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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호러영화사 (식민지시대 ~ 2015년)

beautician 2021. 6. 12. 13:06

 

영화시장 개방 직전까지의 인도네시아 호러영화사

 

 

인도네시아 첫 공포영화가 나온 것이 1934년의 일이니 곧 100주년이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신세가 기구해 어린 시절을 계모(네덜란드)의 품에서 자랐고 온갖 전설로 가득찬 시골에서 성장하다가 경제위기 속에서 심하게 앓고 버려지기까지 했지만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나 결국 큰 돈을 만지게 되고 대도시의 그림자 곳곳에 깃든 도시괴담에 편승해 호러투어 코스까지 열게 되었다. 잘 살아남은 것이다.

 

그 역사는 국가와 산업환경의 발전과 궤를 같이 했다. 호러영화 역시 시대적 상품으로서 거쳐온 각 시대의 열정이 영화에 투영되어 있다. 특히 도시생활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요컨대 도시인들의 한 라이프스타일로서 태어나 성장해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1895년 12월 28일 빠리 소재 블러바르 드 캐푸시네(Boulevard des Capucines)의 그랑 까페(Grand Café)에서 루미에르(Lumière) 형제가 <라시오타 역 기차 도착(The Arrival of a Train at La Ciotat)이라는 50초 짜리 다큐멘터리를 상영함과 동시에 시작했다고 하겠다. 이때 관객들은 모두 엄청난 공포로 패닉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어두운 상영공간 속 스크린에서 거대한 열차가 달려오는 모습이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적나라한 현실감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말 열차가 달려들어 자신들을 칠 것처럼 느꼈다고 한다.

 

<라시오타 역 기차 도착(The Arrival of a Train at La Ciotat)>  

 

그래서 1895년 이후 이런 영화를 지칭해 ‘열차 효과’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겨났다. 관객들 스스로 영화 속에 직접 뛰어들어 열차 바로 앞에 선 등장인물처럼 감정이입하게 되는 관람경험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호러영화가 프랑스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896년 조르쥬 멜리스(Georges Méliès) 감독이 역사상 첫 호러영화라 불리는 <귀신 붙은 궁전(Le Manoir du diable)>이라는 영화를 내놓았다. 이 무성영화는 악마와 다른 마물들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나갔다. 러닝타임이 무려 3분이나 되었기 때문에 매우 의욕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귀신 붙은 궁전(Le Manoir du diable)>  

 

당시 호러 장르의 탄생과 발전은 이성의 저변에 숨겨진 인간의 욕망에 대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로 인한 폭넓은 사상의 발전과 함께 했다. 프로이트는 뭔가 결핍에 기반한 공포는 대개의 경우 문명적 자아인 에고(Ego)에 의해 억눌려 있던 원시자아 이드(id)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생각으로 발현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공포는 인간 내면의 특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사람들이 원래 잔혹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스스로 카타르시스나 감정적 이완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처음 소개된 호러영화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활동사진’이 처음 인도네시아에 소개된 것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였던 1900년 12월 5일의 일이다. 따나 아방에서 처음 상영된 영화들은 빌헬미나 여왕과 덴하그의 헨드릭 왕자 즉의식 다큐멘터리, 남아프티라 트란스바알(Transvaal)에서 벌어진 보어전쟁의 장면들, 그리고 빠리에서 열린 박람회에 대한 단신들이었다.

 

당시 인도네시아를 억지로 돌보던 ‘계모’인 네덜란드는 현지에 사는 사람들은 유럽인, 동양외국인, 그리고 현지인으로 종족을 구분했다. 이는 이들이 모두 힘을 합쳐 식민지 총독부에 반기를 들지 않도록 현지인들을 분열시켜 지배하려는 교과서적 식민지 지배방식의 일환이었다. 그 결과 각 종족그룹들 사이에 농도 짙은 자기애가 탄생했다.

 

점차 영화상영이 일반화되면서 전에는 도시 상류층들의 전유물이던 것이 지방의 원주민들에게도 관람기회가 주어졌다. 이로 인해 1916년 식민지정부가 영화산업 관련법을 만들게 되고 이후 해를 거듭하며 몇 차례의 법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규정들을 통해 영화에 반드시 원주민 배우가 출현해야 한다는 등의 검열규정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충돌과 살인, 혼외정사 등의 이야기를 담은 수입영화들을 본 원주민들 사이에서 백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구축되었다.

