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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니 민속과 주술

1998년 닌자들의 반유왕이 흑마술사 학살사건

beautician 2023. 8. 12. 11:22

25년 전 동부자바에서 벌어진 마녀사냥 유혈사태, 아직도 미제로 남아

 

1998 년 10월 3일 네 명의 ‘닌자’가 침입한 따르비야뚤 이슬람 아샤이피야 기숙학교 전경. 당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The Strait Times/Linda Yulisman)

 

자카르타 폭동이 터지고 수하르토 대통령이 하야하던 1998년 5월 이후 1999년까지 동부자바에는 소위 ‘닌자’라 인식된 정체불명의 암살자들이 나타나 두꾼 또는 흑마술사라고 알려진 이들을 은밀하게 또는 공공연히 공격해 살해하는 사건이 줄을 이었다.

 

검은 옷으로 몸을 가리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제거대상을 공격해 목을 베거나 배를 가른 후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인도네시아 시골 농업사회에서는 유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대로부터의 마법 혹은 흑마술이 일상과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귀신들과 소통하며 영을 다룬다고 알려진 흑마술사들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기후 이상으로 추수를 망치거나 마을에 역병이 돌면 모든 문제의 근본, 저주의 근원으로 흑마술사들을 지목하여 희생양을 삼곤 했다.

 

하지만 흑마술사들의 성지처럼 여겨지던 동부자바 동쪽 끝자락의 반유왕이에서 1998년에 벌어진 참혹한 살인사건들은 지나치게 이례적이었고 사람들은 집단적 발작증세를 일으키기라도 한 듯 갑자기 복수에 몰두하며 이웃들의 피를 뿌렸다. 일정 부분 집단적 광기가 동부자바를 사로잡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시 반유왕이에 살면서 닌자들을 실제로 목격한 꾸란 교사 아흐맛 수기요노는 그들이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는 느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스트레이트 타임즈(The Straits Times)의 ‘아시아의 실제 범죄들(True Crimes Of Asia)’ 팟캐스트 시리즈 네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한 그는 당시 닌자들이 불현듯 나타났다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등 신출귀몰했다고 증언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매복공격을 하려 해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곤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Komnas HAM) 자료에 따르면 당시 반유왕이에서만 194명이 그런 식으로 닌자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동부자바 다른 지역인 즘버르(Jember)에서는 108명, 말랑에서는 일곱 명이 살해되었다. 그렇다고 살해된 이들이 모두 두꾼은 아니었다. 닌자들은 대개 목표를 정해 공격하는 집단인데 그들이 노린 이들 중엔 멀쩡한 민간인들과 성직자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자 인도네시아 사회에 편만한 흑마술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 담론이 퍼져 나갔다.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흑마술사라 치더라도 그럼 왜 흑마술사들을 죽인 닌자들을 규제하지 않고 피해자 집단이 되어버린 흑마술사를 규제하기로 했는지 당시 혼란스러운 대중의 의식흐름을 가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지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유일신교인 이슬람을 믿는 인도네시아에서 다신교를 믿으며 귀신을 섬기거나 부리는 두꾼들과 흑마술사들이야말로 죽어 마땅한 제거 대상 또는 규제 대상이란 공감대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2022년 인도네시아 사회는 실제로 흑마술을 규제하는 절차를 마침내 시작했다.

 

가축들의 죽음으로 촉발된 마녀 사냥

반유왕이의 깔리곤도(Kaligondo) 마을에는 ‘수마르노 아디’라는 이름의 걸출한 흑마술사가 이름을 떨쳤는데 그는 한 야시장에서 전기를 끊는 초능력을 보여주며 마을사람들 마음 속에 두려움을 심었다. 당시 그는 35세였다.

 

그러다가 1998년 초 마을에서 가축들이 불가사의하게 죽어 나가자 사람들은 수마르노가 흑마술로 저주를 내렸기 때문이라는 턱도 없는 혐의를 걸고 겁박하기 시작했는데 두려움에 휩싸인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광기에 휘둘려 이에 동조했다.

 

마을사람들은 수마르노를 붙잡아 흑마술을 영원히 버리겠다고 맹세하라 했으나 수마르노가 이를 거절하자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몽둥이와 죽창을 동원해 그를 만신창이로 만든 후 결국 돌로 쳐 살해하고 말았다. 돌로 사람을 치는 것은 이교도를 처형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1998년 2월 4일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카르타 폭동과 수하르토 하야가 그해 5월의 일이니 수마르노의 처형은 정치적 혼란기와 아무 관계없이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흑마술 저주에 대한 두려움이 자생적으로 타오르며 발생한 전형적인 마녀사냥이었다.

 

이 사건을 필두로 동부자바에서는 309건의 린치 사건이 보고되었는데 마을사람들은 스스로 자경단을 만들었고 흑마술사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사냥해 마구잡이로 잡아 죽였다.

