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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와 한국외국어대학교

beautician 2022. 6. 21. 11:52

인도네시아 이야기

배동선 (영어 82)

 

  인도네시아는 미국이나 호주처럼 많은 한국인들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이민을 꿈꾸는 나라도 아니고 유럽의 국가들처럼 발달한 학문과 문화를 배우기 위해 유학하는 곳도 아니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일하러 다녀가는 곳이었다. 그래서 평소 2만 명 전후 규모의 현지 교민사회는 당연히 주재원들과 사업가들로 넘쳐나지만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필자는 한때 인도네시아 도로명에 꽂힌 적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거의 대부분 도시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중앙통에 수디르만이나 탐린, 가똣 수브로토 같은 이름의 도로명을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분명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 이름일 텐데 퇴계로, 충무로, 율곡로가 서울에만 있다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이례적이었다. 그 이름들을 조사해 대부분 국가영웅이란 것을 확인하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연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20세기 초-중반의 인도네시아 역사가 윤곽을 드러냈다. 그 내용을 정리해 2018<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라는 책도 나왔다. 본의 아니게 인도네시아 역사전문가가 된 것이다.

 

현지 한인사회에서 문화부문 전문가가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인력 풀이 워낙 작기 때문이다. 모종의 계기로 인도네시아 무속을 몇 년 공부하고 본국의 한 만화 스튜디오와 합작해 인도네시아 청소년들을 위한 호러만화를 현지 출간한 후 필자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도 귀신전문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전문가 되기 참 쉽다.

 

  그러다가 현지 한인회 주관의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편찬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마침 2020년은 첫 한인이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지 100년째 되던 해였다.

 

  수교 이전 초창기 인도네시아 교민사회 역사를 연구하면서 한인 100년사의 첫 화두를 던진 사람은 코데코 출신 김문환(마인어 69) 동문이었다. 그가 2013년 출간한 <적도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혼>은 사실상 한인 100년사의 근간을 이룬다. 그를 집필대표위원으로 추대하는 데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당시 집필진들이 한국과 인도네시아에 나뉘어 포진했고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선 양국간 물리적 교류도 집필위원들 간 긴밀한 조율과 협의가 필요했다. 이를 담당할 총괄위원으로 한국 쪽은 신성철(마인어 82) 데일리인도네시아 대표가, 인도네시아 쪽은 배동선(영어 82) 작가가 선임되었다. 세 사람은 집필위원이기도 했으므로 결과적으로 한국외대 동문들이 <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 편찬의 중심축을 이루었다. 이승민(마인어 64) 변호사는 고문 및 감수위원으로 참여했다. 

 

  한인 100년사 편찬과정에서 필자는 관공서, 민간단체, 동문회 부분 집필을 담당했다. 동문회에 대해서는 1970년대부터 한인사에 등장하는 한국외대, 서울대 농대, 고대 임학과 출신들의 자료를 주로 조사했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외대 동문들의 진출이 단연 두드러졌다.

 

1954년 설립된 한국외국어대학교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이하 마인어과)를 설치한 것은 10년 후인 1964년의 일이다. 1973년 인도네시아와 대사관계 수교를 전후해 한국외대 출신들이 속속 인도네시아에 입국했다. 초창기에 배편으로 입국한 이들도 있고 또 다른 상당수가 지금은 일반 도로로 개조된 끄마요란 비행장을 통해 들어온 이들도 있었다.

 

한국외대 동문회 자료에 따르면 오세윤(영어 58)1967년 서울통상 주재원으로 처음 자카르타에 나왔고 이진휴(마인어 64)1971 1월 코트라 주재원으로, 이승민(마인어 64)은 그해 4 ()인니 동화 현지법인 창립멤버로, 여한종, 이주명 등도 그해 코데코(남방개발) 직원으로 입국했다. 1972년에는 미원 현지법인 창립멤버로 김종권(마인어 65), 거의 같은 시기에 신성철(마인어64)과 엄기흥(마인어 64)이 들어왔고 다음 해인 1973년엔 이헌(마인어 64), 고인환(마인어 65), 1974년엔 최재흥(마인어 67), 김동윤(마인어 67)이 인니동화(현 코린도), 홍지웅(마인어 65), 김학수(마인어 66), 김태훈(마인어 66)이 미원 현지법인으로 나왔다. 1975년 지동주(마인어 68)가 인니동화로, 김동성(영어 67)이 남양어망 주재원으로, 이중현(마인어 67)이 코오롱건설 주재원으로 입국했다. 그해 율산 주재원 민경희(마인어 68), 김익성 (영어 56), 코데코 김양수(마인어 67)도 인도네시아 땅을 밟았다. 

 

지금도 우리 공관과 한인 기업들을 다니다 보면 한국외대 출신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둥문들 중엔 인도네시아 공관장 또는 인근 국가 공관장을 지낸 이들도 있다.

 

처음 코데코 직원으로 입국했던 여한종(마인어 64)은 인도네시아 최초 교민 장윤원 선생의 막내딸 장평화가 한국 대사관 비서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알게 되어 1974년에 결혼했다. 그는 그해 지역전문가 외교관으로 특채되어 영사, 공사를 거쳐 1998~2002년 기간 파푸아뉴기니 대사로 근무했고 2019년 작고했다.

 

우리 대사관 13대 윤해중 대사(정치외교학 64), 아세안대표부 2대 서정인 대사(독일어 80), 3대 김영채 대사(영어 84)도 한국외대 출신이다.

 

  한인 100년사가 500쪽 정도로 분량이 제한되면서 한국외대 초창기 동문들에 대한 이 원고는 절반도 실리지 못했다. 현지 한인사회 저변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동문들 개개인이 고군부투하며 교민사 각 부분에 자리매김해 가는 모습을 충분히 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개개인의 헌신과 노력을 토대로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이룬 한국외대 동문들의 집단적 위상을 생각하면 이젠 오세윤(영어 58) 동문의 1967년 첫 인도네시아 도착을 기념해 오는 2027년쯤 <인도네시아 한국외대 60년사> 출판계획 같은 것을 수립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도 싶다. ()

 

2019년 재인니 한국외국어대학교 동문회 송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