 

<루뚱 까사룽(Loetoeng Kasaroeng)> (1926)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만들어진 영화는 G. 크루거(G. Kruger) 감독과 L. 흐펠도프(L. Heuveldorp) 감독이 합작한 1926년 작 <루뚱 까사룽(Loetoeng Kasaroeng)>이었다. 이는 lost lutung(잃어버린 긴꼬리 검은 원숭이)라는 뜻으로 순다 전설을 각색한 것이었다. 이후 얼마간 시간 텀을 두고 1934년 치노 모션픽쳐스(Cino Motion Pictures)에서 <두 마리 백사 흑사(Doea Siloeman Oeler Poeti en Item)>라는 제목의 본격적인 첫 호러영화가 나왔다. 테뗑춘(The Teng Chun) 감독의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두 마리 뱀 요괴가 인간이 되어 사람들 틈에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그렸다.

 

<우페쪼아>(왼쪽)와 <두 마리 흑사 백사>(오른쪽)  

 

<우페쪼아(Ouw Peh Coa)>라고도 알려진 <두 마리 백사 흑사>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클라우딘 살몬(Claudine Salmon)은 이 이야기가 림호힌(Lim Ho Hin)과 쭁혹롱(Tjiong Hok Long)에 의해 각각 1883년과 1885년에 책으로 먼저 소개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화교들과 동양외국인 사회에서 크게 각광받았다. 쯔유(Tzu You) 데이터에 따르면 수이반리안(Soei Ban Lian) 오페라 극단이 <우페쪼아> 이야기를 1911년 오페라 무대에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 티팟까이 결혼하다(Tie Pat Kai Kawin)>는 2016년 자카르타 끄망지역의 소극장 키노사우르스에서 재상영되기도 했다.

 

테뗑춘은 1935년 요괴를 등장시키는 두 편의 호러영화 <앙하이지(Ang Hai Djie)>와 <티팟까이 결혼하다(Tie Pat Kai Kawin)>를 찍었다.

 

당시에는 중국민화의 소재들이 인도네시아에서 산디와라 연극무대에 오르거나 영화화되는 일이 많았다. 화교들이 산디와라 극단들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20세기 초엔 그런 것이 더욱 일반적이었다. 1911년 뗑푸이니오(Teng Poei Nio)가 설립한 수이반리안(Soei Ban Lian) 외에도 1925년 티오텍지엔(Tio Tek Djien)이 만든 미스 리붓 오리온(Miss Riboet Orion), 1926년 러시아 출신 A 피에드로(A. Piedro)가 세운 말레이 오페라 다르다넬라(The Malay Opera Dardanella)도 당시 유명 극단으로 배우들 대부분이 화교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취향은 이상 언급된 여러 유명한 산디와라 극단들이 상영하는 내용에 따라 형성되었다. 문학작가 아르메인 페인(Armijn Pane)은 그 당시 극단들의 공연은 관객들이 일상의 문제들을 잊을 수 있는 도피처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의 공연은 화려한 색채를 가미해 신비롭고 기괴한 이야기들을 무대에 올렸고 대체로 전래동화나 외국 민화들을 차용하곤 했다.

 

이후 1937년 네덜란드 인디필름 신디케이트(Nederlandsch Indie Film Syndicaat)가 제작한 <밝은 달(Terang Boelan)>이 크게 성공하자 연극배우들이 대거 영화계로 유입되었다.

 

<밝은 달(Terang Boelan)> (1937)과 살아있는 해골(Tengkorak Hidoep)>(1941)  

 

테뗑춘의 자바 인더스트리얼 필름(Java Industrial Film) 영화사는 다르다넬라 극단의 페리 콕(Ferry Kock)-데위 마다(Dewi Mada) 부부가 찾아오는 등 산디와라 극단 출신 배우들이 대거 들어왔다. 그리하여 1940~1941년 기간 중 이 회사는 무려 15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중 <살아있는 해골(Tengkorak Hidoep)>이라는 딴쭈이혹(Tan Tjoei Hock) 감독의 1941년작이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이 영화는 음산한 섬으로 향한 한 탐험가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무덤에 벼락이 내리 꽂히거나 해골이 움직이는 등 다양한 특수효과를 탑재해 관객들에게 영화의 새 지평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1942년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 진주하면서 영화산업 발전도 멈췄다. 당시 태평양전쟁을 주도하던 일본은 라디오방송, 신문, 연극, 영화 등 모든 매체를 전쟁 독려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호러영화의 발전도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전설과 사기진작  

