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니출장 본부장님

인니 출장가신 본부장님 (2)

beautician 2014. 5. 29. 05:04


 

 

한본부장과 관련된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한 통의 이메일로 시작됩니다.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한본부장 <*******@gmail.com>
받는사람 : beautician
날짜: 2013 1 16 수요일, 08 54 30 +0900
제목: 자카르타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미용브랜드(THE S*** beauty salon) 본사 한본부장입니다.
이번에 저희 본사에서 자카르타 지점open 준비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들을 확인하던 선생님 블로그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근일 자카르타 방문할 만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연락처는 011 - *** - 83** 입니다.
가능하면 연락처 부탁 드립니다.

(
)S앤코
서울시 강남구



한본부장이 자카르타에 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쯤 후였습니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홍수를 동반한 폭우가 자카르타를 몇 번씩이나 침수시킨 후였죠. 한본부장 일행은 뽄독인다 인근의 3성급 호텔에 묶고 있었습니다.

 

저희 대표님도 사장님 이름을 언급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세상 참 좁아요.”

…, . 인도네시아 미용업계에서 계시는 한국사람들이 워낙 적으니까요.”

 

한본부장의 첫 인도네시아 출장엔 앞서 언급한 카톡을 보내왔던 장차장이 따라온 것은 물론 대표이사 명함을 들고 함께 온 S뷰티 창업자의 아들은, 젊은 날부터 인도네시아 정재계의 중심에서 인맥을 넓혔고 이젠 대기업 현지법인에서 근무하는 내 학군후배를 바로 전날 만나면서 자기들 일을 현지에서 도와줄 사람으로서 내 이름을 소개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S뷰티 대표는 마침 다른 약속이 있었는지 그날 나와의 미팅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한본부장은 미용계에 몸담은 사람답게 40대 중반 치고는 서너 살 더 어려 보이는 깔끔한 외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개장을 4개월 정도 남기고 있던 자카르타 중심가 사트리오 거리(Jl. Satrio)의 롯데쇼핑에 S뷰티의 첫 해외지점 미용실을 300sq.m 규모로 내기로 하고 이미 계약을 끝낸 상태에서 현지 롯데쇼핑 담당자들과 미팅하고 본격적인 현지 시장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출장을 나왔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지점을 내기로 결정하고 계약까지 하셨다면서요? 현지에 한국인 파트너도 있고요? 그런데 이제부터 시장조사를 한다는 건 좀 순서가 거꾸로 된 거 아닌가요?”

그 파트너 분이 미용을 잘 모르는 분이에요. 그 분은 S뷰티랑 합작으로 반반씩 투자하는데 자본만 대기로 한 상태거든요. 그러니까 사장님 같은 현지 미용 쪽을 잘 아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거죠.”

“4개월 후 개장이라면 인원이나 설비도 문제겠지만 우선 미용실 오픈을 위한 허가들을 진행해야 할 텐데…, 미용실 사업이 외국인 투자종목이 아닌 건 알고 계시죠?”

“….??”

 

이건 뭐

 

그리고 미용실에서 사용할 약재들 들여오는 방식은 생각해 보셨나요? 현지에 로레알이나 웰라 제품들은 있지만 S뷰티라면 아무래도 한국산 약재들을 수입해 쓰시겠죠?”

그건 한국에서 말만 하면 보내줄 업체들이 줄을 서 있으니 염려할 거 없어요. 저희한테 줄 대려는 재료상들은 한국에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오늘 얘기하면 내일 새벽이라도 비행기를 탈 거에요.”

…, 파마약들 비행기에 잘 태워주지 않아서 대량으로 들여오시려면 미리미리 해상선적 하는 걸로 알아 보셔야 할 거에요. 그리고 S뷰티쯤 되는 회사가 밀수하는 식으로 들여오진 않으실 테니 정식통관하려면 식약청에서 BPOM 받으셔야 할 텐데 그거 꽤 시간 걸려요. 그 한국인 파트너 분이 관련 허가신청은 넣어 두었나요?”

“…..???”

