연결되기를 바랬던 것이죠. 자카르타에 뼈를 묻을 생각이 없는 나 역시 언젠가는 자카르타를 떠나게 되겠지만 그런 성대한 환송은 절대 받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자카르타에서 사라진 것을 아무도 모르겠죠.
얼마 전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지난 몇 년간의 자카르타 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지사원 가족이 연단 무대에 올라 인사를 했습니다. 귀국 러시가 이어지면서 꽉 찼던 예배당 본당은 탈모가 시작된 우리들의 정수리처럼 이미 듬성듬성 자리가 비기 시작했는데 또 한 가정이 빠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임기를 마친 지사원도 아니고 영전하거나 사업을 확장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많은 개인과 가정들은 공개적인 인사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다사다난했던 인도네시아 생활을 정리했습니다. 그것은 한인교회들이라면, 한국인이 밀집한 자카르타 시내 아파트 단지에서라면 어디에서나 벌어졌던 일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후배가 받았던 단톡방에서 찬양의 환송회도, 명예로운 본사복귀도 없었습니다.
침통한 마음으로 야반도주하듯 공항을 향하던 그들과, 영광스러운 영전의 날을 맞아 그날 밤 동문들에게 사전연락도 없이 귀국하려 했던 그 후배는 똑같이 침묵을 마음먹었지만 그 이유는 사뭇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쪽엔 서러운 열등감에서였고 또 다른 한쪽은 뭘 굳이 연락하느냐는 번거로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난 아픈 마음을 홀로 감싸 안고 귀국길에 오르는 사람들을 더욱 온 마음 다해 환송하고 싶습니다. 잘 가라, 친구야! 잘 살아라! 하면서요. 그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카르타의 어느 한 구석에서 좌절감에 짓눌려 한숨짓고 있을 내 동류들에게 한없는 경의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우리 같이 다시 한번 힘을 내보자고 말입니다. 그렇게 끝내 살아내자고 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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