 

태평양 전쟁도 끝나고 독립전쟁도 끝나 1949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인정한 후 1년 간 인도네시아 영화산업도 되살아나 23편, 1951년엔 40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하지만 호러영화는 1971년 M 샤리푸딘(M. Syarieffudin) 감독의 <리사(Lisa)>와 아왈루딘(Awaludin) 감독과 알리 샤합(Ai Shahab) 감독의 공동작품 <무덤 속에서 출산(Beranak dalam Kubu)>으로 비로소 다시 인도네시아 영화계를 찾아왔다. 후자의 영화는 인도네시아 영화계의 전설적 호러퀸 수잔나(Suzanna)의 데뷔작이다.

 

<무덤 속에서 출산(Beranak dalam Kubu)>(1971)와 호러퀸 수잔나  

 

<무덤 속에서 출산>의 성공으로 제작사인 띠다르 자야(PT Tidar Jaya)는 7,200만 루피아의 이익을 냈다. (이 금액은 현재 환율로는 700만원에 불과하지만 1971 당시 인도네시아에서는 집을 서너 채 살 정도였으니 한화 20억원쯤의 가치였으리라 추정된다) 1974년 영화제작비는 2,500~3,500만 루피아 정도였다. 충분히 돈이 되는 장사였기 때문에 이후 호러영화가 계속 쏟아져 나왔다. 1972년에서 1980년 사이 22편의 호러 영화가 제작되었다. 그 이후 1981~1991년의 10년간은 이전 기간의 4배에 달하는 84편의 호러영화가 나왔는데 그중 16편에서 호러퀸 수잔나가 주인공을 밑았다.

 

수하르토의 신질서 정권이 들어선 후 호러영화 역시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에 맞추어 갔다. 신질서 정권은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를 먹고 세워졌다. 1965년 9월 30일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공산당과 연루되었거나 심정적으로 동조했다고 여겨진 이들은 학살당하거나 추방당했다. 당시 학살된 인원에 대한 분명한 통계는 없지만 최소 50만명, 최대 300만명이 1965~1966년 사이 이른바 ‘인도네시아 대학살’이라고 부르는 공산당 사냥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토대 위에서 수하르토 정권은 자신의 버전의 인도네시아를 만들면서 외국인투자를 유치하고 경제자유화를 실행하면서 동시에 군이 사회 정치적으로 민간분야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이중기능을 하도록 허락했다.

 

신문, 라디오, TV, 영화 등 각종 매체에서 군대식 검열이 이루어졌다. 시민들은 더 이상 정부에 맞설 수 없었으므로 국가는 수하르토와 그 측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감히 저항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아무 사전경고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수잔나 출연작

 

이런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호러영화는 전성기를 맞는다. 1970~1990년대의 공포영화들은 각 지역의 전설들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왔는데 폭력, 섹스, 그리고 코미디가 넘쳐 흘렀다. 그게 수잔나가 그토록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씬하고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고 격정적 장면 촬영을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성공도 보키르(Bokir)같은 전설적 코미디언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그들은 <순델볼롱(Sundel Bolong)> (1981), <니블로롱(Nyi Blorong)>(1982), <끌리원의 금요일밤(Malam Jumat Kliwon)>(1986), <흰 악어 여왕(Ratu Buaya Putih)>(1988), <호랑이 여인(Wanita Harimau)>(1989) 등에서 호흡을 맞췄다.

 

보키르(Bokir)와 수잔나(Suzanna)  

 

프로이트는 사람들이 성적, 공격적 본능을 의식 밑으로 가라앉히려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런 생각들은 이야기하면 비로소 의식이 받아들이게 된다. 유머는 이후 어떤 사회질서를 촉구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가 되었다. 호러 영화가 그토록 각광받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호러 영화가 차용한 전설과 괴담들은 관객들의 일상과 밀접한 것들이어서 이들 호러영화에 등장하는 순델볼롱, 뽀쫑, 건드루어, 니로로키둘 같은 귀신과 요괴들이 시대의 아이콘이 될 정도였다.