 

S뷰티라면 미용계에선 정말 유명한 미용실인데 한국의 박준, 박승철, 이철헤어커커 등과 같이 오래전부터 해외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진 않았다 치더라도 인도네시아 시장 진출을 위한 기본적인 정보도 조사되어 있지 않는 듯 했습니다. 한본부장 말대로라면 S뷰티가 3억원, 현지 파트너가 3억원을 합작해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게다가 그 현지 한국인 파트너는 현지에 법인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미용실은 설립허가신청도 들어가지 않아 결과적으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4개월 후 롯데쇼핑이 개장하면 그때 미용실도 성대한 오프닝을 하며 그 행사를 위해 한국에서 미스코리아들과 연예인들을 데려온다는 계획만 잔뜩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정보부족이 결정적인 문제인 듯 했습니다. 미팅이 진행되면서 처음엔 뭔가 베풀어준다는 식으로 내려다보던 한본부장은 갑자기 자세를 낮추며 이것저것 물어오기 시작했고 난 이 친구들과 어떤 식의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할지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한본부장은 무조건 도와달라 요청해 왔고 정말 300스퀘어 규모의 미용실에 설비와 약재, 한국인 미용사 4명을 포함한 40여명의 종업원들, 그리고 인테리어를 채워 넣기 위해서는 4개월이란 시간이 매우 촉박했습니다.

 

대개는 이런 순간 한번 튕겨줘야 되죠. 어차피 피차 자원봉사를 하려고 만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매달리기 시작하면 그때 내 몸값, 내 서비스의 가격을 정하는 게 좀 야비하지만 정상적이고도 지혜로운 방법이죠. 하지만 간청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게 내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죠. S뷰티는 해외진출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S뷰티 사장이 만났다는 내 학군후배는 미용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S뷰티의 합작 파트너라는 현지 한국인도 한본부장의 설명대로라면 현지 미용시장이나 실무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자카르타에서 현지미용시장 한복판에서 적진 후방에 침투한 공수부대 내지는 고정간첩처럼 일하는 사람들은 나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지점에서 내가 대략 어떤 역할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지 비교적 분명해 보였습니다. 비록 단기간이 될지는 몰라도 S뷰티의 첫 해외지점이 자카르타에 소프트랜딩을 할 때까지 현지 미용계와 코디네이션을 하면서 명의를 빌릴 현지업체와의 JV 설립, 미용실 허가와 한국인 미용사들의 비자, 제반 설비와 약재의 수입과 구매 등등 제반 절차와 현지인 미용사, 스탭 등의 인원수급 등을 해주는 역할 말입니다. 물론 모든 서비스에는 가격이 붙는 법그 가격을 결정하기 위해 일단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 후 2-3일 동안 한본부장과 장차장에게 자카르타의 미용재료도매시장을 보여주고 S뷰티의 인도네시아 진출에 도움이 될만한 유력한 업체들과 미팅을 알선해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뿌스피타 마르타(Puspita Martha)나 무스티카 라투(Mustika Ratu) 같은 거대그룹도 있었는데 인도네시아에서 진행되는 두 개의 미인대회 중 미스인도네시아 선발대회는 무스티카 라투가 주관하고 뿌뜨리 인도네시아(Putri Indonesia) 선발대회의 뿌스피타 마르타의 모회사인 마르타 띨라아르(Martha Tilaar)사가 주관하므로 한국의 미인대회와 관련깊은 S뷰티가 그 이력만으로도 이들의 주목을 끌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거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행사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함으로써 인도네시아에서의 S뷰티의 위상을 단기간 내에 끌어올리는 기중기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터였습니다. 참고로 인도네시아의 미인대회의 대략적 구도는 미스인도네시아의 우승자가 나중에 미스유니버스에 출전하고 뿌뜨리 인도네시아의 우승자가 미스 월드에 나가게 되는 식입니다.

