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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뚜아(Hang Tuah)와 네 친구들 본문

인도네시아 근대사

항뚜아(Hang Tuah)와 네 친구들

beautician 2022. 1. 15. 12:00

말라카 왕국의 수군제독 항뚜아 (Hang Tuah)

 

항뚜아의 부조  

 

‘왕들의 탄생’이란 의미인 술라라투스 살라틴(Sulalatus Salatin)은 왕실의 역사, 관습, 족보 등을 담고 있는데 여러 가지 판본에서 항뚜아는 대체로 일관되게 가난한 어부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항뚜아는 15세기 말라카 멀라유 술탄국(Kesultanan Melayu Melaka) 시대 멀라유족의 전설적 영웅이다.

 

유년기 

항뚜아의 부모 항 마흐무드(Hang Mah­mud)와 당 머르두(Dang Merdu)는 오늘날 리아주 제도의 휴양섬인 빈딴섬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당시엔 휴양지가 아니라 척박한 오지였다. 그곳의 왕은 시간뚱 산지(Bukit Sigantung)를 다스리는 상 사뿌르바(Sang Sapurba) 왕의 아들 상 마니아카(Sang Maniaka)였다.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항뚜아는 10살쯤 되었을 때 또래 친구들인 항저밧, 항르끼우, 항까스뚜리, 항르끼르 등 네 명의 친구와 함께 남중국해를 항해했는데 자주 해적들의 습격을 받았다. 하지만 항뚜아와 친구들은 용맹스럽게 해적들을 물리쳤고 그 소식은 빈딴 왕의 재상 빠두카(Bendahara Pa­duka)의 귀에도 들아갔다. 재상은 그들의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항뚜아와 네 친구들은 어느날 재상을 공격하던 네 명의 폭도를 제압하는 일이 있었다. 재상은 그들을 모두 수양아들로 삼았고 그들이 이뤄낸 일들을 샤 알람 국왕(Baginda Raja Syah Alam)에게도 보고했다. 국왕도 그들의 영웅적 행동에 감명받아 마찬가지로 모두 수양아들로 삼았다.

 

따밍사리의 끄리스

몇 년 후 국왕은 새로운 수도 터를 찾고자 항뚜아와 그 친구들을 포함한 왕국의 장군들과 함께 말라카 해협과 싱가포르 해협 일대를 뒤졌다. 그 과정에서 르당 섬(Pu­lau Ledang)에서 그들은 한 마리의 흰 사슴을 발견했는데 포획이 쉽지 않았다. 흰 사슴을 숲에서 만난다면 그곳이 나라 세우기 좋은 곳이라는 선인들의 예언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숲에서 발견한 말라카(Melaka) 나무 이름에 따라 그곳에 말라카 왕국을 건설했다.

 

말라카 나무  

 

다시 몇 년이 지난 후 국왕은 이번엔 인드라뿌라 왕국(Kerajaan Indrapura)의 최고 재상 스리 버누아(Seri Benua)의 아름다운 외동딸 뚠 테자(Tun Teja)에게 청혼을 넣었으나 재상의 딸은 그 청혼을 거절했다.

 

국왕은 이번엔 마자빠힛 왕국 스리 버따라(Seri Betara) 국왕의 외동딸 라덴 갈루 마스 아유(Raden Galuh Mas Ayu)에게 청혼을 넣었다. 마자빠힛은 당시 자바땅에 거대한 왕국을 일구고 있었다. 말라카 술탄국의 술탄 무자파르 샤(Sultan Muzafar Shah)는 마자빠힛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고 싶어 항뚜아와 네 친구들을 포함해 장군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마자빠힛으로 보냈다. 그들은 술탄의 환영을 받았고 진기한 공물들을 전달했으나

 

청혼이 받아들여져 결혼식을 하루 앞둔 날 마자빠힛 왕궁에서 따밍사리라는 용사가 갑자기 화를 내며 이의를 제기했다. 따밍사리가 청혼의 의도를 따져물을 것이다. 항뚜아는 국왕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따밍사리와 결투에 나섰다.