 

수입영화 쿼터를 줄인 정부정책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1972년 한 해 동안 수입된 영화들은 무려 700~800편에 달했는데 10년 후엔 200편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영화제작 윤리강령이 1981년 제정되면서 국산영화들은 항상 국가적 사기를 진작시켜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생겼다. 그러자 그 결과 호러영화 속에 종교인이 등장해 찬스가 오면 도덕적 설교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호러영화 속 영적 존재가 아무리 거대한 힘을 가졌다고 해도 결국은 영화 속 종교인으로 대변되는 전능한 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식으로 진부한 스토리가 전개되었다.

 

1970년대 이후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나 의구심이 호러영화에 투영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대적 냄새가 나는 것들은 무엇이든 자연과 동화된 삶 또는 농촌사회를 파괴하는 것으로 그려지곤 했다. <무덤 속에서 출산>(1971)에서도 주인공 릴라는 도시에서 찌간야르 촌(Desa Ciganyar)으로 돌아온 후 친 자매인 도라가 세운 사악한 계획의 타깃이 된다. 한편 <사뚜 수로의 밤(Malam Satu Suro)>(1988)에서는 자카르타 출신 청년 바르도 아르디얀토가 수케티(Suketi)란 이름의 순델볼롱 귀신과 결혼하여 나중에 큰 부자가 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이르러 RCTI, SCTV, ANTV, TPI 및 인도시아르(Indosiar) 등 수많은 TV 채널들이 탄생하면서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은 일정한 후퇴를 겪는다. 대중이 TV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영화계 인사들이 대량 TV 산업으로 몰려갔다.

 

그러다가 경제위기가 닥쳐 그 결과 1988년 5월 수하르토의 신질서정권 붕괴로 이어졌다. 인도네시아 영화산업도 어쩔 수 없이 동면에 들어가야만 했다.

 

개혁정부가 들어선 후 호러 장르는 우선 2000년대 초 담력시범 TV 프로그램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했는데 트랜스 TV 방송국의 <다른 세계(Dunia Lain)>이라는 프로그램이 제일 먼저 각광을 받았다. 그 후 TPI 채널의 <우카우카(Uka-Uka)>, TV7 채널의 <영적세계 급행(Ekspedisi Alam Gaib)>, Lativi의 <유령 사냥꾼(Pemburu Hantu)> 같은 유사한 프로그램들이 꼬리를 물고 제작되어다.

 

이러한 트랜드는 곧 영화로 이어져 2001년 영화 <즐랑꿍(Jelangkung)>이 제작되었다. 호세 뿌르노모(Jose Poernomo) 감독과 리잘 만토파니(Rizal Mantovani) 감독이 함께 만든 이 영화는 21세기 인도네시아 호러영화의 이정표로 손꼽힌다. 촬영기간은 불과 2주일이 소요되었고 제작비는 10억 루피아(약 1억원)이 들었는데 150만 관객이 몰리며 크게 흥행했다. 당시 인도네시아 상영관 숫자를 고려하면 150만 명 관객은 한국의 천만 관객에 버금가는 성적이었다. 당시 리리 리자(Riri Riza) 감독의 기념비적 어린이 뮤지컬 영화 <쉐리나의 모험(Petualangan Sherina)>가 두 배의 제작비인 20억 루피아를 들였지만 거의 같은 수준의 흥행을 했던 것과 여러 면에서 비교되었다.

 

왼쪽부터 <즐랑꿍>2001), <유령>(2007), <유령의 섬>(2007), <새신부의 폭포>(2009)  

 

즐랑꿍은 귀신 출몰현상에 관심을 가진 네 명의 친구들이 자카르타를 떠나 앙꺼르바투 마을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렸다. 그곳에서 친구들은 즐랑꿍 초혼식을 통해 영혼을 불러내는데 그후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벌어진다.

