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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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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 이유

beautician 2022. 8. 9. 11:07

조직 관리는 사람 관리

 

사실 사람들이 내 말을 잘 듣지 않는 이유를 모르는 바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다.

 

지난 세기에, 군시절에 난 소위를 달고 임관해 중위로 전역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휘하에 소대원들이 있었다. 

그때 깨달은 사실은 사람좋은 소대장을 소대원들이 편하게 느끼니 부대 분위기는 좋아지지만 정작 필요한 상황에서 해당 소대장이 소대원들을 자기 뜻, 또는 부대 작전에 따라 '움직이도록', 또는 '부리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었다. 소대원들은 사람좋던 소대장이 어느날 소리를 치며 어떤 방향을 강제하려 하면 '나쁜 놈'이라고 수군거리는 게 보통이었다. 오히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악마같은 소대장이 평소엔 소대원들을 닥달하다가 어느날 조금 풀어주고 유도리를 보이면 훌륭한 지휘관이란 찬사를 받곤 했다. 난 도대체 그런 생각의 메커니즘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의아해 하곤 했다.

 

사실 그건 그리 심오한 진리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에겐 '평소' 생활이라는 게 있는 거고 거기서 좋아지면 기뼈하고 나빠지면 분노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소대장이 인성이 좋든 나쁘든 그건 소대원들이 평소에 겪는 디폴트이므로 더 좋아지면 소대원들은 기뻐하고 나빠지면 분노하고 반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 최선의 인성을 발휘해 소대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소대장들은 더 이상 좋아질 길이 없으니 어느 순간 한번 화를 내는 것만으로 최악의 지휘관이 되는 것이고 소대원들 박박 돌리던 인성 똥밭의 소대장이 어느날 술이 덜 깨 소대원들 뺑뺑이 돌리는 걸 하루 까먹으면 소대원들은 이게 웬일이냐며 최고의 지휘관으로 추앙하게 되는 것이다.

 

비단 군대 뿐이 아니다.

학창시절 학생들을 그렇게 줘패던 학생주임을 나중에 훌륭한 교사로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심지어 빵셔틀을 시키거나 똘만이처럼 자신을 다루던 학폭 가해자, 일진을 좋게 평가하는 이들도 그래서 넘쳐나는 것 같다. 사회에서도,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난 군시절, 그런 경험을 한 후에도 대기업을 다니고, 인도네시아에 넘어와 내 사업을 하면서도 악독한 상사나 사장이 되지 못했다. 오죽하면 2016년 재외동포문학상에 보냈던 소설 제목 '지독한 인간'이 내가 선망하는 인간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은 사람들 앞에서 개새끼처럼 행동하는 게 내 적성에 맞지 않았기 떄문이다.

 

직장에서 합리적인 상사와 개차반 상사 사이에는 많은 차별점이 있겠지만 그걸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아랫사람 또는 직원들을 한 조직 안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로 보느냐 아니면 내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동료로 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기반으로 한다. 내 부하이니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게 아니라 한 명의 인격체로서 양해와 동의를 얻어 함께 일을 해나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상사로서의 내 권리를 주장하는 것보다 평화롭고 순조로운 관계유지와 일의 진행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하나는 내가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시간을 많이 잡아 먹을 수도 있다는 것. 결국 효율성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하직원을 자원으로 본다는 것은 그들을 착취 대상으로 본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니 부하직원들을 자기 감정을 배설하는 변기통처럼 사용하는 상사들이 그렇게도 많은 것이고 부하직원의 노력과 결실을 뺴앗아 자신의 실적으로 과시하는 부장, 이사들이 그리 널려 있는 것이다. 그런 상사는 양보할 필요도 없고 효율성을 희생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사실은 부하들, 가족들, 주변 모든 사람들을 자원이나 소모품으로 보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수 있다.

 

스스로 인성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당연히 부하직원들, 가족들, 심지어 자녀들을 '동료'로 보고 존중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현실세계에서 조직은 그런 식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 그건 내가 평생을 살며 깨달은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사람들을 자원으로 보고 착취하면 살 수도 없다. 사람은 대개 태어날 때 그가 어떤 사람인지 결정되는 것이다. 중간에 아무리 지독한 인간이 되려 해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잘 될 리 없다.

 

그래서 처음 들어갔던 대기업에서 상사들에게 '자원'으로서 착취당하고서도 이후 내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에겐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나를 스쳐 지나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남은 사람은 릴리와 메이 뿐이다. 

 

부하를 동료로 대하며 배려하고 양보하는 데도 왜 주변에 남는 사람이 없을까? 그 이유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첫 번째는 나는 그들을 동료로 대했으나 그 순간 그들은 나를 '자원'으로 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 대한 착취를 포기한 순간 내 배려와 진심을 그들이 착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어느날 내가 늦어지는 보고서를 독촉하고 저조한 실적을 지적하는 순간 그들은 반성하거나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시작하곤 한다. 부하들이 여러 명일 경우 대개 그들은 작당해서 오히려 공격해 오고 때로는 사표를 던지기도 한다. 나 없이 네가 할 수나 있나 보자면서.

 

두 번째는 내 한계효용, 이용가치가 끝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재벌가의 일원이거나 아직도 뜯어먹을 게 많이 남은 부자라면 사람들이 쉽게 등을 돌릴 리 없지만 그렇지 않으니 미련없이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지독한 인간이 되지 못한 채 인도네시아에서 30년 가까지 살면서 릴리와 메이가 남은 것에 대해, 난 나름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영 잘못 살진 않았다고 말이다.

 

최근 한 조직에서 2년간 함께 일했던 여직원의 행동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모든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재택근무가 일상화되고 그 친구는 아버지가 코로나로 사망하고 어머니 병세가 악화되어 이런 저런 편의를 봐주기 위해 업무량과 강도를 수시로 조절해 주었는데 그게 '평소' 또는 '디폴트'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미 다 만들어진 서류의 일부를 수정해, 직접 보내라는 것도 아니고 이메일이나 whatsapp에 첨부해 보내라고 한 지시를 일주일째 이행하지 않고 있다. 지시한 지 나흘 만에 보낸 회신에서 '아이가 아파 병원에 다니느라 못했다'고 얘기했지만 그 후 이틀 동안 역시 아무런 후속조치도 하지 않고 있다.

 

내가 동료로 보았던 그 친구가 내 선의와 배려를 착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현상이 바로 이번 주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나도 생각이란 걸 또 해보게 된다.

그래서 나도 평생 가져왔던 내 기본 스탠스를 버리고 주변 사람들을 착취하기 시작할까?

 

뭘, 이제 와서.

바꾸려 했다면 지금이 아니라 30여년 전 소대장 시절에 바꿨어야지.

 

난 여전히 '지독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2022.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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