 

이태리 브랜드인 알파파프(Alphaparf)의 독점수입상인 알파뷰티의 에디사장도 소개해 주었는데 앞서 언급한 거대기업들보다는 이 회사가 S뷰티의 현지실무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보였습니다.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beautician
받는사람 : 한본부장

날짜: 2013 5 27 월요일, 04 56 29 +0900
제목: Alphaparf 화교 투자자 상황 관련

(전략)

4. 현실적으로 에디사장 같은 화교 사업가가 귀사에게 가장 적절한 파트너임은 확실합니다. 에디사장 역시 자신의 정체와 능력을 그간 충분히 보여드린 상태이고 특히 폭넓은 업계 인맥과 관련 품목의 수입허가 등을 갖추고 있으니 말이죠. 무엇보다도 외국인 투자종목이 아닌 미용실 체인사업을 진행하려면 현지업체 명의를 빌려야 하는데 그 현지업체의 사장은 말도 통하고 인간성도 좋은 사람이어야 하고 회사자체는 귀사가 컨트롤 가능한 중소기업 규모가 좋다는 측면에서도 에디사장만한 파트너는 달리 찾기 어렵습니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나 S뷰티가 한창 사고를 치고 있던 그 해 5월 말 한본부장에게 보냈던 메일에서도 에디사장에 대한 얘기를 이렇게 언급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본부장은 그 에디사장을 오히려 궁지로 몰아 넣었죠.

 

이때 소개해 주었던 사람들 중엔 현지의 대표적 미용잡지인 살롱프로(Salon Pro)의 헤니 편집장도 있었습니다. 최근 수년 사이 많은 미용잡지들이 새로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 직전까지 20년 가까이 독보적인 미용잡지로 위상을 드높였던 살롱프로는 수하르토 전대통령의 철권독재정권에 맞서 폐간을 불사했던 시사잡지 템포(TEMPO)의 해직기자 출신이었던 창업자 헨드릭스 사장이 그 빛나던 지성에도 불구하고 세월과 치매에 무너지면서 그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중이었지만 그간 쌓아 놓았던 미용사업 전반에 대한 전국적 인맥은 S뷰티가 원하는 그 누구에게라도 선을 대 소개를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의 맛보기를 충분히 보여준 셈이었으므로 이제 내가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말할 차례였습니다. 그들은 다음 달인 3월에 다시 자카르타에 와서 구체적인 얘기를 하자고 했는데 그 사이에 한본부장이 보내온 이메일에 난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한본부장 <*******@gmail.com>
받는사람 : beautician
날짜: 2013 2 18 월요일, 10 23 31 +0900
제목: S앤코

 

안녕하세요, 사장님.

서울로 돌아와 밀린 업무 정리하느라 연락 드리는 너무 늦어졌습니다.
지난번 출장 때엔 사장님의 배려로 너무 값진 미팅들을 했습니다.


제가 3 10일경 다시 자카르타로 출장 갑니다.
이번 출장에서는 여러 가지 확인하고 결정해야 일들이 있습니다.
혹시 지난번 말씀하셨던 봉사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stylist들을 이번 방문 사장님과 함께 만나볼 있을까요? 경비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지난번 제가 쌤플 드렸던 손팩과 발팩을 자카르타의 홈쇼핑으로 먼저 풀어보려고 하는데 사장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물론 현지에서 수입진행 파트너도 필요하고요.

저는 소개해주신 에디가 마음 가는 같습니다.

(중략)

 
사장님께 도움만 요청하고 제가 해드릴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출장을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로 예상하는데 통역해 사람을 구할 있을까요? 그리고 통역비는 하루에 얼마정도 할까요?
젊은 놈이 한번 하려고 하는데 사장님께서 많이 도와 주세요.

제가 어떤 방법으로라도 사장님께 보답하겠습니다.

한본부장

 

요약하자면

1. 이런 저런 부탁들

2. 보상은 못하지만 끝까지 좀 도와달라.

이런 내용이 됩니다.

 

이 이메일에서 뭔가 냄새가 풍겼습니다. 실수의 냄새 말입니다.