 

젊은이들이 담력시험을 하는 스토리의 트랜드는 이후에도 이어져 아드리얀토 시나가(Adrianto Sinaga) 감독의 <유령(Hantu)>(2007), 호세 뿌르노모 감독의 <유령의 섬>(2007), 리잘 만토파니 감독의 <새신부의 폭포(Air Terjun Pengantin)>(2009) 등으로 이어졌다.

 

호러 영화에 섹스와 코미디 요소를 가미하는 관행도 돌아왔다. 요염한 여성들과 광대짓을 하는 멍청이들이 호러 영화의 경직된 분위기를 녹였다. <즐랑꿍>(2001)에서는 멀라니 아리얀토(Melanie Ariyanto)와 로니 도저르(Rony Dozer), <바닥을 기는 간호사(Suster Ngesot)>(2007)에서는 니아 라마다니(Nia Ramadhani)와 마쭈르(Mastur), <귀머거리 악마(Setan Budeg)>(2008)에서는 데위 뻐르식(Dewi Persik)과 리즈키 모킬(Rizky Mocil)이 그런 역할이었다.

 

왼쪽부터 <귀머거리 악마(Setan Budeg)>(2008)와 <바닥을 기는 간호사(Suster Ngesot)>(2007)

 

몇몇 호러 영화에서는 일부러 초청 스타 형식으로 해외 포르노 배우들을 섭외해 출연시켜 티켓파워를 기대했다. 그래서 <머리 감겨주는 아가씨(Suster Keramas)>(2009)에는 린 사쿠라기(Rin Sakuragi), <따나구시르 묘지의 유령(Hantu Tanah Kusir)>(2010)에는 마리아 오자와(Maria Ozawa), <머리 감겨주는 아가씨(Suster Keramas 2)>속편에서는 소라 아오이(Sora Aoi)가 출연했다. 모두 일본 AV 배우들이었다. 본격적인 미국 포르노 배우인 테라 패트릭(Tera Patrick)과 샤샤 그레이(Sasha Grey)도 <처녀귀신의 신음소리(Rintihan Kuntilanak Perawan)>(2010), <허리를 흔들며 목욕하는 뽀쫑(Pocong Mandi Goyang Pinggul)>(2011)에 각각 출연했다.

 

포르노 배우들이 출연한 인도네시아 호러영화  

 

이상 언급한 호러영화들은 젊은이들을 겨냥해 제작된 것들이다. 이런 트랜드는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스크림>(1996), 히데오 나카타 감독의 <링>(1998) 등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전세계적으로 그 포맷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 공포영화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는데 꼬야 빠가요(Koya Pagayo) 감독의 <학교에 귀신들이 있다(Ada Hantu di Sekolah)>(2004), 하니 R 사뿌트라(Hanny R. Saputra) 감독의 <거울(Mirror)>(2005)에서 그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학교에 귀신들이 있다(Ada Hantu di Sekolah)>(2004)와 <거울(Mirror)>(2005)  

 

저렴한 제작비와 일정 숫자 이상의 관객이 보장된다는 것이 섹스와 코미디를 버무린 젊은 층 타깃의 호러영화가 계속 제작되는 이유가 된다. 2007년 일간꼼빠스 자료에 따르면 당시 호러 영화 제작비 평균은 20~25억 루피아 선이었다. 리리 리자 감독의 <무지개 분대(Laskar Pelangi)> (2008)가 대략 90억 루피아 정도의 제작비가 들었던 것과 크게 대비된다.

 

필름인도네시아(FilmIndonesia.or.id)의 이크완 뻐르사다(Ichwan Persada) PD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2007~2015년 기간 흥행 상위영화 70편 중 16편이 호러 장르로 나낭 이티아부디(Nanang Istiabudi) 감독의 카사블랑카 터널(Terowongan Casablanca)>(2007)이 120만 명 관객으로 최상위이고 아디탸 구마이 (Aditya Gumay) 감독의 <따만 라왕(Taman Lawang)>(2013)이 52만 6,761명으로 최하위였다.

 

한 편의 호러 영화가 크게 히트하면 봇물 터지듯 호러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식의 상황이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신질서 정권을 거쳐 오늘날까지 늘 반복되고 있다. 호러 영화는 생산량이 계속 늘어나는 자본주의 상품이 되었다.