 

호각을 이룬 결투 중 항뚜아가 먼저 따밍사리의 몸을 끄리스로 찔렀으나 그의 몸에 상처를 내지 못했다. 따밍사리에게 금강불괴의 주술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항뚜아는 따밍사리의 방검주술이 그의 끄리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고 결투 중 자신을 찌르려던 따밍사리를 살짝 피해 벽에 박혀버린 끄리스를 항뚜아가 따밍사리로부터 빼앗아 들었다.

 

그러나 무기를 뺏겨 이제 비무장이 된 따밍사리를 곧바로 공격하는 대신 항뚜아는 자신의 끄리스를 따밍사리에게 던져 주며 결투를 계속했다. 그 결과 항뚜아는 마침내 따밍사리를 죽일 수 있었다. 결투를 지켜본 마자빠힛의 국왕(수랍라바와 왕(Raja Suraprabhawa)이라는 기록도 있음)이 그 끄리스를 항뚜아에게 하사했다.

 

현재 동부자바에는 따밍사리의 끄리스라고 주장하는 유물이 있다.  

 

 

절친 항저밧과의 생사결

국왕은 왕후가 된 라덴 갈루 마스 아유와 함께 사절단의 호위를 받으려 말라카 왕국으로 돌아갔고 왕국은 이후 몇 년간 안전하고 평화로웠다. 항뚜아는 국왕의 신임받는 수군제독으로서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왕궁 안에는 그를 시기하는 세력들이 그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항뚜아가 국왕의 후궁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소문을 퍼뜨린 사람은 항뚜아를 대적하던 대신 빠티 꺼르마 위자야(Patih Kerma Wijaya)였다.

 

격노한 국왕은 빠두카 재상(Bendahara Paduka)에게 항뚜아의 유배를 명했다. 하지만 항뚜아가 무고함을 알고 있던 재상은 왕의 명령을 이행하는 대신 항뚜아에게 급히 인드라뿌라 왕국으로 도망가라고 알렸다.

 

그렇게 도망친 인드라뿌라에서 항뚜아는 일전에 말라카 국왕이 청혼했던 뚠 테자의 유모 당 랏나(Dang Ratna)라는 여인과 인연이 닿아 그녀의 수양아들이 되었다. 항뚜아는 당 랏나를 통해 뚠 테자에게 안부를 전했다. 당 랏나의 노력으로 항뚜아에게 호감을 갖게 된 뚠 테자는 이후 항뚜아와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말라카에서 배 한 척이 인드라뿌라에 도착했다. 그 배를 타고 온 뚠 랏나 디라자(Tun Ratna Diraja)와 뚠 비자 수라(Tun Bija Sura)는 항뚜아에게 말라카로 돌아올 것을 종용했다. 그리하여 귀국길에 오늘 항뚜아의 곁에 뚠 테자와 당 랏나도 함께 했다. 말라카에 도착해 국왕을 알현한 항뚜아는 자신이 그간 인드라뿌라에 가 있었으나 왕국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없음을 먕세했고 그를 데려온 뚠 랏나 디라자는 과거 국왕이 관심을 가졌던 뚠 테자가 항뚜아와 함께 왔음을 알렸다. 이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지만 결국 뚠 테자는 항뚜아를 사랑하면서도 말라카 국왕의 두 번째 왕비가 되기로 했고 항뚜아는 말라카의 수군제독의 자리에 다시 올라 왕의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몇 년 후 다시 그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그 모함에 넘어간 국왕은 항뚜아를 처형하라고 명했다. 그를 보호하려 한 재상은 항뚜아의 처형명령을 거두고 말라카의 북쪽으로 유배하는 것으로 처벌을 줄여달라고 간청했으나 국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재상은 항뚜아를 처형한 것처럼 꾸미고 실제로는 북부 오지로 보내 그를 숨겼다. 항뚜아는 유배를 떠나기 전, 마자빠힛 왕국의 국왕으로부터 받은 금강불괴의 주술이 담긴 따망사리의 끄리스 단검을 재상에게 맡기며 국왕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절친 항저밧이 말라카 수군제독이 되었고 국왕은 그에게 따망사리의 끄리스를 하사했다.

