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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식 포털 뉴스편집 금지법

beautician 2023. 3. 12. 11:08

대통령령으로 준비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식 포털 뉴스편집 금지법

 

메단(Medan)에서 열린 언론의 날 기념식 (사진출처: 인도네시아 언론위원회 홈페이지)

 

인도네시아 언론인협회(Persatuan Wartawan Indonesia-이하 PWI)[1]는 1946년 2월 9일 솔로(Solo)라고도 불리는 중부자바의 수라카르타(Surakarta)에서 설립되었다.

 

인도네시아의 국부로 추앙받는 수카르노가 독립선언을 발표한 것은 대한민국 해방보다 이틀 늦은 1945년 8월 17일. 그로부터 반년 후, PWI가 설립될 당시의 신생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과거 식민지를 되찾으려 돌아온 네덜란드를 상대로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1945년 10월 27일부터 약 한 달간 벌어진 이른바 ‘수라바야 전투’에서 인도네시아는 막 나치 치하에서 벗어나 국가 재건에 여념이 없던 네덜란드를 대리해 먼저 상륙한 영국군에게 궤멸적 패배를 겪으며 수세로 몰린 시기였다. 연합군의 해상봉쇄도 진행되면서 자바섬 동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공화국은 군, 관, 민 모두 경제적으로도 절체절명의 곤경을 겪었다.

 

공화국은 당시 바타비아(Batavia)라 불렸던 지금의 자카르타를 일찌감치 버리고 중부자바 족자(Jogja)를 임시 수도로 삼았는데 PWI가 설립된 솔로는 족자에서 불과 55킬로미터 떨어진 지근거리의 도시다. 여담이지만 조코 위도도 대통령과 그의 장남이 대를 이어 그곳 시장을 역임하면서 솔로는 최근 새로운 정치 메카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PWI가 처음부터 민족주의 투쟁정신에 충만했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PWI 창립 기념일인 2월 9일은 30년쯤 시간이 흐른 1985년에 언론의 날(Hari Pers Nasional)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매년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포털의 뉴스 콘텐츠 사용료

올해 2월 9일(목)에는 북부 수마트라의 메단(Medan)에서 언론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이 행사 연단에 오른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디지털 플랫폼들이 자기 웹사이트나 포털에 임의로 끌어와 올려놓는 콘텐츠에 대해 해당 콘텐츠 제작사, 즉 뉴스 생산자들에게 이용료를 지불하도록 하는 법안을 조속히 완료할 계획임을 밝혔다. 뉴스 콘텐츠를 마음대로 끌어 쓰는 IT 거대기업들 때문에 뉴스 생산기업들이 존폐위기에 몰렸다는 것이다.

 

그는 거대 기술기업들 디지털 플랫폼에 각종 매체들의 뉴스를 수집, 편집, 추천하는 기사를 선정하고 배열하는 알고리즘이 상업적으로 편향되어 있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들보다 오히려 사소하지만 선정적인 콘텐츠를 전면에 내세워 클릭을 유도해 진정한 저널리즘의 품격을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그런 경향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방점은 윤리적 거대 담론보다는 돈 문제에 찍혔다. 당국은 현재 콘텐츠를 가져다 쓰는 디지털 플랫폼이 콘텐츠 생산자인 언론사에게 해당 대금 또는 사용료를 지불하도록 하는 법안을 초안 중이다.

 

현재 인도네시아 인터넷 광고시장의 60%를 외국계 디지털 플랫폼들이 장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인도네시아식 포털 뉴스편집 금지법 제정은 외국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면서도 이미 인도네시아에 진입한 외국인과 외국기업들에게 꼭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현 정부 기류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자국 우선정책을 내세우며 넷플릭스, 페이스북 같은 대형 해외기업들에게 인도네시아 인터넷 네트워크에서 판매되는 상품과 용역에 대해 부가세를 부과하고, 궁극적으로 현지법인 설립 유도와 법인세 부과를 추구해온 현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로 인해 벌어지는 외국 거대기업들과의 마찰을 별로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당국에서는 거대한 수익을 내는 이들 기술기업들이 그동한 언론 매체들의 뉴스 콘텐츠를 마음대로 끌어 쓰면서 정당한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행태에 주목했다. 언론매체들 자신도 온라인 어그리게이터, 즉 대기업들의 디지털 플랫폼이나 포털에 수입을 뺏기고 있다고 오랫동안 불평하며 이러한 문제를 구조적으로 시정해 줄 것을 정부에 요구해 왔다.