전체를 다 아는 사람의 입장에선 아주 조금 맛보기만 보여주었던 것인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해서 본 것이 마치 전체를 다 본 것처럼 느낀다는 상식을 간과한 실수 말입니다. 자카르타에 34일 출장 왔으면서 둘 째 날쯤 인도네시아를 이미 다 파악한 것처럼 기염을 토하는 사람들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죠. 중소기업의 인도네시아 법인장으로 부임한 지 두 달도 안된 후배가 자카르타 거리에서 발에 밟히는 게 전부 돈 되는 일 천지인데 지사 나와 있는 동안 몇 억 챙기지 못한 인간들은 인생 잘못 산 거라고 호기롭게 건방을 떠는 입에 제대로 돌려차기를 먹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때 한본부장은 이미 볼만큼 다 봐버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만날 사람들은 내가 소개해 주길 바라면서도 이미 소개받은 사람들과는 통역을 끼고 따로 만나겠다는 것이고 자원봉사자들을 만나러 가기 위한 지방출장비용이나 통역료는 지불하겠지만 내게는 아무런 보상도 할 수 없다는 말을 저렇게 쉽게 하는 것이죠. 그리고 40대 중반을 넘어선 한본부장은 내게 젊은 놈 하는 일 도와달라하기엔 나랑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았습니다.

 

저희 미용실이 자리잡을 때까지 잠정적으로나마 사장님께서 저희 자카르타 지점을 일단 맡아주시는 걸 저희 대표님께 건의 드려 봤는데요…”

 

나쁜 예측은 절대 빗나가지 않습니다. 망가두아몰 노보텔의 카페에서 S뷰티 미용학원 강사라고 소개받은 이실장이 동석한 자리에서 한본부장은 이 얘기를 지나가는 말처럼 꺼냈습니다.

 

미리 확인하지 못했던 일인데 자카르타 지점장은 저희 대표님 친구분, 전에 말씀 드렸던 그 롯데랑 관련된 자카르타 파트너분으로 이미 내정된 상태였어요.”

 

3억을 투자한다는 현지의 그 한국인 파트너 말입니다.

 

그리고 명의를 빌려 JV를 만들 현지 파트너로는 에디사장도 참 좋지만 아무래도 그분한텐 저희 미용약재들 유통을 부탁드리는 게 좋을 것 같고요. 그때 미팅할 때 보니 뿌스피타 마르타에서도 우리 미용실에 투자할 모양이더라고요. 그러니 합작법인 계약은 그쪽이랑 하면 좋겠어요.”

 

그는 뿌스피타 마르타의 뿔로가둥 공단 내 대단위 화장품공장을 견학하고 난 후 그쪽으로 필이 꽂혀버린 상태였습니다. 한국에선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인도네시아에선 무명이나 다름없는 S뷰티를 알파뷰티의 에디사장과 살롱프로의 헤니편집장이 유력한 인맥들을 통해 어렵게 마련한 미팅에 나온 창업자의 둘째 딸이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을 당시 인도네시아 첫 출장 중이었던 한본부장은 마치 단단히 투자약속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이젠 뿌스피타 마르타와 이미 계약이라도 맺은 듯 구름 위를 붕붕 떠다니며, 에디사장은 아예 뒷전으로 내팽개쳐 놓고 자기 제품이나 팔아 먹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실장이 함께 온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에디사장은 그리 관심 있어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데 한본부장은 에디사장의 순터르 스튜디오에 이실장을 매일 보내 에디사장에게 구해달라고 부탁한 모델들에게 가져온 미용약재들을 며칠간에 걸쳐 하나하나 모두 시연해 보였던 것입니다.

 

사장님께도 다른 건 몰라도 손팩, 발팩만은 독점으로 공급해 드릴게요.”

 

내게도 물건을 팔아먹겠다는 얘기죠.

게다가 당시 인도네시아에서는 마스크용 팩 시장이 조금 열리기 시작하던 시점이어서 많은 종류의 한국산 마스크 팩들이 왓슨(Watson) 같은 매장에 깔려 있었지만 시장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판매상황은 매우 저조하던 차에 한국이나 싱가폴처럼 그런 팩들이 오래 전부터 보편화되어 있는 시장에서나 먹히는 손팩, 발팩을 내게 떠넘기려고 열변을 토하는 한본부장을 보며 난 속으로 혀를 찼습니다.