 

항뚜아가 떠난 후 항저밧은 오만에 빠져 권력을 아무렇게나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대신들과 후궁들에게도 오만방자하게 행동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설득하고 자제를 촉구했지만 항저밧은 듣지 않았다. 항저밧의 불손함에 국왕도 격분해 그를 치려 했지만 왕궁의 군사들 그 누구도 항저밧을 당하지 못했다. 그제서야 국왕은 항저밧을 감당할 수 있는 오직 한 사람 항뚜아를 처형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그때 재상이 사실은 항뚜아를 살려 북부지역으로 유배보냈다고 왕에게 속삭였고 이에 반색한 왕이 항뚜아를 부르자 그는 지체없이 이에 응했다.

 

왕궁에 돌아온 항뚜아는 항저밧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고 국왕은 그에게 뿌룽 사리(Purung Sari)라는 이름의 끄리스를 하사했다. 그리하여 오랜 절친이었던 이들 두 명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항뚜아는 따망사리에게 그리했듯 항저밧의 손에서 따망사리의 끄리스를 빼앗아 그 단검으로 절친의 가슴을 찔렀고 항저밧은 항뚜아에게 안겨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 이후 항뚜아는 다시 수군제독이 되었고 왕국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항뚜아와 항저밧의 결투  
항뚜아의 팔에서 눈을 감는 항저밧  

 

이제는 전설이 된 항뚜아의 이야기는 여러 판본들이 존재하는데 특히 항저밧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이런 버전도 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부당하게 처형되었다고 확신한 항저밧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했고, 사면을 받은 항뚜아가 돌아와 항저밧과 7일간 밤낮으로 싸웠지만 결판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항두아는 항저밧이 당시 가지고 있던 따밍사리의 끄리스를 뺏어 그를 찔렀지만 항저밧은 바로 죽지 않고 상처를 붕대로 감은 채 사흘간 수도를 초토화시키며 수천 명의 군사들을 죽였고 마침내 항뚜아와 마지막 결전을 벌인 끝에 그의 팔에 안겨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은 후자의 버전에 방점을 두는 듯하다. 전자라면 초심을 잃은 반역자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우정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정의로운 인물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2021녀 6월부터 인도네시아 일반국민대상 백신접종 드라이브가 시작되면서 많은 교민들이 접종하러 갔다가 거절당해 돌아왔던 남부자카르타의 보건소도 ‘BBKB Hang Jebat’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데 반역자라면 정부산하기관이나 도로명에 항저밧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남부 자카르타 항저밧 보건소  

 

포르투갈 해군과의 말라카 해전

항뚜아 제독은 항저밧이 죽은 후에도 주다(Judah)와 룸(Rum) 등으로 해외원정을 자주 나가 말라카 왕국의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이 시기에 말라카 국왕은 항뚜아가 이끄는 사절단의 선단이 인디아의 비자야 나가람 왕국(Kerajaan Bijaya Naga­ram)까지 보내기도 했다.

 

인디아 다음엔 중국으로 항해했다. 하지만 중국의 항구에서 포르투갈 선박들과 충돌이 생겼다. 오만한 포르푸갈인들이 항뚜아 사절단의 선박을 포르투갈 선박 옆에 정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항뚜아가 중국의 황제를 만나고 다시 말라카로 돌아오던 중 포르투갈 선단의 공격을 받았지만 이를 분연히 격퇴했고 포르투갈 선단은 필리핀의 마닐라 총독부가 있는 곳으로 도주했다. 항뚜아의 선단은 말라카에 무사히 돌아왔다.

 

어느날 말라카 국왕은 항뚜아 제독, 빠두카 라자 재상과 함께 선단을 이끌고 가족들과 함께 싱가포르 일대를 돌며 경관을 즐겼다. 싱가포르 해협에 이르렀을 때 국왕 샤 알람은 자신이 탄 배 가까이에 금빛 비늘에 다이아몬드 같은 눈을 가진 물고기가 접근하는 것을 보다가 왕관을 바닷물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이를 본 항뚜아가 따밍사리의 끄리스를 쥔 채 지체없이 물 속에 뛰어들어 바다 밑으로 가라앉던 왕관을 간신히 건져내 수면 위로 올라 국왕의 배로 향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흰 악어의 공격을 받아 싸우는 과정에서 왕관과 끄리스는 모두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악어를 해치운 후 그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왕관과 끄리스는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그 사건이 있은 후 국왕과 항뚜아는 모두 눈에 띄게 기운을 잃었고 자주 병을 앓았다.

