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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길 가로막는 오토바이

beautician 2015. 3. 25. 16:12

릴리네 집에 갈 때마다 늘 부담스러운 일들을 몇가지 겪어야만 합니다.

 

루벤이 함깨 살던 시절 그들은 아마도 당시 북부자카르타에서 최고급이었던 빠사데니아 아파트에 살았는데 사는 사람이나 방문하는 사람 모두에게 쾌적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루벤에 스리랑카를 거쳐 캐나다회사의 상해허브에 옮겨가면서 릴리는 자카르타의 주거를 뻐자텐(Pejaten)으로 옮기고 2013년 약 30만불 정도를 주고 임대로 있던 그 집을 인수했는데 구시가지 지역, 특히 화교지역이 대부분 그렇듯 좋은 집들이 들어선 주거블럭 외곽은 허름하기 이를데 없었고 진입로는 협소하기 짝이 없었어요. 릴리의 집이 바로 그랬는데 차 한대 간신히 지날만한 좁은 통로를 빠져나와 조금 넓어지는 곳엔 관상용 가금류를 파는 가게가 커다란 대리석으로 길을 반쯤 막아놓고 새장들을 그 위에 전시해 놓고 있었습니다. 개별 주택의 주차시설도 협소해 예전에 공장으로 쓰던 건물을 다세대 자취방으로 개조한 곳 주차장에 임시로 차를 대야 했으니 차를 몰고 릴리를 찾아가려면 먼저 머리에 쥐부터 나곤 했습니다.

 

지난 월요일도 그런 날이었어요. 어렵게 차를 몰고 들어가 두시간 정도 미팅 한 후 다시 나오려는데 내가 들어선 그 좁은 진입로 저편에서 오토바이 한대가 고개를 꺽으며 들어서려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먼저 진입했으니 그 친구는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대기했어야 마땅한데 오토바이는 진입로 안으로 5미터 정도 들어와 내게 길을 터준다며 벽으로 붙어섰지만 내 차가 지나가기엔 거의 1센티도 여유가 없었습니다. 짜증이 돋는 게 당연했고 입가에 욕설이 흘러나오려 했습니다. 멍청한 인도네시아놈들. 그렇게 상황판단이 안되냐? 이제 어쩌자는 거야? 너만 없었으면 난 벌써 이 길을 빠져나갔을 거라고!

 

그때였습니다. 만약 정상적인 속도였다면 내가 막 진입로를 빠져나갔을 타이밍에 그 입구에 바짝 붙어 자전거 한대가 휘리릭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한 아줌마가 앞 뒤로 대여섯살짜리 애들을 하나씩 태우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던 이유는 그 타이밍이나 속도로 미루어 만약 내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이 좁은 진입로를 순조롭게 달려 나갔다면 저 속도로 튀어나오는 자전거를 반드시 들이받았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막아주려고 저 멍청한 오토바이가 그 좁은 진입로에서 사려깊게 내 차 앞을 가로막았을 리는 물론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그렇게 되어버렸으므로 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우연을 가장한 보이지 않는 손길이 코 앞의 위기를 스쳐지나가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비단 그 진입로 오토바이 만은 아닐 터였습니다.

 

2013년말 하루밤에 한화 3억여원을 뿌리며 꼬나웨우따라에서 군,관의 고위층들을 VIP로 모시고 대대적인 송년군민잔치를 벌이며 압도적인 사세를 과시했던 릴리는 불과 3주도 채 안된 2014년 1월 하순 인도네시아 광물원석수출금지령이 질효되면서 손발이 꽁꽁 묶이며 사업은 나락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당시 릴리의 군민잔치가 향후 부빠띠(군수) 출마를 위한 릴리의 포석이었을 것이라 생각한 현직 부빠띠는 정적이 될지도 모를 유력인물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측면에서 안똔띰방 같은 현지 거물들을 움직여 릴리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한 끝에 공문서위조라는 중대한 혐의를 걸어 현지경찰이 내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릴리는 잔뜩 움추리지 않을 수 없었고 속절없이 헤체되어 가는 사업체를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희생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광산들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각종 허가들을 유지연장한 것이 주효해 이제 광산사업의 활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획기적인 상황전환이 벌어지기 시작했죠.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내 삼푸르나빌딩의 사무실과 싱가폴 법인도 모두 유지하는 것으로 마지막 순간에 결단내릴 수 있었고 억불 단위의 개별 광산매각이 수순을 밟기 시작하면서 자금도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2013년말 3억원을 하루 밤에 파티비용으로 탕진하지 않았다면 릴리의 2014년은 그렇게 힘든 한 해는 아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릴리를 괴롭혔던 수출규제가 릴리에게는 진입로를 가로막는 오토바이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5만톤짜리 벌크선으로 한달에도 몇차례씩 니켈을 수출하면서 수백만불씩 매출을 올렸던 릴리는 당시 흥청망청하기 시작했고 주변에 모여들어 충성을 맹세하는 육군, 코파수스, 해병대, 경찰들은 물론 심지어 광산인근부락의 양아치들까지 포함해 자신을 칭송하며 손을 벌리는 사람들에게 돈을 퍼주어주고 있었습니다. 릴리에겐 브레이크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는데 그것이 수출규제라는 모습을 띄고 다가왔던 셈입니다. 힘겨운 한 해를 보낸 릴리는 이제 다시 그런 호황을 맞게 되더라도 다시는 예전과 같은 돈지랄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 역시 2014년은 참 힘들었습니다. 오랜 거래선과 거래가 깨지면서 돌아선 거래선은 현지 내 경쟁업체에게 내가 지난 10년간 수입판매했던 브랜드를 공급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경쟁업체가 땅짚고 헤엄치기식으로 시장을 휘뒤집기 시작하고, 공급다브랜드로 마케팅해 왔던 우린 그동안 자체브랜드를 만들지 않았음을 통탄하며 급속히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뭔가 만들어 내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망가지는 것은 실로 순식간입니다.

 

하지만 물론 승승장구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두 아이를 동시에 싱가폴과 호주의 대학으로 보내놓고 그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한 것은 물론 사업도 남못지 않게 키워가던 시절 말입니다. 늘 초심을 잃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으면서도 어느 순간 교만이 찾아오고, 언제나 그렇지만 교만은 우리들의 날개부터 갉아먹어 버리곤 합니다. 어쩌면 난 당시 매너리즘에 빠졌던 것 같고 내부갈등은 괴물처럼 증폭해 가기만 했었죠. 돈은 벌지만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그런 시점에서 난 2014년 다시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던 것입니다.

 

이제 어느 정도 수습이 끝나고 방향이 잡히고 나서야 예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던 열정이 아직 가슴속에 불씨를 피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기억납니다. 예전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업을 키워나갔던 적이 있었다는 걸요. 그리고 깨닫습니다. 그때 그 공급선과의 결별이 내겐 진입로에 나타난 오토바이 같은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냥 지나기도 어려운 좁고 험난한 길을 오토바이가 나타나 막아선다면 그건 꼭 짜증을 내고 욕설을 퍼부어야 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저 골목 끝을 벗어나 큰 길로 나서기 전 잠시 숨을 돌리고 나 자신과 내가 가진 것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조금 속도를 줄여 더욱 집중해야 하는 순간인 것이죠.

 

그래야 하는 것인데 오래 전에 그 방법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2015. 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