 

한본부장은 대놓고 얘기하진 않았지만 이젠 내가 해줄 일은 거의 다 한 셈이니 좀 비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고 나 역시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또 다시 아무 의미도 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고 후회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실 나나 에디사장은 미용실 해외지점을 내기 위해 출장 왔다는 한본부장이 허접한 제품들을 꺼내 들고 팔려는 의도를 석연치 않게 보고 있었습니다. 나와 한본부장 사이엔 이런 이메일이 오고 갔습니다.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beautician
받는사람 : 한본부장

날짜: 2013 2 20일 수요일, 01 35 23 +0900
제목: RE: S앤코

(전략

손팩, 발팩에 대해서는 저희 경험을 토대로 말씀 드린다면 아무리 기가 막힌 제품이고 한국에서 대히트를 친 상품이라 해도 인도네시아에 당장 수요가 없어 지금부터 시장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만 하는데 그런 시간과 노력을 다한 한국 중소기업들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중간에 포기해 버리더군요. 현지 수요가 있어야만 하고 시장이 이미 형성되어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어느 정도 만들어져 가는 과정에 있어야 하는데 손팩, 발팩에 대해서는 저희도 시장조사를 해 본 적이 없어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다는 거고요.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한본부장 <*******@gmail.com>
받는사람 : beautician
날짜: 2013 2 22일 금요일, 16 14 56 +0900
제목: Re: S앤코

 

(전략)
네번째
Eddy
사장 같은 너무 좋은 분을 소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에 자카르타 입국해서 저희 대표님과 사장님이 같이 식사시간을 갖도록 마련하겠습니다.
그리고 손팩, 발팩 관련해서는 제가 독점권을 획득하고 현재 OEM으로 진행 중인 회사가 인도네시아 무스티카라투와 계약이 되려다 중간에 컨설팅 하는 사람과 문제가 있었는지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인도네시아 측에서 제품을 확인하고 너무 반응이 좋았다고 하는 제품입니다.
현재 한국의 회사와는 제가 인도네시아, 싱가폴, 말레이시아 세 나라는 독점 계약을 한 상태 입니다.
이번에 다시 샘플을 가지고 가오니 좋은 결과가 있을것 같습니다.
여기서 사장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과연 무스티카라투 회사와 다시 진행 하는것이 좋을지 아니면 마르타 뿌스피타 또는 다른 회사와 하는 것이 좋을지... 그래서 이번 방문 시에는 여러 회사분들과 미팅을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얘기는 거짓말이라 보입니다. 이 메일이 오고 간 것은 한본부장의 첫 출장 후인데 첫날부터 손팩 발팩을 들이밀던 그는 그 당시 무스티카 라투라는 회사 이름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가 무스티카 라투가 예전에 좋은 반응을 보였다고 떡밥을 던지죠? 마치 처음부터 거의 다 된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새 물건을 들고 와 팔아보려 하는 사람들마다 자기가 해당 제품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고 강변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밝히지 못할 이유도 없는 제조사를 항상 뒤에 꽁꽁 숨겨놓곤 합니다.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beautician
받는사람 : 한본부장

날짜: 2013 2 23일 토요일, 01 07 06 +0900
제목: RE: Re: S앤코

(전략)

--> 무스티카라투 마르타 틸라아르는 인도네시아 미용산업의 양대산맥이라 할 만한 큰 회사들입니다. 어느 쪽과 성사되더라고 큰 성과라 할 수 있지요. 단지 무스티카라투는 오로지 화장품 쪽이고 마르타 틸라아르는 얼굴, 피부화장품은 물론 샴푸, 무스, 젤 등 헤어미용 관련제품 등 제품 스팩트럼이 훨씬 더 넓은 편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종전에 무스티카라투와 거의 계약하는 단계까지 갔다면 그 단계에서 넘겨받아 무스티카라투랑 속개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찌 보면 손팩/발팩만 가지고 얘기하기엔 너무 중량급 상대들이란 느낌이 듭니다. 양쪽 다 연구소와 대규모 생산공장들을 가지고 있어 제품수입보다는 OEM 생산을 희망하기 쉽고 거래가 이루어진다 해도 제품이 잘 나가면 나중에 카피 당하기도 쉽지 않을까 싶네요. 손팩/발팩을 한국에서 수출하고자 한다면 현지 미용관련 대기업들보다는 관련 수입상들이나 전문유통업체들을 만나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beautician
받는사람 : 한본부장

날짜: 2013 3 07일 목요일, 02 54 08 +0900
제목: RE: Re: Re: S앤코

(전략)

4. 궁금해서 문의합니다.

