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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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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젊은 여자들을 속이는 페이스북 악당들

beautician 2021. 9. 23. 11:12

페이스북

 

아이들은 평소에 누군가 보호자가 같이 있어줘야 하는 게 맞고 서양에선 그래서 부모가 외출할 때 옆집 처자를 베이비시터로 알바를 시키기도 하지만 메이네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차차가 중학생이 되던 몇 년 전부터 메이가 출근할 때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면 오후 2시쯤 학교가 끝나면 돌아오는 건 자기들이 알아서 온라인 택시를 불러 타고 와야 했습니다.


그 전엔 차차 남동생 마르셀이 태어날 때부터 7년쯤 메이네 집안 일을 거들었던 당찬 아르니가 오토바이를 몰고 아이들 등하교를 시켰지만 시집간다고 고향인 중부자바 빠티(Pati)로 돌아간 후엔 한동안 마알(Maal)이라는 예쁘장한 스무살 짜리 처녀가 아이들을 봐주기도 했고 시간이 되면 내가 아이들 하교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곤 했지만 매일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일정 부분 자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엔 불안불안했지만 차차가 꽤 야무지게 잘 하더군요. 하지만 문제는 온라인 택시 기사들을 비롯해 세상 남자들이 차차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학교에서도 차차가 초등학교 4학년 쯤 되자 상급생 남학생들이 슬슬 추파를 던져오기 시작하더니 중학생이 되면서 몸매가 드러나기 시작하니 학생들 뿐 아니라 차차가 길거리에 나서면 휘파람을 불어대거나 추근덕거리는 인간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 중심의 이슬람이 지배하는 인도네시아에서 아직 그 정도의 성희롱으로는 경찰이 나서 줄 리 없습니다. 오히려 여자가 뭔가 품행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피해자가 폄하당하는 게 보통이죠. 그래서 코로나로 아이들이 집에서 온라인 학습을 하게 된 건 한편으론 다행스러운 측면도 있습니다.

 

얼마 전엔 마르셀이 형뻘 되는 동네아이들이랑 놀다가 어떤 일로 다툼이 벌어져 좀 맞고 다쳐서 들어온 날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집단 괴롭힘을 당하거나 왕따가 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어서 어떻게 대응할까 고심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차차가 나가서 마르셀을 때린 아이들에게 화를 냈더니 상대 아이들이 모두 고분고분하게 마르셀에게 사과하면서 차차의 환심을 사려 했답니다. 미모는 어디서나 통하는 거죠.

 

차차가 페이스북을 하자 거기에도 팔로워가 많이 붙었고 그중엔 인도인, 아랍인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페이스북에서 차차를 칭찬하고 말을 걸어오니 채팅을 하는 걸 넘어 직접 전화통화도 했던 모양인데 좀 위험해 보였습니다. 물론 차차는 만나자는 남자들을 모두 거절했지만 호감을 가진 상대방을 적대시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전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르니가 떠난 후 1년 쯤 아이들을 봐주던 마알(Maal)은 고아였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찾아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난 그 친구가 괜찮아 보였고 그래서 메이가 회사일로 바쁜 상황이니 마알이 오래오래 아이들과 함께 지내주길 바랬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마알이 갑자기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며 허겁지겁 떠난 것이 2년 쯤된 일입니다. 그 마알이 며칠 전 메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문자를 보내왔다는 겁니다.

 

아직 아이들과 함께 지내던 시절 마알도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된 외국인을 오프라인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지금도 인도네시아인들에겐 외국인들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어요. 그 외국인은 아랍인이었는데 처음엔 정중하게 대하던 그가 내민 음료를 먹고 정신을 잃은 마알이 정신을 차린 곳은 어느 호텔이었다고 합니다. 겁탈당한 겁니다. 자카르타가 무서워져 아이들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마알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얼마전 메이에게 한 살이 좀 지난 아들 사진을 보내며 돈을 좀 빌려달라고 부탁해왔습니다. 몸을 의탁했던 삼촌 댁에선 아버지 없는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쫓겨났고 당시 그 아랍인은 이젠 아예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물론 그 야비하고 무책임한 아랍인과 연락이 닿아봤자 뭘 어쩌겠어요?

 

마알의 꿈이 산산조각나고 만 것입니다. 이젠 학업을 계속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고 메이네 집에 아기를 안고 돌아올 수도 없고 분유값을 벌 방법도 없게 된 것이죠. 미리 상황을 메이에게 털어놓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알은 어린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물론 어쩌면 아직도 도울 방법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 사건은 차차에게도 경종을 울렸습니다.

 

"페이스북 아직도 해?"

"아직 하간 하지만 누가 뭐래도 절대 대답 안해요."

 

어제 2주 앞으로 다가온 16번째 생일 선물을 함께 사러나간 길에 차차는 고개를 세게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고 내 손을 꼭잡고 몰의 코리더를 따라 걸어가는 차차에게 사람들 시선이 모인다고 느낀 건 내가 신경과민이기 때문일까요?

 

페이스북으로 수많은 사기가 벌어지지만 마알의 경우처럼 어린 여성들을 속이고 갈취하는 사건들도 끝없이 벌어집니다. 마알을 위해선 분유값을 보내주는 것 외에 에 뭘 해줘야 다시 예전의 꿈많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요?

 

 

마알이 떠나기 직전. 왼쪽부터 메이, 차차, 마알

 

2021. 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