 

하지만 정부가 갑자기 이 시점에서 급발진하며 속도를 내는 것이 조금 뜬금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당장 이번 달에 이해당사자들을 불러들여 회의를 갖고 한 달 내에 해당 법령 초안을 완성할 것이란 시간표를 내놓았고 일부 관련 회의에는 자신이 직접 참석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2]

 

2019년에 재선된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2024년 10월까지 20개월쯤 임기가 남아 있다. 하지만 2024년 2월 대통령 선거까지는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강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차기 대통령이 선출되면 그때부터 모든 새로운 정책들을 당선자와 협의하고 그 의견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논란이나 반발이 예상되는 사안을 소신 있게 밀어붙이려면 지금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번 연설에서 느껴진 대통령의 조급증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MSN 인도네시아 포털 시작화면 (MSN 메인 페이지 캡쳐)[3]

 

제안과 초안 사이

관련 규정 초안은 정보통신부와 언론위원회, 두 곳에서 각각 준비하고 있다.

 

국내 다른 미디어협회들과 소통하여 함께 초안을 만들고 있는 언론위원회(Dewan Pers)는 1966년 정부 소속 자문부서로 만들어졌다. 언론을 ‘관리’하고 언론동향을 감시하는 역할이었으므로 정보국장이 당연직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다가 동남아 외환위기 속에서 대대적인 반정부 민주화운동과 자카르타 폭동이 동시에 벌어져 급기야 수하르토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이른바 민주화 ‘개혁시대’로 접어들자 언론위원회는 이듬해인 1999년 독립기관으로 개편되었다. 여전히 정부자문 역이지만 정보수집, 언론관리 기능은 크게 옅어지고 ‘언론자유를 통한 인권실현’을 모토로 국가차원의 언론발전을 도모하며 언론분쟁이 벌어질 경우 이에 개입해 중재, 해결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4]

 

그래서 당연히 정부와 같은 목소리를 낼 것 같지만 언론위원회는 이번 사안에 대해 정부와 조금 결이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정부가 일곱 페이지 분량으로 정리한 법안 초안에 대해 언론위원회 측은 정부가 언론사와 거대 IT 기업 디지털 플랫폼들과의 관계를 너무 단순화했다는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무하마드 아궁 다르마자야(Muhamad Agung Dharmajaya) 부위원장은 뉴스 생산자들과 IT 기술기업들 각각의 법적 권리를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고 이들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와 당사자들 간에 보다 긴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정부 정리본에서는 뉴스 매체와 거대 기술기업 간 보상 또는 이용료에 대한 협상 방식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있어 언론위원회는 그것으로는 해당 법령의 구체성과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보았다.

 

애당초 언론위원회의 제안은 기술기업 디지털 플랫폼들이 광고수익 및 뉴스 선정, 편집, 배열 알고리즘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콘텐츠 사용료를 뉴스 생산자들에게 선제적, 포괄적으로 제시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만약 뉴스 생산자가 그렇게 제시된 가격을 거부하면 관련 협상을 조율하고 감독하기 위해 만들어질 담당 기관의 감독 아래 플랫폼 기업이 각각의 뉴스 생산자들과 콘텐츠 사용료 등 제반 조건을 일일이 협상해야 한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대통령령 초안 완성까지 한 달의 시한을 언급함에 따라 언론위원회는 ‘마감기한’ 전에 당사자들간의 합의점을 신속하게 도출하기 위해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 어느 형태로든 당국과 기술기업들에게 관련 회의 속개를 요청한 상태다.

 

 

다른 나라 사례

이 사안을 다룬 자카르타포스트(Jakartapost)는 관련 기사에서 호주의 사례를 소개했다. [5]호주는 구글과 호주 소비자 규제기관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은 후 기술기업들의 플랫폼이 현지 뉴스 매체들과 대금지불 문제를 협상하도록 강제하는 규정을 세계 최초로 명문화한 국가다. 2022년 12월에 나온 호주 재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후 호주 뉴스 매체와 대형 소셜미디어 회사 간 최소 30건 이상의 보상계약이 성사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 영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들이 호주 사례를 주목하며 뉴스 매체들과 거대 기술기업들 사이의 건강한 균형을 위해 유사한 법안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도 이번에 호주의 영향을 받았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한국에서도 포털의 뉴스편집 금지에 대한 법안을 마련하자는 논의가 오래 전부터 나왔고 작년 5월 윤석열 정부 인수위에서 해당 문제의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는데 작년 말, 다음과 네이버, 양대 포털이 뉴스 검색을 하려면 뉴스 언론사로 직접 넘어가도록 링크를 거는 아웃링크 도입으로 방향을 잡았다.

