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총선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본문
2009년 4월 9일은 인도네시아 총선입니다.
먹고 사는 일 외에는 워낙 신경 안쓰고 살고 있지만 연초부터 하나 둘 내걸리기 시작한 후보자들의 포스터가 어느 새 도시를 온통 덮어버리고 나니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이 그렇듯 여전히 정치후진국에 속하는 인도네시아는 결국에는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치며 자기들 주머니 부풀리기에 바쁘고 말 국회위원들, 시위원들을 뽑기 위한 선거에 천문학적 돈을 뿌리고 있고 각 정당의 깃발을 들고 도로를 누비는 오토바이 군단들은 선거운동이 과열되면서 곳곳에서 충돌하고 때로는 그 지역으로 잘못 들어선 시민들과 차량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기도 합니다. 그리고 매체에는 대개 보도되지 않지만 선거가 끝나고 나면 외상으로 수천, 수만장의 선거포스터와 현수막을 만들어 주고 대금을 받지 못한 인쇄업체들이 극도의 자금난을 겪고 그 중 많은 수가 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지지요.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여러 차례 선거가 치러지는 것을 보았지만 99년인가 2000년에 간접선거로 치러졌던 대통령선거는 당시 인도네시아 정치의 현주소를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98년 5월 폭동으로 하야한 수하르토의 후임으로 당시 부통령이던 하비비가 1년 좀 넘게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있는 동안 IMF 경제위기에 따른 수많은 기업들의 도산, 은행들의 통폐합, 거기에 동티모르 사태까지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한창 정국이 혼란한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였지요.
당시 국회의사당에서 초대 대통령의 맏딸 메가외티(Megawati)가 개표 초반에 크게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민주당(PDI = Partai Demokrasi indonesia)의 당수였던 메가와티는 얼마전 아마도 수하르토 정권관 집권 골카르당(Golkar = Golongan Karya)에서 사주한 것이 틀림없는 당내 구데타로 인해 당수직에서 쫒겨 났지만 민주투쟁당(PDI-P = Partai Demokrasi Indonesia-Perjuangan)을 새로 설립하고 당원들과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배경으로 대통령 선거까지 왔던 것입니다. 사족이지만 원래 PDI 당의 로고였던 황소를 그대로 민주투쟁당의 로고로 쓰면서도 그 검정 황소가 빨간 배경바탕에 눈을 성난 눈을 치뜨고 있는 것은 메가와티와 그 추종자들의 당시 정서를 십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민주투쟁당원들은 스망기(Semanggi) 인터체인지와 국회의사장 MPR-DPR가 있는 가톳 수브로토(Gatot Subroto)거리에 모여 거의 기정사실과도 같았던 메가와티의 대통령 당선을 미리 축하하며 요란한 축제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당으로 내몰릴 것이 확실했던 집권 골카르당은 최소한 정권을 야당, 그것도 여성에게 대통령직을 내줄 수는 없었습니다. 더욱이 실각한 수하르토 전대통령과 친족, 또 그의 계보에 속한 정치인들이 아직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그 당시, 수하르토 자신이 밀어낸 것이나 다름없는 수카르노 전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그간 수하르토 정권에서 민중의 고혈을 짜내 단물만 빨아 먹고 있었던 골카르당으로서는 극도의 위기상황에 빠지는 것과 다름 아니었지요. 그래서 공황상태에 빠진 골카르당 선거인단이 최선의 자구책으로 PPP 당에 던진 몰표로 인해 현지인들 사이에서 ‘구스 두르 (Gus Dur)’라고 친근하게 불리던 회교 지도자 압두라흐만 와히드(Abdulahman Wahid)가 개표 후반에 급격히 치고 나가 메가와티를 근소한 차로 누르고 인도네시아의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인도네시아 역사상 첫 맹인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죠.
그러나 민주투쟁당 당원들과 메가와티의 추종자들이 절대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압두라흐만 와히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순간, 그들은 국회의사당 정문 앞으로 몰려들어 격렬한 항의시위를 시작했고 그 혼란상황은 98년 5월 폭동 때와 마찬가지로 도시빈민들이 합류하면서 폭동으로 이어져 스망기 인터체인지의 톨게이트들이 방화되어 불길이 치솟고 자카르타의 최중심지인 수디르만 거리와 가톳 수브로토 거리에서 파괴와 약탈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카르타에 공포의 밤이 또 다시 찾아 온 것이죠.