롯데백화점 입점하는 S뷰티의 해외 프랜차이즈점 때문에 롯데 측과 미팅 등을 위해 출장오시는 것은 잘 알겠는데 제게 손팩, 발팩을 부탁하신 건 궁극적으로 S뷰티의 어떤 부문을 위한 것인지요?

 

귀사 회사소개서나 웹사이트에서도 귀 브랜드를 달고 있는 제품은 헤어토닉만 보이는데 소개서에 포함되지 않은 귀사 헤어제품들이 많이 있는 모양이지요프랜차이즈점 오픈과 나아가 지점 설치를 위한 제반 준비에 방향이 잡혀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제품 마케팅이 귀 출장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 문의드리는 겁니다.

 

어쨋든 귀사의 인도네시아 진출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데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 서로 틀리면 도움이 되기보단 나중에 걸림돌이 되기 쉬울 것 같아서요.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한본부장 <*******@gmail.com>
받는사람 : beautician
날짜: 2013 3 08일 금요일, 10 56 43 +0900
제목: Re: RE: Re: Re: S앤코

 

(전략)
두번째, 저는 살롱 오픈도 중요하지만 서울의 법인회사를 대표해서 또 다른 수익구조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저의 임무 입니다. 그래서 확인하고 미팅하려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에서는 S앤코로 하여 OEM생산 및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카폴 등 3개 나라의 제품 판매에 대한 독점계약이 되어 있어서 이렇게 업무진행하는 것에 염려하시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미용실이 잘 돌아가지 않아 수익을 내지 못하면 손팩, 발팩을 팔아서라도 미용사들 월급을 줘야 한다는 비장한 얘기로 들렸습니다. 이것이 노보텔에서 한본부장과 이실장을 만나기 직전까지 오갔던 메일들이었습니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모든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을 때 이 손팩, 발팩이나 이실장이 출장기간 내내 알파뷰티에서 시연했던 듣도 못한 브랜드의 미용약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판단이 서게 되었죠.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beautician
받는사람 : ,후배님<**********7@gmail.com>
날짜: 2013 6 10일 월요일, 04 36 02 +0900
제목: S뷰티 관련

 

(전략)

5) 그리고 한본부장은 2월 출장 당시부터 핸드팩, 풋팩 등 제품을 내게 팔아 달라고 가져왔고 에디사장에게는 파마약제 같은 것들을 가져와 팔려 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한본부장은 자신이 인도네시아 진출 프로젝트의 전권을 받은 상태여서 나중에 S뷰티가 미용실을 열고 지점도 열었을 때 현지 수입이 충분치 않아도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별도의 사업을 준비하는 것도 자기 책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현지 투자자도 있는 상황에서 S뷰티 쯤 되는 위상의 기업이 3억씩 투자해 들어온다면서 그런 처절한 비상자금계획을 세워 너절한 제품들을 들고 들어온다는 게 이상했지요. 우린 한본부장이 S뷰티와는 별도로 제품유통을 통해 딴 주머니를 차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6) (전략) 3월 출장 당시 함께 왔던 이실장이란 사람도 S뷰티 직원이라고 소개받긴 했지만 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S뷰티 사람이 아니라 미용약재 공급선의 직원이라는 심증이 강합니다. 왜냐하면 우린 제품유통이 한본부장의 개인 주머니라 생각하고 있는데 이실장은 에디 사장의 회사에서 제품시연만 했고, S뷰티 명함도 주지 않았을뿐더러 한본부장은 롯데와의 미팅에 이실장을 데려가지도 않았거든요. 이 사람이 한본부장이 몰래 데려온 S뷰티의 거래선 사람이 맞다면 한본부장의 당시 출장비 등 관련경비도 그 거래선이 지불했다고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중에 자신이 지**의 이실장이라며 따로 문의 이메일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한본부장 일행의 출장이 2주차 말로 접어들면서 그렇게 철썩 같이 미용실에 투자할 거라 믿었던 뿌스피타 마르타가 미팅 약속조차 잡아주지 않자 한본부장이 다시 내게 매달리기 시작하면서 몇 차례 더 그들을 만나긴 했지만 그 노보텔에서의 미팅 이후 S뷰티와의 일을 마음 한편에서 제쳐놓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기업의 현지진출 초기에 이런저런 요청을 받아 도움을 주었다가 중간에 토사구팽 되는 경우는 불행하게도 인도네시아의 현실에서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었으므로 크게 타격을 받거나 낙담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도네시아에 휴양 온 게 아니라 어떤 일을 해서든 돈을 벌어야 하는 생활인의 입장에선 돈도 되지 않는 일에 마냥 시간을 투자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해 5월에 세 번 째 출장을 왔을 때에는 만약 그 위치가 끌라빠가딩에서 가까운 순터르의 선레이크호텔이 아니었다면 중간에라도 한번 만나보러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좀 궁금하기도 했어요.