 

야후 인도네시아 포털은 메인 페이지에서 2023년 1월 31일 이후 모든 뉴스 링크를 삭제했다 (야후 인도네시아 메인페이지 캡쳐)[6]

 

 언론 지원이 절실한 대선 정국

재선 대통령 임기 5년 중 4년차를 보내고 있는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국민들 사이에서 여전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그간 벌려 놓은 일들을 임기 내에 끝내지 못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물론 지난 3년 간의 코로나 팬데믹에 발목을 잡힌 영향이 크다.

 

초선 초기인 2015년 9월에 착공해 자카르타 시내와 교외를 연결하는 경전철(LRT) 공사는 아직도 전구간 개통을 하지 못했고 중국 기술과 자본을 들여와 올해 7월 개통을 목표로 건설하고 있는 자카르타-반둥 고속철은 여러 기술적인 문제로 개통이 좀 더 연기될 전망이다. 여기엔 돈 문제도 한몫하고 있다. 예산이 빠듯하기 때문이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논란과 반발 속에서도 그간 강력히 밀어붙여온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수도 이전 프로젝트다. 건국 이래 가장 큰 국가 프로젝트인 수도이전 사업은 자바섬 소재 자카르타에 집중된 수도 기능 중 정치, 행정 부분을 현재는 허허벌판 또는 정글지대인 동부 깔리만탄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는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가장 큰 위업이 될 것이다. 물론, 제대로 진행될 경우라는 단서가 붙는다.

 

이 역시 예산이 문제다. 신수도 이전 예산은 466조 루피아(약 40조 원)인데 이중 정부가 재정으로 충당하는 것은 20% 뿐이고 나머지는 민간에서 충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초 300~400억 달러(약 37~50조 원)을 투자할 의향을 보였던 일본 소프트뱅크가 2022년 3월 투자계획을 철회하면서 수도이전비용 조달에 적신호가 켜졌다.[7] 소프트뱅크의 빈 자리를 채울 다른 거대 투자자들이 1년이 다 지나도록 아직 나서지 않고 있다.

 

그런 와중에 최근 신수도청장 밤방 수산토노(Bambang Susantono)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한국 LH공사를 포함한 많은 해외업체들이 투자의사를 보이고 있어 1차 개발부지 921 헥타르의 44배수 청약을 받았고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은 물론 공무원들과 가족들이 살 아파트 수백 동을 건설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지만[8] 이는 블러핑일 가능성이 크다. 불과 몇 개월 전인 2022년 10월 전략국제연구소(CSIS) 조사에서 170명의 건설 전문가들 중 59명이 신수도 이전 프로젝트가 자금부족과 관리 불확실성으로 결국은 구현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9]

 

실제로 인도네시아에서는 몇 백 미터짜리 고가도로 하나 짓는 데에도 3~4년씩 걸리기 일쑤인데 깔리만탄 정글 속에 아직 첫 삽도 제대로 뜨지 않은 신수도가 현 정부 계획대로 불과 20개월 후인 2024년 10월까지 핵심 정부청사 건축을 포함한 1단계 개발공사를 마친다거나[10] 2036년 올림픽을 유치한다는 계획은 현실성이 크게 떨어진다[11].

 

따라서 현 정부로서는 현재 진행 중인 핵심사업들을 다음 정권이 흔쾌히 승계해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거의 완공을 앞둔 수도권 경전철이나 자카르타-반둥 고속철 등은 문제없이 승계되겠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시작도 못한 신수도 이전 프로젝트는 뜨거운 감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만약 신수도 이전 프로젝트가 다음 정권에서 중도 폐기된다는 이는 조코 위도도 대통령 최대 치적이 아니라 최악의 실정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해 내년 2월의 대선과 총선, 11월의 지방선거를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야 할 현 정부로서는 그 전단계로서, 그간 국가원수모독죄 같은 식민지시대 조문들을 존치시켜 언론의 자유를 크게 침해한다고 비난받아온 정보전자거래법(UU ITE) 등으로 각을 세워왔던 현지 언론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것이 절실한 상황인데 이번 인도네시아식 포털 뉴스편집 금지법 제정은 정부가 언론에 내미는 화해의 손길인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공언한 한 달이 지난 후 해당 대통령령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나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끝)



[1] 인도네시아 언론인협회 홈페이지: https://www.pwi.or.id/

[4] 언론위원회 홈페이지: https://dewanpers.or.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