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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람 왕국의 시조 스노빠티 본문
마타람의 수타위자야
스노빠티는 마타람 술탄국의 시조로 panembahan(뻐늠바한-지도자)란 칭호가 붙는데 ‘권능왕 스노빠티’라고 번역하면 좀 폼이 난다. 그의 정식명칭는 빠넘바한 스노빠티 잉 알라가 사이딘 빠나타가마 칼리파툴라 따나 자위(Panembahan Senopati ing Alaga Sayidin Panatagama Khalifatullah Tanah Jawa)다. 1587-1601년 기간 마타람을 다스렸다.
그는 빠장 술탄국 치하의 마타람의 영주(adipati Mataram) 지위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고 이후 빠장 왕국으로부터 독립해 마타람 왕국을 세웠다. 수타위자야가 죽은 후 마타람의 모든 후대 왕들을 스노빠티라는 명칭을 공식칭호 안에 넣었다.
바우와르나 연대기(Serat Bauwarna), 쩬티니 연대기(Serat Centhini), 자바땅의 역사서(Babad Tanah Jawi)나 다른 문헌에 따르면 스노빠티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가지 호칭으로 불렸는데 그 중엔 라덴 바구스 다난자야(Raden Bagus Dananjaya), 라덴 응아페히 삿러링 쁘껀(Raden Ngabehi Salering Peken), 리상 수타위자야(Risang Sutawijaya) 등이 있다. 그는 왕국의 북부에서 높은 직책을 받아 라덴 응아베히 로링 빠사르(Raden Ngabehi Loring Pasar)라 불리기도 했다. 이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이름은 다낭 수타위자야(Danang Sutawijaya)다. 여기서는 우선 수타위자야라는 이름으로 그를 칭하기로 한다.
수타위자야는 끼 아긍 빠마나한(Ki Ageng Pamanahan)과 냐이 사비나(Nyai Sabinah)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년도는 분명하지 않다. 어머니는 스노빠티 재위 기간 중 마타람의 첫 재상이자 빠장 왕국 초대 술탄 하디위자야의 수학동문이기도 한 끼 주루 마르타니(Ki Juru Martani)의 여동생이다.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마자빠힛 왕국 마지막 왕인 브라위자야의 후손이고 어머니는 왈리송오 중 한명인 수난 가리(Sunan Giri)의 후손이라고 한다
술탄 하디위자야(아디위자야)는 나중에 친아들을 낳게 되고 심지어 수타위자야의 반란을 몸소 토벌하러 나섰지만 임종하던 순간까지 수타위자야를 줄곧 자신의 장남이라 여겼다.
마타람의 모든 왕들이 스노빠티라는 호칭을 술탄의 정식 이름 맨 앞에 사용하곤 했는데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수타위자야의 손자인 안야끄라꾸수마(Anyakrakusuma), 즉 술탕 아궁(Sultan Agung) 시대인 1641년부터다.
초창기
드막 왕국의 아리야 뻐낭상이 왕위를 찬탈하자 조코 띵키르(Jaka Tingkir)가 보낸 연통을 받고 아리아 뻐낭상을 치기 위해 수타위자야의 아버지 끼 아긍 빠마나한은 빠장 왕국의 끼 빤자위(Ki Panjawi dan), 끼 주루 마르타니(Ki Juru Martani)와 함께 전장으로 향했다. 술탄 하디위자야의 수양아들이었던 수타위자야도 친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전장으로 나섰다. 아직 10대 소년이었던 수타위자야에게 아리야 뻐낭상 토벌은 수타위자야의 첫 전쟁이었다. 술탄 하디위자야 왕은 그런 수타위자야를 위해 빠장군대와 참모를 그에게 배속시켰고 끼 주루 마르타니를 수타위자야의 참모로 붙여주었던 것이다.
