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무속과 괴담 사이 (8)] 집단빙의는 정말 귀신의 조화일까? 본문
끄수루빤 마쌀 (Kesurupan Massal)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문화가 다르다 보니 간혹 귀신 이야기조차 그다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화적, 정서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니 뽀쫑이나 뚜율이 나타나도 내가 왜 쟤들을 무서워해야 할지 포인트가 잡히지 않는 거죠. 심지어 저게 정말 귀신일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끄수루빤은 우리에게 좀 더 현실적입니다.
어떤 혼령이나 미지의 존재가 인간에게 빙의하는 현상, 즉 사람 몸 속에 들어와 그 사람을 지배하거나 일정한 영향을 끼치는 현상을 인도네시아어로 ‘끄수루빤’ (Kesurupan) 또는 ‘끄라수깐’(Kerasukan)이라 합니다. 물론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걸 직접 보고도 절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집단빙의현상인 끄수루빤 마쌀(Kesurupan Massal)은 최근까지도 대규모 인원이 좁은 공간에서 밀집상태로 일하거나 공부하는 봉제공장이나 학교에서 심심찮게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보건 프로토콜로 사업장들에 인원제한이 걸리고 학교들이 온라인 수업을 시작하면서 코로나는 결과적으로 집단빙의 귀신들조차 쫓아버리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집단빙의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고 그 중 한국회사 이름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귀신들은 투자자의 국적을 가리지 않습니다
집단 빙의사건은 대체로 일정한 패턴을 보입니다.
한 여종업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그 소문이 퍼지면서 공포도 전파되고 빙의도 전염되는 거죠. 어떤 이들은 가혹한 업무량이나 위압적인 상사로 인한 스트레스와 근무환경을 그 이유로 지적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공장신축 당시 우리로 치면 고사와 같은 슬라마탄(Selamatan) 행사를 하지 않은 것을 귀신들이 화가 난 이유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편 사용자측의 반응은 대개 빙의된 이들을 격리하고 직원들을 조기퇴근 시키고 인근 사원에서 우즈타즈(Uztadz)를 모셔와 기도회를 하거나 이슬람 퇴마사인 루키야(Ruqyah)를 불러와 일정한 종교의식을 하면서 직원들을 진정시키는 것입니다. 빙의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만큼 그 대응 역시 속전속결이어야 합니다. 자칫 방치하거나 잘못 대응하면 조업중단이 장기화되면서 공장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도 합니다.
집단 빙의사건이 시작되는 시간은 대개 공장이 막 가동되기 시작하는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입니다. 빙의사태가 일단 벌어지면 사업주는 비용이나 납기, 관련 후속조치 등에 갑작스러운 부담에 전전긍긍하게 되지만 종업원들 입장에서는 데모와 파업을 통해서도 얻지 못한 충분한 휴식, 급식과 위생시설 개선 등 근무환경 문제가 순식간에 개선되거나 해결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초자연현상을 빙자해 배후의 노조나 불순세력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라는 의심도 존재합니다. 그것이 사용자 측에서 집단 빙의현상을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의혹을 품는 이유죠.
이 얘기는 작업장 미싱공 한 명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실신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주변 사람들 증언에 따르면 초졸 학력의 이 미싱공이 실신한 상태에서 화란어를 중얼거렸단다. 그런 소문이 퍼지면서 공장은 패닉에 빠졌고 급기야 종업원들이 수십 명씩 동시에 귀신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는 사태가 잇따랐는데 이는 공장이 화란인들과 중국인들의 공동묘지터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며 공장 완공 후 적절한 이슬람식 축복의식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종업원들이 본 귀신들은 대개 공장 벽면에 달린 회전식 선풍기 위에 붙어 납작하게 쪼그리고 앉아 새빨간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고 하며 때로는 직원들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흐늘거리며 지나갔다고도 한다. 그 와중에 강제 귀가시겼던 한 창고직원이 흐리멍텅한 눈에 침을 흘리며 창고 한 구석이 자기 집이라면서 자꾸 기어들어가는 상황까지 발생하면서 종업원들이 공포에 질려 공장가동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목사님을 불러와 기도회도 갖고 우즈타즈를 청빙해 이슬람식 의식을 갖기도 하고 급기야 두꾼까지 불러 검은 염소의 머리와 다리를 잘라 여자화장실 타일바닥 밑에 묻고 피를 주변에 뿌리는 축신술을 한 후에야 비로소 귀신사건은 어느 정도 잠잠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장이 완전 정상화된 것은 귀신을 봤다는 직원들을 순차적으로 전원 퇴직시킨 후였다.
