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니 민속과 주술

[버타위 민화] 버따위 사람 시잠빵(Si Jampang)

beautician 2022. 8. 19. 11:55

버따위 사람 시잠빵(Si Jampang)

시잠빵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살았던 버따위 사람 시잠빵의 이야기는 같은 시대 무술의 고수이자 까와론텍 주술을 익혀 총알도 그를 죽일 수 없었다는 시삐뚱(Si Pitung)의 이야기를 닮았습니다. 시삐뚱은 실존인물이었고 그를 네덜란드 총독부의 경찰이 사살한 사건이 당시 신문에도 실린 바 있는데 시잠빵은 여러 면에서 시삐뚱의 행적과 특징을 따라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래서 시잠빵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가닥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도둑 시잠빵의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무술고수이자 도인인 시잠빵의 모험기입니다. 두 가지 모두 시삐뚱의 면모를 조금씩 차용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버전에서 시잠빵은 무술에 조예가 깊어 정글도 같은 무기도 잘 다루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가 더욱 전문성을 가진 분야는 도둑질이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도, 심지어 아내에게 얻은 아이가 청소년이 될 때까지 그는 도둑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명한 부자들을 털었고 그렇게 흠친 물건을 버타위 지역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했으므로 제법 유명한 도둑으로 악명과 명성을 동시에 떨쳤습니다. 그는 그 짓을 그만둘 마음이 없었지만 아들만은 자신을 따라 도둑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종교에 눈뜨기를 원해 쁘산트렌 이슬람 기숙학교에 진학시키려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조건을 하나 들고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나쁜 짓을 그만둔다고 약속하면 쁘산뜨렌에 기꺼이 들어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쁘산트렌에서 알꾸란과 기도를 배우는데 아버지가 도둑질을 계속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시잠빵은 그 말에 일단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후 어느날 그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 사르바(Sarba)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르바의 아내 마양사리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꺼뿌바뚜산(Gunung Kepuh Batu)을 찾아가 순례하며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사르바는 신이 그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물소 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후 마양사리가 실제로 임신하여 아이를 낳고 압디(Abdih)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압디가 이제 십대에 들어섰을 때 사르바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에게 물소 두 마리를 바치겠다는 맹세를 지키지 않아 죽게 된 것이라고 수군거럈습니다.

 

보통의 전설이라면 대략 이 대목에서 시잠빵이 삶의 무상함을 느끼고 나쁜 짓에서 손을 털고 회개할 타이밍이지만 이 민화는 놀랍게도 그 클리셰를 간단히 깨버립니다.

 

마양사리는 젊은 시절 아름다운 여인으로 유명했는데 이미 과부가 된 지금도 여전히 고운 자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를 눈여겨보던 시잠빵은 마침 자신도 홀아비였으므로 대뜸 마양사리에게 청혼을 한 겁니다. 친구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들은 후 한 행동으로는 참 뜬금없었습니다.

 

마양사리는 그런 시잠빵의 행동에 기가 막히다며 청혼을 거칠게 거절했고 시잠빵은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남편을 잃은 마양사리를 위로해 주어야 할 시점에 그는 마양사리에게 저주를 걸어줄 두꾼 흑마술사를 찾았습니다. 마침 사르삔이란 이름의 조카 소개를 받아 가부스 마을에 사는 빠둘(Pak Dul)이란 이름의 저주술 전문 두꾼을 만났습니다. 시잠빵을 마양사리에게 저주술을 걸어달라고 빠둘에게 주문했습니다.

 

산뗏 저주를 맞은 마양사리는 미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며 울고 웃으며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보였는데 아들 압디가 어머니의 용태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보살폈습니다. 어머니의 광기를 고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던 압디도 결국은 두꾼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가부스 마을의 두꾼 빠둘이었습니다. 그는 마양사리를 어렵지 않게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자기가 건 저주의 경우 당사자가 그 저주를 푸는 것은 간단했습니다. 독을 쓰는 사람이 그 해독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눈치가 빠른 압디가 그걸 눈치챘습니다. 그리고 빠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시잠빵이 빠둘을 시켜 어머니에게 산뗏 저주를 했음을 알게 됩니다. 압디는 이를 갈았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시잠빵은 압디를 찾아가 어머니 마양사리와 결혼하고 싶다며 그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압디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저씨가 제 어머니에게 청혼하는 걸 거절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란 게 뭐냐?”