 

호러영화는 늘 사람들 삶 속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달라진 것은 글로벌 시대에 사는 젊은이들을 겨냥하여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요즘 젊은이들이란 중산층에서 자라나 일찍이 테크놀로지에 눈을 뜨고 몰과 상점들을 다니며 현대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이다. 귀신이야기가 이 친구들에게 통하기나 할까?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이성이나 논리로는 설명이 안되는 신비로운 무언가를 찾아 갈 곳이 필요한 세대이기도 하다. 호러영화들은 도시 구석구석의 특정 장소에 얽힌 괴담과 터부들을 알려주는 관광홍보적 성격도 띈다.

 

그 결과 귀신들조차 도시화를 겪어야 했다. 서부 자바의 앙꺼르바투 마을에서 시작해 비즈니스 중심가에 있는 카사블랑카 터널을 지나 중부 자카르타 남녀들이 많이 찾는 따만 라왕 공원에 이른다. 몇몇 미스터리가 얽힌 장소들이 영화에 등장하는데 꼬야 빠가요 감독의 <저룩뿌룻 공동묘지의 유령(Hantu Jeruk Purut)>(2006), 호세 뿌르노모 감독의 <루마끈땅(Rumah Kentang)>(2012), 다핏 뿌르노모 감독과 아구스티 딴중(Agusti Tanjun) 감독이 합작한 <끌렌더르 몰(Mall Klender)>(2014), 에카 까틸리(Eka Katili) 감독의 <마예스틱의 랑삿 공원(Taman Langsat Mayestik)>(2014) 등이 특정 장소를 부각했다.

 

왼쪽부터 <저룩뿌룻 공동묘지의 유령>(2006), <루마끈땅>(2012), <끌렌더르 몰(Mall Klender)>(2014), <마예스틱의 랑삿 공원(Taman Langsat Mayestik)>  

 

영화제작과 배급이 자카르타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도시 주변에 이런 볼만한 장소들이 있다는 것은 대부분 자카르타에 사는 영화인들이 제작비를 줄이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러영화는 2010년대에 들어서며 쇠퇴기를 맞았다. 2012년 19편의 호러영화가 나와 총 299만명의 관객이 들었는데 이는 2007년 이래 최악의 성적이었다. 2008년엔 같은 19편의 호러영화에 760만명의 관객이 들었고 2009년엔 22편 723만명, 2010년엔 19편 453만명, 2011년엔 10편에 242만명 관객이 들었다.

 

2010~2012년 사이 다른 장르의 로컬영화들이 20~40억 루피아 정도를 들여 만들어지던 가운데 호러영화 평균제작비는 이전보터 훨씬 줄어들어 6억~10억 루피아 정도에 머물렀다. 관객들이 드디어 지난 수십 년간 민화와 전설을 끊임없이 울궈 먹고 섹스와 코미디로 대충 내용을 버무리는 식으로 정형화되어 버린 호러 영화 방식에 싫증이 난 것이다. 공포의 정의 역시 시대가 변하면서 바뀌어 갔다. 관객들은 이제 대형 화면 속에서 열차가 달려오는 모습 정도에 더 이상 겁을 먹지 않게 되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제 스마트폰 문자 메신저를 통해 폭탄 희생사들의 사진을 보내는 것만으로 몇 분 사이 전국 구석구석까지 공포를 전파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a. 더욱 극단적으로는 기술발전으로 인해 이젠 스마트폰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다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인터넷을 통해 영화콘텐츠에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관객들은 일상 속에서 더 좋은 품질의 영화들을 선택적으로 선호하게 되었다. 그래서 날림으로 만든 공포영화들이 더 이상 설 곳을 잃고 만 것이다.

 

그래레서 2010년대 초중반에 호러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을 공포를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코미디를 보고 웃거나 섹시한 여배우들을 보며 몰이 달아오를 목적으로 극장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 2016년에 진입하며 인도네시아 영화시장이 해외자본에 개방되면서 새로운 전성기가 열리게 되는데 그것은 2017년 조코 안와르 감독의 <사탄의 숭배자(Pengabdi Setan)>이 크게 성공하면서 새로운 호러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출처: 시네마푸티카 13 MEI 2016 - LOKATINJAUAN

https://cinemapoetica.com/jejak-film-horor-nusant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