아리야 뻐낭상은 지빵 빠놀란(Jipang Panolan)의 영주(부빠티)로 드막 술탄국 전대 왕인 수난 쁘라워토를 살해하고 드망의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벙아완 소레(Bengawan Sore)의 강변에서 빠장과 드막의 군대가 격돌했는데 끼 주루 마르타니의 창의적인 전술이 빛을 발했고 수타위자야의 부대가 주축이 되어 아리아 뻐낭상 부대를 물리쳤다. 수타위자야는 천하의 아리야 뻐낭상을 잡은 젊은 용사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술탄 하디위자야에게는 끼 아긍 빠마나한과 끼 빤자위가 아리야 뻐낭상을 죽인 것으로 보고했다. 아리야 뻐낭상의 목에는 큰 보상이 걸려 있었는데 수양아들인 수타위자야가 그를 죽였다면 하디위자야 왕이 보상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토벌이 끝난 후 끼 빤자위는 술탄 하디위자야가 아리야 뻐낭상 토벌 당시 연통을 돌려 약속했던 빠티 땅을 1549년 하사받아 그곳의 영주가 되었다. 그러나 끼 아긍 뻐마나한은 전쟁이 끝나고 7년이 지난 후에야 수난 깔리자가(Sunan Kalijaga)의 중재를 받아 약속했던 마타람 땅을 봉토로 얻게 된다. 끼 아긍 뻐마나한은 하디위자야의 의형제였지만 마타람 봉토의 하사를 늦춘 것은 마타람에서 빠장 왕국에 필적할 또 다른 왕국이 일어날 것이란 수난 쁘라뻰(Sunan Prapen)의 예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끼 아긍 빠마나한은 1556년에 빠장 왕국의 일부인 마타람 땅 먼따옥(Mentaok) 지역에 아디빠티 공국을 세우도록 허락받게 된다. 그리하여 정글을 개간해 사람 살 곳으로 만들기 시작한 마타람은 당시 아직 초라한 마을에 불과했지만 명실상부한 자치구의 지위를 얻었고 끼 아긍 뻐마나한은 끼 아긍 마타람이란 작위를 받았다. 그는 세금과 공물 납부를 면제받는 대신 정기적으로 수도에 상경해 빠장 왕국에 대한 충성맹세를 해야 했습니다. 수타위자야는 1575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뒤를 이어 마타람의 영주가 되면서 아버지의 시호를 스노빠티 잉알라가(Senapati Ingalaga)로 바꾸었다. ‘전장의 사령관’이란 의미였다.
수타위자야가 아버지의 상을 핑계로 1년 이상 왕궁의 하디위자야 왕을 알현하려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일년이 지난 후에도 수타위자야가 수도에 얼굴을 보이지 않고 약속된 충성맹세도 하지 않자 응아베히 윌라마르타(Ngabehi Wilamarta)와 응아베이 우라길(Ngabehi Wuragil) 두 관료를 보내 마타람의 충성을 확인하려 했다. 그들은 수타위자야의 무례한 행동에서 반란의 기미를 읽었지만 노회한 두 고위관료들은 완곡한 표현으로 보고서의 수위를 조절해 왕의 노여움을 피했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마타람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아디위자야는 다시 수타위자야에게 사절을 보내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는데 이번엔 태자인 빵에란 브나와(Pangeran Benawa)와 뚜반(Tuban)의 군주이자 아디위자야의 군주인 아리야 빠말라드(Arya Pamalad), 재상 빠티 만짜느가라(Patih Mancanegara)가 사절을 이끌었다. 수타위자야는 연화를 열어 그들을 환영했다. 하지만 연회가 한창 진행되던 혼잡한 상황에서 수타위자야의 장남 라덴 랑가(Raden Rangga)가 아리야 빠말라드의 사주를 받은 한 뚜반 수행병사를 살해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빠장으로 돌아온 아리야 빠말라드는 수타위자야를 나쁘게 묘사한 보고를 늘어놓았는데 빵에란 브나와는 오히려 그 사건이 그저 사고일 뿐이라며 수타위자야를 변호했다. 아디위자야는 두 가지 보고를 모두 수용하면서 분을 참았다.
실제로 그 즈음부터 수타위자야는 빠장 왕국과 군사적 대치도 불사하기 시작했고 마타람의 독립을 물질적 정신적인 준비에 공을 들였다. 요새를 건설하고 군대를 조련했을 뿐 아니라 끼둘바다의 여왕과 머라삐산의 주인에게서도 영적인 힘을 빌렸다. 그는 꺼두(Kedu)와 바글렌(Bagelen)에서 파견되어 세금을 거둬 빠장왕국에 보내려는 세금징수관들을 돌려세웠고 때로는 그들을 회유해 마타람으로 귀순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던 중 1582년 술탄 하디위자야는 뚜먼궁 마양(Tumenggung Mayang)에게 스라랑 유배처분을 내렸다. 그의 아들 라덴 빠벨란(Raden Pabelan)이 공주궁에 침입해 술탄의 장녀 라뚜 스까르 끄다톤(Ratu Sekar Kedaton)을 유혹하려 한 것을 도왔다는 죄목이었다. 빠벨란의 어머니, 즉 뚜먼궁 마양의 처는 스노빠티의 여동생이었다. 스노빠티는 부하들을 보내 유배지로 가는 길목에서 뚜먼궁 마양을 구출해냈다.