“혼인 지참금으로 물소 두 마리를 주세요. 그게 조건입니다. 아저씨.”

 

물소

 

물소 두 마리를 구하는 것은 돈이 꽤 드는 일이었으므로 간단치 않았으나 시잠빵은 일단 그 조건을 수락하고서 방법을 고심했습니다. 그러다가 땀부(Tambuh) 지역에 사는 하지 사우드(Haji Saud)가 엄청난 부와 인색함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습니다. 시잠빵은 조카 사르삔에게 하지 사우드를 함께 털자고 권유했습니다.

 

압디는 천상 도둑인 시잠빵이 물소 두 마리를 구하기 위해 반드시 다시 도둑질을 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 돈을 구하려면 분명 하지 사우드를 노릴 거라는 것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잠빵이 조카 사르삔과 함께 검은 색 옷을 입고 하지 사우드의 집에 침입했을 때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매복하고 있다가 그들을 포위하고 말았습니다.

 

시잠빵과 사르삔을 혼신의 힘을 다해 그곳을 빠져나오려 하지만 사르삔이 먼저 등에 총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하고 시잠빵은 타고난 무술실력과 얼마간의 도술을 이용해 담을 몇 개씩이나 타고 넘어 도주하지만 결국 경찰의 집중사격을 받아 죽고 맙니다.

 

마양사리와 압디는 시잠빵이 죽었다는 소식을 다음날 아침에 듣게 됩니다. 아버지 사르바가 신에게 약속했던 물소 두 마리가 아버지를 죽게 했는지 몰라도 똑 같은 물소 두 마리로 어머니를 구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압디는 참 공교로운 일이라 여기면서도 시잠빵의 죽음을 다행스러워했습니다.

 

 

다른 결말

두 번째 버전에서는 시잠빵이 도주하려다가 현장에서 경찰에게 사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버따위의 부자들은 더 이상 악명높은 시잠빵 때문에 불안에 떨 필요가 없게 되었다며 기뻐했지만 서민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이 버전에서 시잠빵은 도둑이라기보다 뛰어난 무술교관이자 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의 뒷 얘기를 모르는 서민들에게 시잠빵은 영웅이었던 것입니다.

 

이 버전은 시작부터 첫 번째 버전과 완전히 바릅니다. 시잠빵은 고향에서 하지 바시르(Haji Baasyir)의 제자이자 그곳 어린 학생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교관이었습니다. 그는 힘없는 이웃들을 악당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모든 무슬림들은 힘을 키워야 한다고 늘 얘기했다고 합니다. 사실 평생 도둑질을 한 사람으로서는 할 얘기가 아닐 듯한데, 그래서 이 버전 속의 시잠빵은 완전히 다른 인물로 묘사됩니다.

 

하지 바시르는 시잠빵처럼 의욕넘치는 사람을 좋아했는데 어느날 그를 불러 자신의 동생엑 편지를 한 통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시잠빵은 하지 바시르를 존경했으므로 그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정오가 좀 지산 시각에 끄바요란 지역에 도착했는데 일단의 공무원들이 그곳을 시찰하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모두 길가에 나와 도열해 고개를 숙여 공무원들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시잠빵은 그 장면이 못마땅했습니다. 이미 왕이 통치하던 시대가 끝났고 모든 이들이 신 앞에 평등한데 왜 공무원들과 관료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느냐는 것이었어요. 그는 그런 신념으로 관료들과 부자들의 부당한 갑질로부터 서민들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가 강가를 지날 때 한 여인이 도와달라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보니 한 남자가 막 목욕을 마친 여인을 거칠게 능욕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지역을 주름잡던 시자브릭(Si Jabrig)의 갱단 소속 께뼁(Kepeng)이란 자였고 그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처한 여인은 빠수딘(Pak Sudin)의 딸 시티(Siti)였습니다. 시잠빵은 크게 분개하며 여인을 구하려 했고 결국 께뼁과의 싸움이 불가피했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께뼁을 간단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깨평도 없었습니다.


