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아 현대사

작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목

beautician 2017. 12. 23. 11:00

 

1988년 6월엔 이런 순간을 피하려 했습니다.

군에서 전역하던 때였죠. 입사해 놓은 한화그룹으로 돌아가느냐, 군에 남느냐, 아니면 딴따라의 길로 들어서 가요작곡을 하며 살아가느냐를 놓고 고민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또 하나의 선택지가 글쓰며 살아가는 작가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딴따라와 작가의 길을 가지 않은 이유는 누구나 다 상상하는 것처럼 그 길로 들어서서는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에 남지 않았던 것은 당시 자주 고장나던 내 무릎이 공수부대 훈련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 평생 가장 적성에 맞았던 직업은 군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화로 돌아갔고 그러다가 인도네시아로 발령받았고 독립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참 험하게 살았습니다. 물론 더 험하게 살았을 것이 분명한  분들도 셀 수 없이 많겠죠. 아무튼 난 여러 번의 선택의 기로에서 점점 더 어려운 길을 택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그 순간이 왔습니다.

아모르문디 출판사에서 계약서 가안이 왔습니다. 인도네시아 현대사, 그것도 수까르노 생존기간 동안의 역사에 대해 쓴 원고를 출판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계약서가 1988년 6월의 그날 내 앞에 놓여 있었다면 난 어떤 결정을 했을까요?

 

이 계약을 수락하면 난 앞으로 몇 개월, 길면 반년 정도를 이 원고를 다듬고 추가로 넣을 챕터 몇 개를 쓰고 교정과 재교정에 매달려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건 어려울 게 없는 일입니다. 단지 생계를 위해 일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지난 반년간 막스 하벨라르의 번역에 매달려 보니 책을 내기 위한 글 쓰는 작업이라는 게 파트타임으로 하기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글은 나 혼자 쓰는 것이지만 그게 출판사와 계약이 되어 일정이 잡히고, 관련된 사람들의 협업이 시작되면 내 페이스대로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해지니까요. 시간이 지날 수록 '마감'이란 한 시대의 끝은 정말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한 일은 수동적이 되기 쉬운데 내가 나가서 뭔가 만들어야 일이 돌아가는 상황에서는 글쓰는 일을 병행하긴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내 책은 낸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꿈꾸어 왔던 것입니다.

막스 하벨라르 번역에 최선을 다했던 것 역시 공동번역자로서 내 이름이 그 책에 올라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뭐라고.

 

그러고 보니 그 번역서를 출판사와 계약하면서 양교수님이 얼마나 내 입장을 생각해 주었는지 이번 계약서 가안을 받아보고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200자 원고지 2,500장 정도로 물량을 예상하고 500만원을 받기로 하고 그 50%를 선금으로 받도록 해주었습니다. 난 처음 그게 글값으로 치면 원고지당 2,000원 정도의 헐값이라 생각했더랬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은 교수님이 4천권 판매를 기준한 인세를 미리 받기로 계약하고 그걸 전부 나한테 몰아준 것임을 이번 아모르문디와의 계약을 통해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게 교수님이니까 받아낼 수 있는 매우 파격적인 조건이었다는 것도요. 이번 출판사는 250권에 대한 선인세를 계약금으로 걸겠다고 했고 주변에 문의해 본 바 아주 일반적인 계약조건이라 하니 말입니다. 

 

물론 내가 이 계약을 수락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이 출판사가 처음 출판의사를 밝힌 것은 11월 29일. 내가 원고를 보낸 지 1년 반 만의 일입니다. 계약서 가안을 받기까지 20일 가량 걸린 셈입니다. 실제로 계약서에 서명하고 원고를 다시 만지는 것은 내년 1월 쯤이 되겠죠. 

평생 처음 찾아온 기회이고 또 다시 찾아오지 않기 쉬우니  이 책이 어쩌면 내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호의를 가지고 다가온 상대방에게 야박하게 굴거나 주판을 두드리는 것 같은 행동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참 멀리도 돌아왔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오기까지 글쓰기와 교정에 매달리면서 하던 일도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니 마음 한 편이 무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나쁜 일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닌 것처럼 좋은 일도 항상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2017. 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