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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 (31)] 자바 태고의 왕 아지사카

beautician 2022. 2. 20. 11:48

자바 태고의 왕 아지사카

 

 

구글에서 ‘아지사카’라고 검색어를 쳐보면 일본의 특정 지역이나 사람 이름만 나옵니다. 인도네시아 전설 속에 등장하는 아지사카에 대한 한국어 게시물이 전혀 없다는 뜻이고 한국인들에게는 그만큼 생소한 인물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동화와 전설, 그리고 그림자극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고대 인도네시아에 힌두불교가 전파되는 과정, 자바어가 성립되는 모습이 이 전설 속에서 살짝 엿보이기도 합니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전설들 대부분이 그렇듯 아지사카의 전설 역시 여러 버전이 존재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아지사카가 등장하지만 내용과 전개방향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버전을 소개하려 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가 큰 도력을 가진 자바의 제왕이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지사카의 기원

아지사카(Aji Saka)는 부미 마제티(Bumi Majeti) 출신이라고 표현되는데 버전에 따라 그곳은 신화 속 낙원이기도 하고 자바에서 멀리 떨어진 섬나라이기도 합니다. 그가 사실은 인도의 사캬 족 출신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석가모니 싯다르타의 출신 부족 말입니다. 아지사카란 이름은 그래서 ‘샤카 족의 왕’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아지사카가 자바땅에 들어온 것은 인도네시아에 힌두불교 전래를 시사한다는 시각에서는 유력한 해석입니다.

 

한편 사카(saka)가 ‘중요한’, ‘기원’, ‘유래’ 등을 의미하는 자바어에서 유래했다고도 합니다. 아지사카가 ‘태고의 왕’ 또는 ‘최초의 왕’으로 해석되는 근거가 되는 주장입니다.

 

민화 속의 아지사카는 자바섬의 흉폭한 거인왕을 물리치고 문명과 질서를 가져온 영웅입니다. 한편 와왕 그림자극 속의 아지사카는 자바섬의 첫 번째 제왕으로 사카력(曆)과 자바의 5요일 체계를 만든 반신반인의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따라가 봅시다.

 

민화 속의 아지사카

아지사카는 높은 도력을 가진 부미 마제티(Bumi Majeti) 출신 젊은이로 바깥 세상에 나갈 때 도라(Dora)와 슴보도(Sembodo)라는 두 명의 충직한 심복들 중 도라를 데려가는 대신 슴보도에게는 마제티에 남아 자신의 신령한 성유물 끄리스 단검을 보관하라고 명합니다. 자기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절대 내주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 하면서요.

 

슴보도에게 끄리스 성유물을 맡기는 아지사카(가운데)  

 

자바섬에는 메당까물란 왕국(Kerajaan Medang Kamulan)이 쁘라부 데와타쯩까르(Prabu Dewata Cengkar)라는 현명한 왕의 치세 속에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실 요리사가 칼질을 하다가 실수로 잘린 손가락이 들어간 음식을 너무나 맛있게 먹고 난 왕은 그 소름끼치는 절정의 맛을 낸 재료가 요리사의 손가락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점점 인육을 탐닉하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지나면서 그 정도가 심해져 왕은 매일 인육을 요구했고 재상은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잡아 바쳐야 했습니다

 

쁘라부의 자애롭던 성품은 180도 달라져 데와타쯩까르 왕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폭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식인을 하면서 몸이 거인처럼 커졌고 급기야 요리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인간을 양손에 쥐고 산 채로 뜯어먹기에 이르렀습니다. 재상과 관료들, 그리고 백성들을 공포에 떨면서도 누구도 왕에게 맞서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영웅이 나타나 왕국을 구원해 주길 갈망했습니다.  

 

그때 메당까물란 왕국에 도착한 아지사카와 도라가 폭군을 쫒아낼 계략을 세웠습니다. 아지사카는 재상을 설득해 왕의 식사재료가 되어 데와타쯩까르 왕 앞에 섰습니다. 왕은 잘생긴 젊은이가 스스로 희생하겠다고 하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아직도 남은 일말의 양심이 있어 아지사카의 머리를 뜯어먹기 전 그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지사카는 자신의 머리에 두른 터번의 천을 풀어 그 끝이 닫는 곳까지의 땅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왕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그 요구를 승락했습니다. 아지사카가 얼마나 많은 땅을 갖든 이제 왕의 뱃속에서 소화되어 버리면 그 땅 역시 다시 왕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쁘라부 데와타쯩까르가 아지사카의 머리에 두른 천을 받아 땅을 재려는 순간 갑자기 천이 딱딱하고 두꺼워지더니 한없이 길어지며 폭도 넓어져 도성을 뒤덮어 버렸고 거구의 데와타쯩까르는 그 천에 떠밀려 남쪽 바다까지 밀려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지사카가 비전의 도술을 발휘한 것입니다. 그에게 속았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 왕은 바다 속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를 밀어내던 천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를 칭칭 감아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었다면 물 속에서 익사했겠지만 오랜 식인 습관으로 인간이 아닌 미지의 존재가 되어 버린 데와타쯩까르 왕은 죽지 않고 한 마리의 거대한 흰 악어로 변해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쪽 해안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쁘라부 데와타쯩까르를 몰아낸 아지사카는 관료들과 백성들에게 추대되어 메당까물란의 왕이 되었습니다.

