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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유적지로서의 온러스트 섬 본문
온러스트(Onrust) 섬의 역사
온러스트 섬은 뿔라우 스리부 군도 비다다리 섬에 인접해 있고 식민지 시대엔 뿔라우 까빨(Pulau Kapal)이라 불리기도 했다. 17세기부터 네덜란드 선박이 자주 방문했고 식민지 시대의 고고학적 유적들도 많이 남아 있다. 온러스트(Onrust)라는 이름은 절대 쉬지 않는다는 Unrest에서 왔다고도 하며 네덜란드 귀족의 후손 Baas Onrust Cornelis van der Walck의 이름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역사
동인도회사(VOC) 시절
오래 전부터 자야카르타 만(teluk Jayakarta)의 온러스트섬과 인근 다른 섬들은 반뜬 왕가의 휴양지와 같은 곳이었다. 자야카르타는 순다끌라빠, 바타비아와 함께 자카르타의 옛 이름 중 하나다.
그런데 반뜬 왕국와 자야카르타 사이에서 벌어진 분쟁은 오랫동안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야카르타(현재의 자카르타 지역) 입장에서는 바로 코 앞에 온러스트 섬이 있다는 지리적인 근접성을 들어 소유권을 주장했고 전통적으로 뿔라우 스리부(Pulau Seribu) 제도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보유하고 있던 반뜬 왕국은 그 제도에 속한 온러스트 섬 역시 자기 소유라는 입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네덜란드가 들어올 당시 반뜬의 상권독점에 실패하자 자야카르타로 시선을 돌리면서 자야카르타 만에 있던 섬, 즉 온러스트 섬을 지렛대로 사용하려 했다. 1610년 11월 10일에서 13일 사이에 L 헤르밋(L. Hermit)이 대표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와 자야카르타의 왕자가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네덜란드가 자야카르타 만에서 선박을 건조할 수 있도록 벌목과 목재운송을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아시아, 특히 동남아로 항해를 해와 장기간 머무르는 배들이 장거리 항해로 고장나거나 무리가 간 선체의 수리보수가 필요한 경우가 많음에 착안한 VOC(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킬 조선소를 자야카르타 만에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자야카르타 왕자로부터 온러스트 섬의 사용승인을 얻은 VOC는 1613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615년 조선소 한 개와 작은 창고를 완성했다.
얀 피터존 코엔(Jan Pieterzoon Coen: 제4대(1619-1623년), 6대(1627-1629년) 네덜란드 동인도 총독)은 온러스트를 식민지로 삼고자 했으므로 VOC는 한 중국인 가족을 좋은 조건을 걸어 온러스트에 보내 관리하도록 시켰다.
1618년에 이르러 코엔 총독은 점점 커지는 반뜬 왕국과 영국의 위협에 대비해 온러스트 섬을 방어기지로 만들었고 1619년에는 순다끌라빠(Sunda Kelapa) 항구를 공격한 후 항구를 찔리웅강 하구로 옮겨 바타비아라고 명명했다.
섬에는 1656년 장방형 요새 두 개가 세워졌고 1671년에는 요새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 1674년에는 일반물품창고, 철제물품창고, 선박수리용 독 등이 지어져 74명의 목수와 여섯 명의 다른 기술자들이 일했다. 1691년엔 제재소를 가동하기 위해 풍차가 건설되었고 1695년엔 두 번째 풍차가 건설되어 148명의 동인도회사 용인들과 200명의 노예들이 거기서 일했다.
1770년엔 제임스 T 쿡 선장의 엔디버호(HMS Endeaver)가 호주로 향하기 전 이 섬에 들러 보급물자를 실었는데 당시 쿡 선장의 일지에도 이 섬에 네덜란드 요새와 제재소가 있었다고 메모되어 있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꺼지
1800년에 이르러 영국은 바타비아를 봉쇄하면서 처음으로 온러스트 섬을 포위하고 포격을 가해 지상의 건물들을 파괴했다. 1803년 네덜란드는 DM 바르비어(DM Barbier)의 계획에 따라 온러스터 섬 재건계획을 세웠으나 1810년 영국이 이를 다시 파괴하고 1816년까지 섬을 장악했다. 이 시기는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이 벌어지던 시기로 나폴레옹과 싸우며 멸망 직전까지 갔던 네덜란드로서는 동인도에서 벌어지고 있던 영국의 도발에 적절히 대응할 여력이 없었다.
온러스트 섬은 1827년에 다시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가 관심을 보이다가 1828년에 중국인 노동자들과 죄수들을 동원해 건설과 건축이 시작되었다. 인근의 비다다리 섬(예전엔 삭티 섬 pulau Sakti라고 불렸음)과 찌삐르 섬(예전엔 까향안 섬 Pulau Kahyangan), 끌로르 섬(Pulau Kelor) 등이 온러스트 섬의 수비와 기능을 보조하는 차원에서 개발되었다.
1848년엔 섬의 기능이 되살아나면서 1856년엔 선박수리용 도크가 하나 더 설치되었다. 그러나 1883년 바타비아 북부의 딴중 쁘리옥(Tanjung Priok) 항구가 건설된 후부터 온러스트 섬은 선박과 항해의 역사 뒤안길로 서서히 들어서기 시작했다. 바타비아에 접근하는 배들이 보급이나 수리를 위해 온러스트 섬에 기항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온러스트 섬과 찌삐르 섬에 기상대가 세워지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20세기 초반엔 폐결핵 환자들의 요양지로 사용되었다. 1911년부터 1933년가지 온러스트 섬은 하지 순례자들의 격리장소로 사용되었다. 하지 순례를 떠나려는 사람들도 선박을 타고 수개월에 걸친 항해 끝에 메카에 닿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해양 기후와 습도에 적응하는 훈련을 했고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은 바타비아에 들어가기 전 온러스트 섬에서 일정 기간 격리생활을 해야 했다.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이 섬은 ‘제7선박 사건’의 반란자들이 수용되었다. 제7선박이란 HNLMS Zeven Provincien, 즉 ‘7개 주 호’를 뜻한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섬은 이번엔 동인도에 살던 독일인들을 수용하는 곳으로사용되었다. 그들은 나찌의 스파이란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1942년 일본군이 바타비아를 점령한 후 온러스트섬은 중범죄자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제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9월부터 1946년 1월까지 이 섬은 또다시 독일인들을 수용하는 연합군 수용소가 되었고 독일 U 보트 U-195의 승무원 여섯 명도 이곳에 함께 수용되었다. 이후 이곳의 전쟁포로들은 독립전쟁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군 측 독립군들이 해방시킬 우려가 있어 말랑으로 옮겨졌다.
독립 후의 온러스트 섬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후 온러스트섬은 보건부 관리 하에 전염병 환자들을 수용하는 격리병원으로 196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1960년부터 1965년까지는 부랑자들과 거지들을 수용했고 군사훈련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한동안 무인도처럼 버려졌지만 1968년부터 대대적인 건축자재 채취사업이 관할 경찰서 허가를 받은 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972년 당시 자카르타 주지사였던 알리 사디킨(ali Sadikin)이 온러스트 섬을 사적지로 지정했다. 현재 온러스트 섬은 찌삐르 섬, 비다다리 섬, 끌로르 섬, 에담 섬 등과 함께 정부가 뿔라우스리부 고고학 공원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https://id.wikipedia.org/wiki/Pulau_Onr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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