 

닌자들의 살인사건과는 별도로 그렇게 마을 자경단원들, 마녀사냥꾼들이 잡아 죽인 두꾼들도 수십 명에 달한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산 채로 불태워지거나 목이 베이거나 배를 갈라 창자를 꺼냈고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벤 머리를 장대에 끼워 자랑스럽게 들고 다니거나 마을 어귀에 진열해 놓기도 했다. 20세기의 인도네시아 동부자바를 야만이 지배했다.

 

‘반유왕이 흑마술사 살해소동’(The Commotion of Banyuwangi Sorcerers’ Murders)의 공동 저자인 압둘 마난 기자는 당시 흑마술사로 의심받은 이들이 깊은 자상을 입거나 목이 매달려 죽은 것을 목격하는 것은 흔한 경험이었고 그들 일부는 집과 함께 통째로 불살라졌다고 스트레이트 타임즈 팟케스트에서 말했다.

 

죽은 두꾼의 목을 장대에 끼우고 행진

 

그런데 닌자 같은 검은 복식을 하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자경단에 끼어 있는 모습도 보았다는 목격자들이 있다. 그들은 피해자를 제거하기 전 집에 특정 표시를 하고 미리 전기를 끊어 놓는 등의 작업을 조용하고도 효율적으로 수행했다. 그런 훈련을 받고 그런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란 인상이 강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일단의 닌자들이 집들 지붕 위를 날 듯이 뛰며 나타났다가 그렇게 사라졌다는 소문도 꼬리를 물었다. 그들이 정말 은밀한 닌자 조직처럼 신비로운 사람들이거나(일본도 아닌 인도네시아란 배경이 일단 말도 안되지만) 특별히 그런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가정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1998년 10월 3일 저녁 8시 30분경 네 명의 닌자가 따르비야툴 이슬람 아샤피야(Tarbiyatul Islam As-Syafi’iyah) 기숙학교 기도실에 들어왔다. 기사 초반에 등장했던 꾸란 교사 수기요노는 당시 아직 그곳 학생이었다. 당시 닌자들은 기숙학교 교장이자 성직자인 알리 수다르지를 노리고 그의 집을 앞뒤로 포위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알리 교장은 졸리고 배가 고파 평소보다 빨리 기도실을 떠난 상태여서 당일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수기요노가 이런 내용을 잘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당시 상황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후에 알리 교장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1998년 초부터 1999년 초까지 약 1년에 걸친 기간 동안 많은 이들이 살해당했는데 그중 정말 흑마술사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대부분이 평범한 농부, 이장, 이숙의 가장, NU와 연계된 성직자들이 더 많았다. 종교적 이유보다는 혼란을 틈타 원한과 질투를 기반한 개인적 복수의 정황, 또는 모종의 목적을 위해 특정인들을 제거하려 한 조직적인 움직임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이다.  

 

반유왕이 지역 문화역사학자 수할릭(Suhalik)은 실제로 흑마술사와 분쟁이 벌어지더라도 다시는 흑마술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거나 흑마술사를 추방하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짓는 것이 보통인 시골 지역사회에서 1998-1999년 시기에 마녀사냥이 막무가내 처형으로 이어져 너무 많은 사람들의 살해당한 것은 그 배후에 정치적 목적이 작용했기 때문이란 가능성을 제기했다.

 

정치적 목적의 희생양이 된 흑마술

당시 벌어진 살인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많은 가설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반유왕이의 밤을 지배했던 검은 유니폼의 닌자들이 사실은 군에서 훈련을 받은 암살자들로 당시 하비비 대통령의 과도정부를 흔들고 사회적 공포와 불안을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다. 하필 그 시기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빈곤으로 몰아넣은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일어난 1998년 5월 자카르타 폭동과 사회불안에 때맞췄다는 점이 특히 공교롭다.

 

자카르타에서 벌어진 폭동은 약탈과 소요를 동반했고 많은 화교여인들이 겁탈당한 후 살해당했으며 전체적으로 1,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비슷한 소요가 북부 수마트라의 메단과 동부자바의 수라바야에서도 벌어졌다. 그리고 5월 21일 수하르토 대통령이 32년간 지켰던 권좌에서 등 떠밀려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BJ 하비비 대통령을 새 지도자로 한 개혁운동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작가이자 현재 템포지 편집장인 압둘은 동부자바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을 빙자한 조직적인 살인사건들이 수하르토 하야의 반동으로 개혁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을 위협할 목적으로 진행된 모종의 ‘작전’이라고 평가했다. 군사작전이란 뉘앙스가 강했다.