 

쁘라부 데와타쯩까르(왼쪽)와 아지사카  

 

도라와 슴보도

대관식을 마친 후 아지사카는 도라를 마제티에 보내 자신의 끄리스 단검을 가져오라 시켰습니다. 하지만 마제티의 슴보도는 도라에게 끄리스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자신 외의 다른 이에겐 끄리스를 내주지 말라는 아지사카의 당부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라 역시 끄리스를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두 사람이 받은 명령이 서로 충돌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돈독한 친구였으나 열띤 언쟁 끝에 결국 칼을 뽑아들고 무력으로 맞붙었습니다. 아지사카에 대한 충정이 그들의 우정보다 더 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도력의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동등한 기량을 가진 두 사람 사이의 전투는 점차 치열해졌고 마지막에 서로 궁극의 도력을 끌어내 하늘과 땅을 쪼개듯 싸우다가 동시에 서로의 심장을 꿰뚫고 말았습니다.

 

결투 끝에 죽고 만 도라와 슴보도  

 

도라와 슴보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지사카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충직한 심복들을 서로 싸우게 해 죽음에 이르게 했음을 깨닫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는 충복들을 기려 한 수의 추모시를 지었습니다. 하나짜라카(hanacaraka)라고도 부르는 이 시문은 자바문자의 알파벳 배열이기도 한데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Ha Na Ca Ra Ka = ono wong loro (ada dua orang) 그 두 사람이

Da Ta Sa Wa La = podho kerengan ( mereka berdua berantem / berkelahi ) 서로 싸웠지만

Pa Dha Ja Ya Nya = podho joyone ( sama-sama kuatnya ) 기량이 서로 같으니

Ma Ga Ba Tha Nga = mergo dadi bathang lorone ( maka dari itu jadilah bangkai semuanya) 모두 죽고 마는구나

 

거대한 뱀 자카 링룽(Jaka Linglung)

아지사카의 전설은 사실 여기서 끝나지만 큰 뱀 자카 링룽의 이야기가 외전처럼 따라붙습니다.

 

다다빤 마을에 거대한 뱀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뱀을 죽이려 했는데 뱀은 신기하게도 사람의 말을 했습니다. “난 아지사카의 아들이다. 나를 그에게 데려가 다오.”

 

놀란 마을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며 뱀을 도성으로 데려가자 아지사카는 그 뱀을 보고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남쪽 바다의 흰 악어를 죽일 수 있다면 자기 아들로 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흰 악어는 폭군 쁘라부 데와타쯩까르가 변한 마물이죠. 뱀은 곧바로 가공할 힘을 발산하며 흰 악어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 마침내 숨통을 끊었습니다. 아지사카는 약속대로 그를 자신의 아들로 삼고 자카 링룽(Jaka Linglung)이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멍청한 남자’란 뜻이었죠.

 

그러나 그렇게 궁전에 들어온 자카 링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궁에서 기르던 모든 가축들을 게걸스럽게 잡아먹어 왕의 진노를 샀습니다. 아지사카 왕은 비전의 도술로 그를 꼼짝 못하게 꽁꽁 묶어 뻐상아(Pesanga) 정글로 추방했습니다. 자카 링룽은 자신을 묶은 천을 풀어달라고 했지만 아지사카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풀려나면 반드시 더 많은 짐승과 사람들을 헤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 단 하나의 예외를 주었습니다. 스스로 입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게 허락한 것입니다.

 

어느날 정글 속에서 놀던 아홉 명의 남자아이들이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자 이리저리 뛰며 비 피할 곳을 찾았습니다. 운 좋게도 그들은 동굴을 하나 발견해 아홉 명 중 여덟 명이 그 동굴 속에 들어가 비를 피했지만 피부병이 있던 아이 한 명은 더럽다며 왕따를 당해 동굴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갑자가 동굴 입구가 닫히면서 여덟 명의 아이들은 동굴 안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동굴은 바로 자카 링룽의 입 속이었고 아이들은 자카 링룽의 밥이 되고 만 것입니다.