시잠빵이 시티를 집에 데려다 주자 시티의 아버지 빠수딘은 이를 치하하며 감사의 표시로 하지 바시르가 시잠빵에게 편지를 전하라 한 하지 하산의 집으로 자신이 직접 시잠빵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하지 바시르가 쓴 편지의 내용은 하지 하산이 데리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도 무술을 가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엔 버따위 지역 변두리의 치안이 좋지 않았으므로 각자 사는 곳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무력이 필요했습니다. 시잠빵은 그곳 젊은이들에게도 무술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시잠빵이 그곳 젊은이들을 잘 가르쳐 그들의 무위가 높아지자 잠브릭 무리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우려해 시잠빵을 없애기로 마음먹고 하지 하산의 학교를 습격했습니다. 하지만 시잠빵은 녹녹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꺼뿌산(Gunug Kepuh)의 무술학교를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자브릭 무리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잠빵이 처들어온 자브릭 무리들을 모두 박살내자 그곳 마음엔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잠브릭 일당이 와해되면서 시잠빵의 임무도 끝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 일로 그의 실력과 명성이 더욱 유명세를 탔습니다.

 

당연히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시잠빵이 고향마을에 도착하자 수브로와 가부스 두 사람이 시잠빵을 모함했습니다. 시잠빵이 지주인 하지 사우드 집에서 물소 두 마리를 훔쳤다고 소문을 낸 것입니다. 그들은 한때 시잠빵과 겨루었다가 진 사람들이었는데 그간 앙심을 품고 있다가 이 참에 시잠빵을 감옥에 보내기 위해 경찰에 신고까지 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함정이란 것을 알고 하지 바시르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하지 바시르는 시잠빵이 하지 사우드를 직접 만나 진짜 상황이 어떤지를 깨닫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조언을 따르는 듯했던 시잠빵은 오히려 하지 사우드의 집을 털어 물소들과 값나가는 패물들을 들고 나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실은 물소를 털린 일도 업으면서 하지 사우드가 수브로, 가부스의 부추김에 넘어가 경찰에게 시잠빵의 혐의를 허위로 증언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분노한 하지 사우드가 또 다시 경찰에게 시잠빵의 강도사건을 고발했으므로 경찰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해 시잠빵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시내 곳곳에 매복하며 포위망을 펼쳤고 결국 시잠빵이 걸려들자 사격을 가해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전설에 따르면 시잠빵은 거기서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잠빵이 도술을 부려 바나나 나무를 자기 모습으로 바꾸었는데 결국 경찰이 쏴죽인 것은 시잠빵이 아니라 그 바나나 나무였다는 겁니다.

 

그후 시잠빵은 홀연히 끄바요란에 나타나 빠수딘의 딸 시티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예전 바타비아의 구도심에서 스노빠티, 블록엠 등이 있는 끄바요란 지역은 요즘엔 차로 20-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19세기 식민지 시대엔 서울과 시골 오지 같은 정도의 시간적, 문화적 거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시잠방의 버따위 민화나 시삐뚱의 서사를 보면 도둑이 영웅으로 추앙받기 위한 몇 가지 원칙이 엿보입니다. 그건 그의 출중한 능력, 인간적인 매력, 가난한 이를 돕거나 식민종주국 군경과 맞서는 고귀한 명분 같은 것들입니다. 그건 로빈훗이나 양산박에서도 똑 같은 원리로 작용하죠.

 

거기에 하나 더, 인도네시아 민화에서는 고대에서나 근대에서 모두 주인공이 두술을 부릴 줄 안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한국의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운동투사들은 엄혹한 현실 속에서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감수하며 일본과 싸웠던 사실이 역사나 소설에서 대체로 현실적으로 묘사되는데 주술과 기적이 난무하는 인도네시아 투사들의 이야기는 어딘가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어쩌면 더욱 처참하고 엄혹했기에 판타지를 덧씌운 것인지도 모르고요. (끝)

 

시삐뚱 아트워크

 

출처:

https://histori.id/legenda-si-jampang-dari-betaw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