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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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 고양이의 가출
아이들이 '오렌'이라 부르는 오렌지색 고양이가 사흘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인도네시아 서민 또는 빈민들이 고양이를 기르는 방식은 집안에 가두어 키우는 한국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집에서 밥먹이고 재워주지만 낮에는 밖으로 나돌아 다니도록 풀어주는 게 보통입니다. 주인이 있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말고는 길고양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오렌이 돌아오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렌은 2주 쯤 전에 자기를 닮은 오렌지색 새끼고양이 세 마리를 출산한 모성애와 책임감 넘치는 젊은 어미 고양이였기 때문입니다.
새끼들을 두고 없어져버릴 친구가 아니었던 겁니다.
오렌은 차차와 마르셀이 홍수에 떠내려가던 것을 구해온 새끼고양이가 자라 처음 낳은 세 마리 중 하나였습니다. 세 마리 모두 잘 컸는데 오렌은 그 중 가장 얌전하면서도 가장 겁많은 놈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가면 늘 소파 밑 좁은 공간 속에 숨어있곤 했습니다. 그런 친구가 어디선가 임신해 와서 새끼들을 낳았는데 그후로는 내가 가도 숨지 않고 새끼들을 잘 돌보고 있었어요. 그런 친구가 사흘동안 돌아오지 않자 난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도 걱정하기 시작했고요.
오렌의 형제는 히띰(검정색)과 블랑(줄무니)가 있었는데 이번엔 블랑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연이어 사고를 당한 걸까요?
4월 24일(토) 아이들을 위해 부까뿌아사를 위한 음식을 구하러 나가는 길에 기분전환하려고 수디르만 거리를 거쳐 엠베서더 몰, 롯데쇼핑애비뉴를 거쳐 세 시간 만에 아이들 집에 돌아가 보니 밖에 블랑이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가 좀 이상해 보였어요. 펀칭을 한 것처럼 오른쪽 귀 끝이 뜯겨 있었는데 물어 뜯긴 것 같지는 않고 마치 누군가 담배불로 지진 듯 끝이 새카맣게 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관 문을 열면서 우린 또 깜짝 놀랐습니다. 오렌이 돌아와 있었던 겁니다. 현관 문 위에 바람이 통하도록 가로로 긴 구멍이 나 있는데 고양이들을 방충망 문을 타고 올라가 그 구멍으로 드나들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오렌의 귀도 이상했습니다. 똑같은 오른쪽 귀에 같은 상처가 나 있었던 겁니다. 털 색이 오렌지라서 불에 그을린 표시가 더욱 선명해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오렌을 보고 울음을 터트린 건 몸의 털이 깎여 있었고 거기 구멍이 난 듯한 상처가 있었는데 바느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양이의 털을 깎는 건 사람도 수술하기 전에 해당 부위 털을 깎는 것처럼 의료행위의 일종이라 생각되지만 바느질 상태가 도저히 의사의 솜씨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고 사용된 실 역시 수술용 실이 아니라 일반 재봉사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오렌의 목 가까이에 번호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습니다.
저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오렌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혹시 어딘가에서 장기 적출이라도 당하고 온 건 아닐까요? 물론 그랬다면 굳이 봉합하지도 않았을 거고 회복할 수도 없었겠죠.
아무튼 정황상 오렌을 찾아나선 블랑이 오렌을 찾아냈거나, 오렌을 잡고 있던 어떤 사람(들)에게 잡혔다가 함께 탈출해 나온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음식을 주니 오렌은 며칠 굶기라도 한 듯 정신없이 흡입하더군요.
누가 고양이에게 이런 짓을 한 걸까요?
누가 오렌을 도운 걸까요?
아니면 오렌에게 몹쓸 짓을 한 걸까요?
저 번호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고양이들이 말을 못하니 답답해 죽겠습니다.
오렌이 낳은 세 마리 새끼를 차차가 지난 사흘 동안 열심히 우유를 주사기로 먹여 보살폈는데 어쨋든 어미가 돌아와 다행입니다. 하지만 이제 고양이들을 내놓기 무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인근에 고양이에게 저런 짓을 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오늘 상황을 본 후 내일은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습니다.
202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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