 

와양 그림자극 속의 아지사카

한편 와양 그림자극 속의 아지사카 이야기는 좀 더 스케일이 큽니다. 와양극은 주로 인도의 라마야나나 마하바라타의 방대한 서사를 담는 데에 익숙해 그림자극 속의 아지사카는 아예 신의 아들로 묘사됩니다.

 

아지사카의 아버지 바타라 앙가잘리(Batara Anggajali)와 할아버지 바타라 라마야디(Batara Ramayadi)는 바타라 구루(Batara Guru)라는 주신을 중심으로 한 모든 신들을 위해 신령한 무기와 장신구를 만들어주는 대장장이 신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로마신화 속 헤파이스토스 신의 포지션이죠.

 

바타라 앙가잘리는 힌두교의 나라 나즈란 왕국의 왕 쁘라부 사킬(Prabu Sakil)이 예전에 배가 침몰해 익사할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이후 지상에 내려와 그의 딸 데위 사카 공주와 결혼하고 아지사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지사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바타라 구루에게 다시 불려가 신들의 무기를 새로 만들라는 임무를 받았으므로 아지사카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아지사카는 왕국의 제왕인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아버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가 보니 아버지가 바다 위의 허공에서 두 손으로 신들의 병장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서로를 알아보았죠. 아지사카는 아버지의 놀라운 도력에 감명받아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를 거절하면서 사실은 아지사카의 할아버지인 바타라 라마야디가 훨씬 더 높은 도력을 가진 신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로 찾아가니 이번에는 하늘 위에서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천상의 무기들을 척척 만들고 있는 할아버지 바타라 라마야디를 발견했습니다. 아지사카는 자신이 손자임을 밝히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했지만 바타라 라마야디는 그 부탁을 거절하면서 자신보다 더 높은 도력을 가진 바타라 구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들의 신인 바타라 구루가 아지사카를 제자로 받아들일 리 없다는 말도 덧붙였죠.

 

그런데 바타라 구루의 아들 바타라 위스누(Batara Wisnu)도 도력이 아버지 못지 않은데 그가 마침 지상의 이스라엘(Israil) 땅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아지사카는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로 바타라 위스누를 찾아갔는데 그는 마침 이스라엘 민족의 우스마나지 대신관(Pendeta Usmanaji)과 지혜를 서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지사카는 자신을 소개하고 바타라 위스누에게 스승이 되어달라 부탁했습니다. 바타라 위스누는 이에 응해 아지사카에게 신들의 도술과 지혜를 가르쳐 주었고 우스마나지 대신관도 당대 최고의 학문과 신학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바타라 위스누가 천상으로 돌아간 후 이미 지상의 인간들과 비할 수 없는 높은 도력을 지니게 된 아지사카는 이스라엘 땅을 주유하며 신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지쳐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천상의 신들이 마시는 영원한 생명수 띠르타마르타 까만달루(Tirtamarta Kamandalu)를 손에 넣게 되죠. 사람이든 동물이든 영생하게 만드는 그 생명수를 마신 아지자카는 이후 수백 년 동안 세상을 주유하면서 도술과 영력을 극한까지 닦아 하늘을 날고 바다 위를 걷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자바땅 테라포밍

어느날 아지사카가 자바땅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음뿌 셍깔라’라는 이름의 힌두교 수행자 행세를 했다. 당시 자바 땅에는 아직 사람들이 살지 않아 온갖 마물과 악귀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음뿌 셍깔라는 그들에게 날짜 세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빠사란’(Pasaran)이라고 알려진 자바의 5요일 날자 계산법도 그때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자바땅에 인간들을 데려오기 위해 그간 고행을 통해 새로이 익힌 도술로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당시 로마가 이스라엘 지역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는데 아지사카는 로마인 2만 명을 자바땅에 데려와 자바땅에 살게 했습니다. 하지만 자바땅은 인간이 살기에 아직도 너무 척박했고 그곳에 먼저 살고 있던 마물과 귀신들이 그들을 괴롭혀 병들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불과 몇 년 사이 사람들 숫자는 200명으로 줄었고 그나마 모두 로마로 돌아가 자바땅은 다시 무주공산이 되어버렸다. 음뿌 셍깔라의 첫 자바 정착 프로젝트가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음뿌 셍깔라는 그 땅의 음습함과 귀신들의 세를 줄이려 자바땅 다섯 방위에 제물을 바치며 인간들이 살기에 쾌적한 곳으로 변모시키려 했습니다. 말하자면 대대적인 테라포밍을 시작한 것이죠. 그런 후 그는 이번엔 힌두스탄, 즉 인도에 가서 자바섬에 보낼 사람들을 모으려 했습니다.