술탄 하디위자야가 이 사건에 격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어서 그가 직접 빠장 군대를 이끌고 마타람을 토벌하러 나섰다. 하지만 쁘람바난에 주둔한 빠장군의 병력은 마타람군보다 훨씬 많았음에도 참패를 면치 못했다. 거기에 머라피 화산이 갑자가 분화를 시작해 용암이 산자락의 빠장군 주둔지를 덮쳤다는 소식에 아디위자야는 더욱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하디위자야는 군사를 거둬 철수했는데 빠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난 뜨바얏(Sunan Tembayat)의 무덤을 들르러 했으나 묘지의 문을 열 수 없었다. 그는 이를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전조로 받아들였다. 그의 우려대로 아직 빠장에 닿지도 못한 상태에서 타고가던 코끼리 등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은 그는 들 것 신세를 져야 했다. 빠장에 도착한 후에는 수타위자야의 부한 끼 주루 따만(Ki Juru Taman)의 혼령이 나타가 아디위자야의 가슴을 때렸는데 그 후 그의 용태가 더욱 나빠졌다.
그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죽게 되는데 임종하면서 자녀들에게 스노빠티를 적대하지 말고 왕가의 장남으로 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수타위자야를 수양아들로 삼았던 아디위자야로서는 수타위자야를 정말 장남처럼 여겼던 측면도 컸다고 평가되며 민간에서는 수타위자야가 사실은 아디위자야의 친자식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조코 띵키르라고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디위자야는 1582년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의 고향인 부뚜 마을(desa Butuh)에 묻혔다. 스노빠티도 적대행위를 풀고 수양아버지인 하디위자야의 장례식에 몸소 참석하여 애도했다. 모두 1582년의 일이었다.
빠장 왕국은 이후 대대적인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하디위자야의 후계자는 버나와 왕자(Pangeran Benawa)였지만 아리야 빵이리(Arya Pangiri)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아리야 빵이리는 술탄 하디위자야의 사위이자 드막의 아디빠티 영주였다. 그가 꾸두스 영주의 도움을 받아 1583년 버나와 왕자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며 빠장 왕국의 두 번째 왕이 되었고 버나와 왕자를 지빵의 아디빠티로 임명해 먼 곳으로 보냈다.
하지만 아리야 빵이리의 치세가 빠장 국민들을 피폐하게 한다고 판한 버나와 왕자는 1586년 스노빠티와 동맹을 맺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아리야 빵이리가 스노빠티 측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버나와 왕자는 빠장왕국의 왕좌를 스노빠티에게 제안했지만 스노빠티는 이를 거절하고 단지 빠장 왕국에서 보관하고 있는 몇몇 유물을 마타람에 양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버나와 왕자는 1587년 빠장의 국왕이 되었다. 버나와 왕자가 술탄으로 다스리는 동안 태자가 정해지지 않았고 버나와 왕자는 빠장이 마타람에 통합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수타위자야를 다음 왕으로 지명하기도 했다. 결국 그의 유언에 따라 스노빠티가 왕에 추대되었고 빠장왕국은 마타람에 복속되어 스노빠티의 동생인 가각 바닝 왕자(Pangeran Gagak Baning)가 다스리게 되었다. 이제 빠장은 마타람의 국토가 된 것이다.
수타위자야는 이제 스노빠티라고 불리며 1586년부터 마타람 왕국의 첫 번째 왕이 되었지만 술탄 하디위자야와 버나와 왕자를 존중하여 스스로 수수후난이나 술탄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치세 속에 왕국의 수도는 꼬따거데(Kotagede)가 되었다.
드막에는 술탄 하디위자야의 사위 아리야 빵이리(Arya Pangiri)가 영주(아디빠티)가 되었다.
군사적 승리
술탄 하디위자야가 승하한 후 스노빠티는 빠장 사람들이 많이 도망쳐 살고 있는 브랑 웨탄(brang wetan) 지역들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브랑웨탄의 아디빠티 연합은 가장 강력한 수라바야의 영주가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모조꺼르토에서 마타람의 군대를 맞아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기리 끄라톤(Giri Kedaton)의 사절의 중재로 싸움을 멈췄다.