 

한편 항뚜아에게 해전에서 패하고 도망쳐온 장교들의 보고를 들은 마닐라의 포르투갈 총독은 격분했고 수 개월 후 전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말라카 해협으로 출동시켰다. 그렇게 벌어진 해전에서 많은 말라카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 공교롭게도 항뚜아는 중병에 걸려 투병 중이었다.

 

하지만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국왕은 재상을 불러 항뚜아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요구했다. 항뚜아는 아직 건강이 돌아오지 않았으나 즉시 그 부름에 응해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과의 해전에 나섰다. “무얼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까? 저들을 당장 쫓아내겠습니다.” 항뚜아는 전선으로 나가며 이렇게 말했다.

 

항뚜아는 전장에서 결단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포격전과 백병전으로 포르투갈 군대에 맞서다가 포르투갈 군의 총탄에 맞아 7미터를 날아가 바닷물 속에 빠져버렸다. 그는 곧 구조되었지만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한편 말라카 해협에서의 해전은 말라카 수군과 포르투갈 군 양측 모두는 큰 피해를 입고 승패를 정하지 못한 채 각각 말라카 왕국과 필리핀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항뚜아는 그렇게 중상을 입고 말라카로 돌아갔다.

 

말년과 죽음

항뚜아는 부상에서 회복했지만 이미 나이를 많이 먹어 다시 말라카 수군제독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그는 말라카의 주가라 언덕(Bikit Jugara)에서 여생을 보냈다. 국왕 샤 알람도 더 이상 왕위를 지키지 못하고 딸 뿌뜨리 구눙 레당(Putri Gunung Ledang)에게 양위했다.

 

항뚜아의 말년에 대해서도 여러 버전의 이야기가 있다.

말년에 술탄 뿌뜨리 구눙 레당과 결혼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 조건은 처녀의 눈물 일곱 항아리, 모기 일곱 항아리를 채우라는 것이었다. 불가능한 조건임을 깨달은 그는 이미 왕을 실망시켰다는 생각에 왕이 내린 뿌룽사리 끄리스를 강에 내버렸다. 하지만 사실 그런 행동은 왕에게 실망했기 때문 아닐까? 그는 끄리스가 다시 나타나면 말라카로 돌아간다고 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의 최후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가 공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고도 하며 다른 일각에서는 그가 말라카의 딴중끌링(Tanjung Kling)에 묻혔다고도 한다. 술탄 마흐무드(Sultan Mahmud) 불화를 겪고 빨렘방으로 가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말레이시아 멀라카(Melaka)에 있는 항뚜아 묘수
항뚜아의 것이라고 알려진 빨렘방의 묘소  

 

 

서훈과 유산

사람들은 그를 기려 많은 도로에 그의 이름을 붙였고 특히 항만과 관련한 시설과 장소에 그의 이름을 빌렸다.

 

현재 그의 이름을 딴 해양교육기관과 수라바야의 항뚜아 대학교(Universitas Hang Tuah), 동부자바 끄디리에 소재한 항뚜아 해양고등학교(Sekolah Menengah Kejuruan Pelayaran Hang Tuah) 등도 있다. 인도네시아 수군에도 KRI 항뚜아 전함이 있었다. 원래 연합군 전함이었던 이 배는 1946년 네덜란드 수군에 편입되어 인도네시아 독립정부와 싸웠고 1949년 인도네시아 수군에 인계되면서 KRI 항뚜아라는 이름을 달았다. 그후 1958년 뻐르메스타 반군 진압작전 중 발리빠빤 앞바다에서 반군선박에 침몰당했다.

 

 

 

출처 및 참고자료

https://id.wikipedia.org/wiki/Hang_Tuah

https://id.wikipedia.org/wiki/Keris_Taming_Sari

https://internasional.kompas.com/read/2019/03/12/21281801/biografi-tokoh-dunia-hang-tuah-pahlawan-dan-laksamana-malaka?page=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