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비를 대하는 마음 본문
우기(雨期)
인도네시아의 Musim Kemarau(건기)는 3월-8월, Musim Hujan(우기)는 9월-이듬해 2월 정도라고 배웠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처음 부임했던 1995년엔 정말 그런 것 같았는데 21세기에 들어선 후에는 그런 구분이 엉망진창이 되어 우기가 11월쯤 시작하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건기에도 심심찮게 폭우가 내리더니 백신도 혼자 못맞는다 하여 그거 도와주러 나간 9월 7일 지난 화요일 오전 남부 자카르타에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백신접종이 이루어지던 RSUD Mampang Prapatan 즉 맘빵 사거리 지역병원은 말하자면 지역 보건소 바로 윗 단계 정도의 병원인데 이미 백신접종이 시작된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행정적으로 절차나 방식이 별로 3개월 전 1차 접종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였습니다. 더욱이 비가 오기 시작하자 천막도 없던 대기실(3개월 전에는 있었는데 건기에 쳐놓았던 천막을 우기에 걷은 이유도 불가사의)에 있던 사람들이 대피했다가 비가 잦아든 후 다시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네를 수없이 지나면서도 여기 병원이 있다는 것을 올해 처음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병원이 길가에 나와 있는 게 아니라 길 뒤편 막다른 골목 안에 있었고 주차장도 거의 없는데 그앞에는 세무서, 파출소, 꼬라밀(koramil) 등이 포진해 있어 웬만하면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에 있었거든요. 꼬라밀은 도시나 지역의 구(區) 단위까지 나와 있는 육군 분견대를 말합니다. 군과 민간의 협력을 표방하지만 군이 민간 구석구석까지 들어가 통제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구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것이죠. 저 동영상을 찍은 곳은 파출소 주차장이었고요.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는 심정은 시대에 따라 늘 달라졌습니다.
군시절에 내리던 비는 훈련을 건너뛸 수 있는 좋은 구실이거나 훈련 중에는 더운 열기를 식혀주는 신의 도움, 하지만 조금 심하면 빨래감을 넘쳐나게 하는 애물단지였습니다.
대기업에 다닐 때엔 의류팀에서 우비 즉 레인웨어를 만들어 수출했고 자카르타에 부임한 현지법인도 레인웨어 생산공장이었으므로 비가 오면 뭔가 일이 잘 되어 가는 듯한 흐뭇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매년 1-3월 사이 우기 끝물에 자카르타 일대에 대홍수를 일으키던 폭우는 더 이상 낭만적이지도 않았고 상습 침수지역에 살게 된 메이네 아이들때문에 폭우가 내리는 밤에는 마음을 조이곤 했습니다. 여러번 이사한 끝에 올해 드디어 홍수 때 물이 들어오지 않는 집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책상과 식탁 등 새 가구들을 들여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자카르타 인근과 지방에 큰 홍수를 낸 올해 초 폭우가 끌라빠가딩만은 예년과 달리 별다른 물난리가 나지 않아 내년에 어떨지 모릅니다.
결국 세상 일이란 내가 어디 서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보이는 것이더군요.
2021.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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