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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마음 부담을 하나 줄이는 일

beautician 2021. 8. 19. 12:26

해야 할 일, 하지 않아도 될 일, 하면 안되는 일

 

 

원래 널널할 예정이었던 8월에 에정에 없던 일들이 추가되면서 갑자기 마감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13일 출판진흥원: 현지 출판사들의 팬데믹 대책 현황 보고서

16일 한국언론진흥재단: '인니정부 헛발질 코로나 대응에 대한 언론보도' 원고 

23일 한국전략개발연구소: 현지 아동 및 노인 복지서비스 1차 보고서

30일 영화진흥위원회: 현지 상영관산업 현황 보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들어 열흘 정도 대체로 멍때리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시간을 소비했는지 스스로 납득이 잘 안가지만 한번 왕복에 하루가 거의 다 깨지는 BSD에도 그간 세 번씩이나 다녀왔기 때문일 수도 있고 16킬로 감량목표를 세운 후 5킬로 정도 빼면서 찾아온 무력감, 초조함, 코칼로리 음식에 대한 열망.....뭐 이런 거 때문일 수도 있고 다이어트 시작과 거의 동시에 찾아와 대략 2주만에 떠나가며 이런저런 후유증을 남긴 알러지 떄문일지도 모릅니다. 암튼 13일 마감하는 출판진흥원 원고를 쓰려고 MS 워드를 스크린에 올려놓고 단 한 글자도 못쓴 게 열흘 쯤 되었습니다

 

물론 내일이 마감이고 내일은 외부 일정들이 잔뜩 잡혔으니 오늘은 어떻게든 끝을 내야 합니다. 뭐, 또 어떻게든 되겠죠.

 

사실 나를 좀 더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은 다른 원고였습니다. 

 

원래 올해 개인 프로젝트로 계획했던 <Sitti Nurbaya>의 번역은 문화배경 조사를 시킨 현지인이 선수금만 받고 먹튀하는 바람에(사실 먹튀라기보다는 일정 약속을 여러차례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을 내가 굳이 독촉하지 않는 상황) 좀 어정쩡한 상태에 있지만 딱히 서두르려 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 출판사와 계약이 된 것도 아니고 그래서 당장 돈이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쨋든 이건 내가 시간을 정해서 하면 되는 일입니다.

 

문제는 <리콴유 평전>이었죠 작년부터 얘기가 나와 올초에 시작할 준비를 마쳤는데 이걸 주도하는 교수님이 분명한 큐를 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게 내내 부담이 된 것은 당장 돈이 안되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양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교수님과 2019년 공동번역으로 출간한 <막스 하벨라르>의 경우엔 2017년 상반기 5개월을 풀타임으로 번역에 돌입했었는데 이번 <리콴유 평전> 분량은 그 세 배는 될 듯 했습니다.

 

 

교수님과의 관계 상 거절할 수도 없고, 사실 그분과 함께 뭔가 하면 당장 돈이 안되어도 내 네임밸류나 몸값이 덩달아 오르기 쉬워 , 가능하면 하는 편이 더 나은, 그러나 하게 되면 시간관리에 중대한 문제가 생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월요일 교수님께 이메일이 한 통 왔습니다. 가뜩이나 슬럼프가 온 판에 이제 <리콴유 평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고 하면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메일 내용은 예상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출판사와 여러차례 책의 집필방식과 방향에 대해 협의했는데 아무래도 애당초 생각했던 방식으로의 진행은 어려울 듯 해 십중팔구 나의 참여를 배제하고 진행될 것 같다는 취지였습니다. 다행스러우면서도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내 입장을 잘 아시는 교수님이 출판사에 내 원고료를 받아주려 하다가 여의치 않아 결국 그런 식으로 방향을 바꾼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막스 하벨라르> 당시 교수님은 같은 출판사로부터 원고비를 받아 주었는데 그게 사실은 천권 매출에 대한 선인세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모두가 어려운 코로나 상황에서 출판사가 그런 조건을 이번에도 받을 수 없었던 것이겠죠.

 

사람 마음이 간사한지라, 작년 말, 올해 초, 아직 올해 생계를 위한 포트폴리오가 갖춰지기 전까지는 꼭 해보겠다고 싱가폴 통해 원서까지 확보해 놓았는데 이번 주 이 계획이 무산되니 안도의 한숨이 먼저 나왔습니다. 내가 못한다고 뺀 것이 아니라 교수님 측에서 진행이 어렵다는 취지의 얘기를 해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런 통지방식조차도 십중팔구 교수님이 상황 앞뒤를 감안해 내가 가장 곤란하지 않는 방향으로 계산해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덕택에 슬럼프 속에서도 마음의 부담을 크게 덜 수 있었습니다. 

 

 

2021. 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