선거 결과가 발표된 후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메가와티가 다음 날 부통령직을 제의받고 선거결과에 승복하며 부통령직을 수락하고서야 폭동은 가라앉을 수 있었습니다.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인도네시아 정치는 그때보다 좀 더 성숙해졌을까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판단입니다. 돈을 주고 사온 시골사람들을 끌어 모아 길을 막다시피 하고 시내 곳곳에서 전당대회며 선거집회를 하는 것은 10년 전, 15년 전이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고 무법자들처럼 정당 깃발을 휘날리며 다른 차량들을 위협하면서 무례하게 도로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군단들의 모습도 예전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날 벌어졌던 혼란 상황은 여건만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다시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3월 30일 저녁, 시내에서 돌아온 직원들이 길이 막혀 제대로 수금하러 다닐 수 없었다고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끼장 밴을 타고 나갔던 직원은 간신히 두 군데만 돌고서도 밤이 늦어서야 끌라빠가딩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총선이 열흘 앞으로 다가온 상황…, 도심은 막판에 이른 선거전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것이죠.
아직도 수하르토가 눈을 시뻘겋게 뜨고 대통령직에 앉아 있던 96년 당시, 미팅 시간을 대기 위해 내 페로자 찝을 몰아 라와망운(Rawamangun) 방면에서 카사블랑카Casablanka) 도로를 타고 시내 방면을 향하다가 카사블랑카 아파트 앞에서 고가도로 밑으로 빠져 좌회전 하며 사하르조(Saharjo) 거리에 들어서는 순간 혼잡한 선거유세행렬 한 가운데로 뛰어 들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어요.
당시 대통령 선거인단을 뽑는 선거가 한창 막판을 향해 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내가 뛰어 든 코린도 건물이 있는 빤쪼란(Pancoran) 사거리로 내려가는 방향은 민주당 유세인파가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머리띠를 두르고 미친 듯이 깃발을 흔들어 대는 사람들을 콩나물 시루처럼 가득 실은 트럭들만 수십대, 거기에 유세목적으로 전세낸 수십대의 코파자(KOPAJA) 버스들은 사람들이 상체와 깃발들을 내밀고 있어 마치 도로를 달리는 거북선들처럼 보였는데 버스의 천장 위에도 사람들이 가득 올라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도로 자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토바이 군단들이 빽빽히 거리를 채우고 있었는데 그 사이 사이에 나와 마찬가지로 의도치 않게 유세행렬에 갇혀 버린 세단과 밴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었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빤쪼란 사거리에서 망가라이(Manggarai) 방향으로는 노란색 깃발과 머리띠를 한 골카르당 유세행렬이 올라오고 있었다는 사실인데 결국 도로의 양쪽 방향을 가득 채운 이들은 금방 싸움이라도 벌일 듯 살기등등하기까지 했고 트럭과 버스 위에 올라타 있던 사람들은 이쪽 트럭에서 저쪽 버스로 옮겨 타면서 상대 당 유세행렬에 고함을 치고 욕설을 해대고 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머리에 쥐가 나고 목덜미가 뻣뻣해 오면서 어깨에 힘이 꽉 들어갔습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이런 걸 전문용어로는 ‘조땟다’ 라고 한다는…. 그 상황에서 저 앞 쪽에서는 일단의 사람들이 한껏 고조된 분위기로 소리도 지르고 노래도 부르며 타잔처럼, 또는 스파이더맨처럼 차량들 지붕을 타고 마구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밟힌 토요타 스탈렛 승용차며 끼장 밴의 지붕이 마구 찌그러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내 페로자의 본넷을 밟고 지붕 위로 올라서기에 이릅니다. 악 소리 못하고 당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들은 내 페로자 지붕 위에서 널뛰기 하듯 방방 뛰다가 또 다시 다른 차로 옮겨 갔지만 그 사이 내 차 지붕은 사정없이 우그러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건 보험처리 할 때 분류를 교통사고로 해야 할까요? 아니면 자연재해…?
인도네시아에서의 거리유세는 정치적 행위라기보다는 마치 도시 빈민들의 광기를 자유롭게 발산하도록 마련된 장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되었죠. 공식화된 난동, 정당화된 폭력….인도네시아의 정당들은 연설회나 공약 등 정책대결보다는 그런 폭력적, 무법적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깃발과 로고를 노출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선출되는 정당과 선랑들은 과연 어떤 정치를 펼칠까요? 인도네시아를 안전하고 평온한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다음 번 선거에도 또 저 사람들을 동원해야 하는데….?
하지만 인도네시아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우리들은 빨리 적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의 정치 행태를 바로 잡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조국의 정치 행태도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데….