 

한본부장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그들이 자카르타에 도착하기 전 미리 만났던 에디사장은 한본부장이 보내온 이메일과 첨부파일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내가 아무리 인도네시아에서 오래 살았다 해도 명색이 영어를 전공한 사람인데 한본부장의 이메일은 도무지 해독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30만불을 낼 수 있느냐는 얘기인 것 같죠?”

 

그렇게 보였습니다.

30만불이라면 약 3. S뷰티와 현지 한국인 파트너가 각각 투자하겠다던 금액이었어요. 왜 그걸 에디사장이 투자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 것일까요?

 

그러나 선레이크호텔에서 만난 한본부장은 출장 중 일정이나 진전상황에 대해 대체로 함구하고 있었습니다. 노보텔 때까지만 해도 그는 묻지도 않은 모든 일정을 내 앞에서 줄줄 주워섬겼었는데 말이죠. 나 역시 공식적으로는 그들의 일에서 손을 뗀 상태였으므로 굳이 대놓고 묻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서 S뷰티가 기획실장으로 영입했다는 박인가 최인가 하는 사람을 소개받고 이번에도 뿌스피타 마르타와 미팅을 잡아달라는 끈질긴 요청을 받은 것이 전부였어요.

 

그 기획실장의 이력이 화려했습니다. 호주 유학파로 영어가 유창했고 지난 수년간 중국과 태국에서 이런 저런 무역사업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S뷰티가 잘나가는 미용실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로 높은 스팩을 가졌고 한편으로는 미용 백그라운드가 전혀 없는 사람을 기획실장으로 영입해서 뭘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난 의아해 했습니다. 한본부장은 S뷰티가 이제 국제화의 길목에 서 있어서 해외사업을 위해 그 기획실장을 영입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뉴욕 맨하탄에 진출한 S뷰티 미용실이 성업 중이며 뉴욕 역시 자기 관할이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는데 난 또 다시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도네시아가 첫 해외지점이라면서…?]

 

한본부장은 바로 2-3개월 전 그 자신이 내게 했던 말을 내가 왜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걸까요? 그 뉴욕 S뷰티 미용실은 과연 실존하는 것이었을까요? 아님 뻥이었을까요? 실제로 그 미용실이 존재하고 성업 중이었다 하더라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기획실장을 놔두고 도저히 해독불가능한 외계어 수준의 영어를 쓰는 한본부장이 관할한다는 것도 사실이었을까요? 뻥이었을까요?

 

특별히 일이 걸려있는 게 없으니 그 이후 그들의 출장기간 동안 난 다시는 그들과 만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3주쯤 지나던 시점에 에디사장이 씩씩 거리며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알아온 에디사장은 누구한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날 그는 분명 머리 끝까지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라도…?”

그 사람들 말이에요. S뷰티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왜요?”

 

에디사장은 내게 관련 내용들을 모두 이메일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사고를 쳤어요. 그 사람들이 사기를 쳤단 말이에요!!”

 

난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2014. 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