빠장과 드막을 복속시킨 마타람에게 빠띠(Pati) 역시 순순히 평화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당시 빠티는 아리야 뻐낭상 토벌 당시 공을 세운 끼 빤자위의 아들 아디빠티 쁘라골라(Adipati Pragola)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의 누이 라뚜 와스키타자위(Ratu Waskitajawi)가 마타람의 첫 왕후가 되었다. 아디빠티 쁘라골라는 이후 자신의 누이의 자손들이 마타람을 다스리게 될 것이란 희망을 품었다.
1590년 마타람, 빠장, 빠티, 드막의 연합군이 마디운(Madiun)을 공격해 들어갔다. 마디운의 아디빠티인 랑가 주메나(Rangga Jumena)는 뜨렝가나 술탄의 장남이었는데 침공에 대비해 대규모 군대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스노빠티 측의 지략에 넘어간마디운은 함락의 운명을 겪었고 랑가 저무나는 수라바야로 몸을 피했다. 랑가 주메나는 그의 아름다운 딸 렛나 두밀라(Retna Dumilah)를 이용해 권능왕 스노빠티를 쓰러뜨리기 위한 계책을 세웠다.
잘생기고 강한 스노빠티의 매력이 렛나 두밀라의 마음을 정말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스노빠티가 마디운에 온 것은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타람의 혈통과 드막의 혈통을 하나로 이어 두 나라가 하나의 왕국으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렛나 두밀라 역시 명예로운 여인으로서 스노빠티의 매력에 간단히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스노빠티가 뛰어난 영웅이란 증거를 보고 싶었다. 스노빠티가 자신의 무술과 도력을 증명하자 렛나 두밀라는 마침내 수긍하고 권능왕 스노빠티와 결혼했다. 훗날 깐젱 구스티 빵에란 아디빠티 아리야 망꾸느라가 4세(KGPAA Mangkunagara IV)가 스노빠티와 렛나 두밀라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브다야 베다 마디운 춤(Tari Bedaya Bedah Madiun – 마디운의 궁중무용)을 만들었다.
1591년 끄디리의 부빠티 마스 왕자(Pangeran Mas)가 죽자 끄디리에서 승계분쟁이 벌어졌다. 수라바야 왕자(Pangeran Surabaya)가 가 라덴 스노빠티 끄디리(Raden Senapati Kediri-끄디리의 스노빠티)라는 이름의 아디빠티의 아들을 몰아내고 잘루 여왕(Ratu Jalu)을 끄디리의 군주로 앉힌 것이다.
스노빠티 끄디리는 나중에 마타람의 권능왕 스노빠티의 수양아들이 되어 그 힘을 등에 업고 끄디리로 쳐들어가 삼촌인 아디빠티 뻐사기(Adipati Pesagi)를 전장에서 만나 물리치며 권력을 되찾았다.
1595년에는 빠수루안의 영주가 평화로운 방법으로 마타람 밑으로 들어오려 하는 것을 랑가 까니텐(Rangga Kaniten)이란 군사령관이 이를 반대으나 스노빠티는 전쟁에서 그를 물리쳤다. 빠수루안의 아디빠티가 손수 그를 처형한 후 마타람에 공식적으로 투항했다.
1600년 빠띠의 아디빠티 쁘라골라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다. 마디운에서 얻은 렛노 두밀라를 스노빠티가 두 번째 왕비로 삼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빠티의 군대가 마타람 북부의 일부 지역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뎅껭강(Sungai Dengkeng)에서 전쟁이 벌어졌지만 스노빠티가 직접 지휘한 마타람군이 빠티의 부대들을 완전히 격멸시켰다.
권능왕 스노빠티는 1601년에 까제나르 마을(desa Kajenar)에서 세상을 떠나 꼬다거데에 위치한 빠사레안 마타람 지구(komplek Pasarean Mataram)에 매장되었다. 그는 빠넘바한 스다 잉 까제나르(Panembahan Seda ing Kajenar)라는 시호를 얻었다. 까제나르에서 죽은 지도자란 뜻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마타람의 왕위에 오른 것은 라덴 마스 졸랑(Raden Mas Jolang)으로 스노바티가 끼 반자위의 딸 깐장 라뚜 마스 즉 와스키타 자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는 권능왕 한요끄로와티(Panemabahan Hanyokrowati)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자료 출처:
http://keraton.perpusnas.go.id/node/120
https://id.wikipedia.org/wiki/Senapati_dari_Mata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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