 

또 다른 가설은 동부 자바에서 강세를 보이는 NU를 흔들어, 당시 카리스마 넘치던 성직자 압두하르만 와히드가 주축이 된 이슬람 정당인 국민각성당(PKB)를 흔들려는 목적으로 닌자들이 동부자바의 NU 성직자들을 노리며 활개를 쳤다는 것이다. 실제로 압두라흐만 와히드는 1999년 10월 하비비의 뒤를 이어 제4대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반유왕이에서 불과 30분 거리인 발리에서 1998년 10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인도네시아 민주당 전당대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동부자바의 마녀사냥이 절정을 이루었다는 가설도 있다. 민주당은 당명을 투쟁민주당(PDIP)로 바꾸고 수카르노 초대대통령의 장녀 메가와티 수카르노뿌트리를 해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지명하는데 그녀는 2001년 와히드 대통령이 탄핵당하자 당시 부통령으로서 법률에 의거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해 인도네시아의 제5대 대통령이 되지만 당시 와이드를 누르고 곧바로 4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었다.

 

결국 흑마술사들에 대한 마녀사냥은 이러한 정치적 이벤트를 위한 배경이었고 흑마술사들이 정치인들을 흔들기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 수할릭의 주장이다.

 

이른바 9.30 쿠데타의 실패와 그에 대한 반동으로 1965년 이른바 인도네시아 대학살이 일어나 1백만 명 넘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원과 화교들이 목숨을 잃을 때에도 많은 흑마술사들이 살해당했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화교들, 영적, 정신적으로 위협을 주는 두꾼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사회불안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민중이 가장 먼저 칼끝을 돌리는 대상이었다. 그러니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이나 1998년 폭동과 정치불안 상황에서 누군가 조금만 계기를 마련하고 물꼬를 터주면 화교와 두꾼들을 향한 민중의 린치가 쏟아질 것이란 점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던 일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998-1999년 동부자바에서 자행된 마녀사장이 훈련된 암살자들의 조직적이고도 광범위한 중대 인권침해라고 결론지었고 당시 NU의 조사는 심지어 그 배후에 인도네시아군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조직적으로 닌자들을 흉내낼 만한 집단은 군 특수부대 외에는 없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수집한 증거 중에는 살해방식, 반유왕이 군수 뚜르요노 뿌르노모 시딕이 만든 흑마법사 명단과 군이 일부로 늦게 개입했다는 정황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해당 조사를 이끈 국가인원위원회의 울룽 합사라 위원은 동부자바 유혈 마녀사냥이 1998년 2월부터 시작되었으나 군경이 치안병력을 보낸 것은 그해 9-10월의 일이었다고 증언했다.

 

해당 보고서에 대해 당시 법무장관은 증가가 부족하다며 아무런 후속조치도 취하지 않았지만 압둘은 흑마술사 명단을 지방정부가 만들고 군경이 검증했다는 것 자체가 마녀사냥과 유혈사태에 군이 개입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당시 닌자들은 해당 지역 방언을 사용하지 않았고 차량과 워키토키를 사용했다. 그들이 외지에서 온 군인일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결국 동부자바의 마녀사냥 대부분이 미리부터 계획된 조직적인 군사작전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살인사건들은 향후 마녀사냥을 여하히 규제하여 사람들이 사적 보복을 하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느냐는 공개논의의 기폭제가 되었다. 정부는 동부자바 마녀사냥이 있기 훨씬 전인 1990년대부터 흑마술사 처벌법을 강구하고 있었으나 법제화하기에 이르진 못했다.

 

마녀사냥이 끝난 지 7년 후인 2005년 인도네시아 울라마 대위원회(MUI)는 흑마술을 금지하는 종교칙령을 발표했고 2009년에는 MUI의 쁘로볼링고시 지회는 흑마술사로 지목된 이들이 결백서약을 하면 주술과 관련된 법적 분쟁을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2016년 말에 이르러서야 주술규제법이 형법 개정안에 포함되었다. 지난 2022년 말 국회를 통과한 논란의 형법개정안이 바로 그것이다.

 

형법개정안의 주술규제부분은 누구든 자신이 영적 초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저주를 내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고지하거나 약속하거나 제안할 경우 1.5년의 징역 또는 2억 루피아(약 1,680만 원)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법이 당장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해당 규정의 발효는 2024년부터이므로 과연 어떤 효과를 보일지는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다.

 

한편 조코위 대통령은 올해 초 1965년부터 2003년 사이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중대 인권침해사건 12건의 피해자들의 복권을 도모하는 특별팀을 발족시켰는데 해당 12건의 사건 중에는 반유왕이 마녀사냥도 포함되어 있다. 특별팀의 베카 팀장은 당시 사건의 피해자들과 가족들에게 정신상당, 의료서비스, 금융지원 등을 제공할 방안을 도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닌자들을 규제해야 마땅할 상황에 그들에게 살해당한 흑마술사들을 규제해야 한다는 법안이 나온 것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출처: 자카르타포스트
https://www.thejakartapost.com/paper/2023/08/01/25-years-after-bloody-witch-hunts-in-east-java-cases-remain-unresolve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