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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대선배를 보내면서

beautician 2015. 11. 4. 17:45


인도네시아에서 노환으로 별세하는 한국인들은 거의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그 즈음이 되기 전에 이미 사업이나 비자문제로 인해 한국에 돌아가거나 건강문제가 발견되어 한국에서 병원입원하여 치료하다가 별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20년 선배인 조홍선배님이 스마랑에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신 것은 그래서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었고 그 일이 갑자기 벌어졌기에 더욱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물론 그는 인도네시아로 귀화해 국적으로 바꾼 상태였고 현지인 처와 함께 스마랑 근교에 살고 있었습니다. 과거 잘나가던 봉제사업체를 가지고 있던 선배는, 굳건히 신뢰해 마지않았던 강사장이 회사돈을 횡령하고 엄청난 빚만 남긴 채 도주해 버렸을 때 그 드높은 자존심을 지키려 가지고 있던 전재산, 즉 공장과 아파트, 차량과 낚시배 등 가용한 모든 자산을 팔아 빚을 모두 갚고 빈털털이가 되어 버린 후에도 노구를 이끌고 혼신의 노력으로 현지 가족들을 부양하던 중이었습니다.


현지인 형수가 선배님 핸드폰의 전화번호와 카톡방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연락을 내어 간신히 연락이 닿은 ROTC 총무를 통해 부고를 받은 것이 임종 다음 날 새벽이었고 이슬람에 독실한 무슬림이 된 선배의 발인은 당일 오전 8시였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시간을 대어 스마랑에 도착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가까이에 있던 동문들이 있어 스마랑 인근에서 골프장갑공장을 하는 24기 동기 이선우와 현지 선교사역 중이던 14기 선배 문인기 목사님이 스마랑의 상가와 Tegal (뜨갈)의 장지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가슴 아프도록 초라한 묘소


문인기 목사님


이선우 사장


파란만장한 굴곡의 삶은 살았던 그의 인생을 언젠가 글로 엮어 볼 생각도 했었고 그래서 인터뷰 하러 스마랑에 갈 생각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하지만 조선배님은 그보다 한 발 앞서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가족들에게도 어렵사리 연락을 낼 수 있었으나 전처와 그 자녀들에게는 결국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인도네시아로 넘어오기 전의 조홍선배는, 아니 사업실패와 배신을 맞아 결코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의 조홍선배는 우리가 인도네시아에서 익히 알고 있던 모습과 자상한 성격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 당시 고인을 알았던 친지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리란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임종이란 늘 아쉬움과 회한을 남기기 마련이지만 한 시대를 풍미하며 봉제업계에서 이름을 떨쳤던 조선배의 초라한 임종은 더욱 아쉽고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법도에 맞춰 말년을 살았고 그렇게 살기 시작한 후 누구에게도 인심을 잃지 않고 누구에게도 마음 상할 소리 하지 않으셨던 고인은 무슬림들이 보기에 가장 행복한 임종을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금요일 숄랏 줌앗을 마치고 3시 기도까지 마친 후 피곤하다며 들어가 오침을 취하시다가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임종을 맞은 것이 10월 30일 금요일. 

10월 31일 오전 8시에 발인하여 Tegal의 아내 고향에 뭍힌 조선배는 불과 2주 전이었던 10월 14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ROTC 인도네시아 지회 총회에도 참석해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었는데 말입니다.


그 누구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과, 

그 누구라도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날이 오고야 만다는 일말의 허망한 느낌에 사로잡혀 한동안을 보냈습니다.


파란의 일생을 사셨던 조홍 선배님, 

이제는 모든 고통과 고민에서 벗어나 영면 속에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5.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