 

힌두스탄의 수라띠 왕국(Kerajaan Surati)에 도착한 그는 왕을 만나 자신의 목적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수라띠 왕국의 쁘라부 이와사카 왕은 음뿌 셍깔라의 아버지 바라타 앙가잘리의 화신이었으므로 그는 음뿌 셍깔라를 맞아 크게 기뻐하며 라덴 아지사카(Raden Aji Saka)라는 이름을 주고 왕세자로 삼았습니다. 이제 그의 두 번째 자바 이주계획은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라덴 아지사카는 쁘라부 이와사카의 도움을 받아 힌두스탄의 집 없는 사람들, 신관들, 가난한 백성들을 모아 자바땅을 향해 먼 길을 떠났습니다. 적잖은 귀족과 거상들도 함께 그 행렬에 참여했습니다. 아지사카는 그들 중 10명의 젊은 지도자들을 뽑아 생활양식, 영적인 지식, 의술, 통치기법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1만 명 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자바땅에 당도하자 아지사카는 그들을 열 개 집단으로 나누어 자바땅 각 방향으로 흩어져 살도록 했습니다. 자바땅은 오래 전 아지사카가 다섯 방위에 제물을 바친 덕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넉넉히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젊은 지도자들이 이끄는 그 열 개의 집단은 자바땅 곳곳에 정착해 생육하며 번성했습니다.

 

사카력(曆)

자바땅에 사람들이 번성하게 한 후 아지사카는 이스라엘 땅 옆 응아르비(Ngarbi)족의 땅(지금의 아랍지역)에 가 아랍민족의 최고고문이 되어 수십년을 지내다가 자바땅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궁금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들뜬 마음이 무색하게 자바땅의 문명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규칙도 지성도 없이 짐승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 모습에 아지사카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지사카가 세운 10명의 젊은 지도자들 능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결국 아지사카는 그곳에 스스로 메당까물란 왕국(Kerajaan Medang Kamulan)을 세우고 쁘라부 위사카(Prabu Wisaka)란 이름으로 왕위에 올라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문명과 생활방식을 가르쳤고 날짜를 세는 방식도 다시 가르쳤습니다. 이번엔 5요일 시스템과 함께 7요일 시스템도 새로 만들었죠. 그래서 하루는 두 개의 요일을 갖게 되었고 그 두 요일 시스템의 조합은 결국 35요일 체계가 되었는데 그것을 지금도 자바에서는 슬라빤(selapan)이라 부르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달의 공전을 계산해 이를 기준한 음력을 만들어 짠드라 셍깔라(Candra Sengkala)라고 불렀고 지구에서 바라본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양력을 만들어 이를 수리야 셍깔라(Surya Sengkala)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런 후 그는 짠드라 셍깔라와 수리야 셍깔라의 날자 계산법을 연계했고 주간, 5요일 체계인 빠사란(pasaran), 35요일 체계인 슬라빠난(selapanan)을 체계화했습니다. 이렇게 쁘라부 위사카가 만든 날짜 계산법은 이후 사카력(曆-Kalender Saka)이라는 이름이 붙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쁘라부 위사카는 혼인하여 많은 자녀를 낳았고 그중 한 명에게 왕좌를 넘겨준 후 다시 아지사카라는 이름으로 돌아가 다시 세상을 주유했는데 때가 오자 바타라 구루가 그를 들어올려 신으로 승격시켰습니다. 바타라 아지사카라는 이름의 신이 된 그는 아버지, 할아버지와 함께 천상에서 지금도 자바땅을 굽어 살피고 있습니다.

 

와양 그림자극에 등장하는 아지사카는 자바 전설에 비해 훨씬 거대한 세계관을 토대로 아랍과 인도와 자바 사이, 천계와 인간계 사이를 오가는 스케일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식인왕 쁘라부 데와타쯩가르나 충직한 두 명의 심복 도라와 슴보도가 등장하지 않는 이 이야기가 과연 자바 전설 속 아지사카와 같은 인물을 다룬 이야기인지 좀 고개가 갸우뚱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뒤가 딱딱 맞아 떨어진다면 오히려 전설이나 민화로서는 자격미달이겠죠.

 

아지사카 아트 모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