그 해 반둥에도 갔습니다. 반둥 봉제공장들의 시장조사를 위해 일주일 정도 출장을 간 거죠. 정국 혼란하고 치안 불안한 와중에 정말 별 걸 다했어요. 반둥에서도 어김없이 대대적인 도로 유세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공단지역이 그런 반둥 도심에서 좀 떨어져 있다는 게 다행이었죠.
하지만 공단의 문제는 택시가 없다는 거…. 미팅하러 택시타고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한시간 후 나올 때에는 택시도 없고 불러도 오지 않아 1km 정도를 낑낑거리며 서류가방과 쌤플 가방을 들고 걸어간 끝에 오토바이 택시인 오젝(Ojek)을 탈 수 있었습니다. 한화그룹의 현지공장을 다니다가 그만 두고 나온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그 때, 한 아름 되는 가방을 두 개씩 들고 인도네시아 도시의 길거리를 오래 걸은 것도, 오젝을 탄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끼장 밴이나 봉고차량을 개조한 소형버스인 앙꼿(Angkot), 바자이(Bajaj – 태국에서 뚝뚝이라고 불리는 3륜 오토바이), 베짝(Becak – 자전거택시)이나 좌석이 플라스틱 의자로 되어 불편하기 그지 없는 시내버스를 처음 타 보았던 것도 대충 그 즈음의 일이었습니다.
처음 해 보는 건 항상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 오토바이에도 뒷좌석에 앉는 사람을 위한 발받이가 옆에 붙어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던 나는 머플러에 발을 올려 놓았다가 오른쪽 구두 바닥이 다 녹아버리고 맙니다….T.T 아무튼 그렇게 해서 큰 길로 나와 택시로 갈아타고 다음 행선지인 수카르노 하타 거리(Jl. Soekarno-Hatta)의 트라이셋(Triset) 바지공장 본사를 향했어요. 그런데 어렵게 잡은 택시의 기사가 머리에 골까르당 노란띠를 두르고 있다는 사실이 좀 맘에 걸렸지요. 정치색 짙은 택시를 타 보는 것도 그것이 처음이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저 앞에서 엄청난 숫자의 오토바이 군단이 그 위용과 함께 노란 깃발을 휘날리며 빠르게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아요! 골카르!! 마주! 골카르!!”
(Maju! Golkar – 대충 골카르당 만세, 내지는 골카르 이겨라 정도의 뜻)
운전사는 상체를 반쯤 창 밖으로 내밀고 불끈 쥔 주먹을 용두질 하며 지나치는 골카르당 유세군단을 맞았고 그들과 하이파이브까지 나누고 있었죠. 골카르들은 택시기사의 지지에 환호로 답하며 개선장군들처럼 당당하게 폼잡으며 지나쳐 갔습니다. 나는 기가 막혔고 기사는 다시 상체를 택시 안에 들여 놓으며 뻘뻘 땀을 흘리는 얼굴에 한숨을 내 쉬며 미소까지 머금더군요.
“골카르 지지하쇼?”
“하하, 뭐, 그런…”
정치에 미친 기사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정치얘기에 열을 올리는 택시기사를 여러 번 만났었지요. 어쩌면 택시기사들은 국제적으로 정치에 민감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전방 12시 방향에 PPP 당의 초록색 깃발들이 나타났습니다. 운전사의 얼굴이 잠시 흑빛으로 변하는 듯 하더니 번개같이 노란색 머리띠를 벗어 버리고 대시보드 옆 수납함을 뒤져 초록색 머리띠를 꺼내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번엔 PPP당 만세를 외치며 상체를 창 밖에 내밀고 PPP 유세군단과 하이 파이브를 해대기 시작했지요.
“이러지 않으면 쟤들이 차를 마구 두들기면서 지나가거든요.”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에서 초록색 머리띠를 벗으며 택시기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수납함에는 골카르, PPP는 물론 PDI 당의 빨간색 머리띠까지 모두 완비되어 있었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그 머리띠를 무수히 바꿔 쓰며 유세군단들의 맞장구를 쳐 주고 있었어요. 인도네시아의 선거유세는 그렇게까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나마 다행히도 골카르, PPP, PDI가 정치적 대세를 이루었고 서슬퍼런 수하르토 정권하에 새로운 신생정당이 생겨 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비비 정권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정당들은 이제 수십 개로 늘어나 이번 4월 9일 총선에 후보를 내고 있으니 그 택시기사는 이제 수십개의 머리띠를 수납함에 넣고 다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 총선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는…., 각자 자동차에 형형 색색의 머리띠를 준비하고 다니든가 아니면 당분간 시내 출입을 자제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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