귀신이라는 존재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공장가동 같은 경제활동을 물리적으로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사무실의 어두컴컴한 복도와 그 뒤의 새카만 사무실 공간이 그 당시처럼 으스스했던 적이 없다. 화장실을 가게 되면 세면대 앞에 붙어있는 거울에 존재할 리 없는 뭔가가 비칠 듯했고 집에 돌아가서도 화장실의 조그만 창문 뒤로 그 높이엔 절대 있을 수 없는 산발한 사람 머리 하나가 불쑥 떠오를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출처 – 블로그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집단 빙의는 비단 인력집약적 공장에서뿐 아니라 콩나물 시루 같은 각급 학교들과 많은 인원들이 동원되는 특정 종교행사 같은 곳에서도 곧잘 발생합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지는 집단 빙의현상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빙의, 귀신에 씌이는 현상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나 실례에서 보듯 빙의는 치명적이고도 집요하게 반복되고 지속되며 때로는 죽음 같은 파국에 이르기도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집단빙의현상은 다분히 일과성입니다.
한편 빙의된 상태에서 내뱉는 말들은 정확하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 발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실신한 사람이 화란어로 말했다거나 중국어를 구사했다는 부분은 좀처럼 신뢰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보고하는 사람 자체가 중국어나 화란어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하거니와 끄수루빤 되었다는 사람들은 대개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며 뭔가를 중얼거리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귀신의 외국어 구사능력에 대해 좀 더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2008년의 일입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난 후배로부터 그의 찌까랑 공장에서 벌어진 빙의사건 얘기를 들었습니다. 작업 중 졸도해 쓰러진 종업원이 꿈속에서 누구랑 대판 싸우기라도 하듯 높은 톤의 중얼거림엔 영어가 섞여 있었고 곧이어 유창한 만다린 중국어가 튀어나왔다는 것입니다.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20대 초반 빈민층 여종업원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언어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강제로 귀가시키려 하자 제 한 몸 가누지 못해 휘청거리면서도 무서운 힘으로 경비원들을 다 뿌리치고 막무가내로 법인장실에 들어선 그녀가 뭔가 씌인 게 분명한 산란한 눈초리로 내 후배(법인장)를 노려보며 하는 첫 마디가 이랬답니다.
“야, 박00, 내가 너랑 할 말 있는데…”
분명한 한국말로 말이죠. ….허걱!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출처 – 블로그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집단 빙의 현상이란 어쩌면 자기 암시를 통해 필연적으로 증폭되어 버린 공포심,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군중심리까지 겹쳐진 뭔가 복잡미묘한, 그러나 대체로 과학적으로 설명가능한 어떤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찌까랑 후배의 경우와 같이 귀신이라고 믿어질 만한 어떤 존재가 자기 코앞까지 정면으로 달려든다면 생각이 많이 달라집니다.
한국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겪은 집단 빙의사건은 한 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인 스스로가 빙의를 겪었다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역시 귀신들도 외국인이 좀 불편한 걸까요?
그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법인장들은 대체로 반신반의, 하지만 현장 직원들 사이에서 직접 사건을 겪은 이들은 뭔가 초월적 존재의 개입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모양입니다.
직원들이 단체로 비명을 지르며 졸도해 버리는 작업장의 끄수루빤 현장을 2층 관리실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종업원들을 쓸어버리는 것 같은 장면이 펼쳐집니다. 그게 만약 직원들끼리 꾸민 일이라면 마치 오래 훈련한 마스게임을 하듯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나가떨어질 수 있을까요? 난 그게 쇼가 아니라고 믿는 쪽입니다.
꽤 오래 전 메단에서 KOICA 봉사활동을 하던 미용사 출신 한국인 여선생님이 자신이 겪은 빙의사건에 대해 쓴 경험담 일부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5/14
출근하니 2층에서 여학생이 부축을 받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선생님들과 교장선생님은 뭔가 상의하는 듯했고 교실의 아이들은 내가 들어가니 내 팔에 매달려 무섭다고 하소연한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그냥 그들을 안아줬다. 인니말을 잘 모르지만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실습실 가운데 작은 의자에 물이 한 컵 놓여 있었는데 스스로 영매라고 말한 한 여학생이 다른 학생을 그리로 불러 냈다. 그 학생은 아침에 쓰러졌던 여학생이었다. 영매학생이 의식을 시작하자 불려 나온 여학생이 풀썩 쓰러지더니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렸고 이내 손발이 새까매지면서 울고 불고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은 내 팔을 잡고 매달려 울면서 기도를 했다. 나는 그냥, 괜찮아, 영양실조야, 밥 많이 먹으면 된다 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조금 있으니 여기 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엑소시스트 영화에서 보았던 끔찍한 모습들이 그대로 학생들에게서 나왔다. 학생들은 쓰러지자마자 이내 다른 영혼이 실려 전혀 다른 이상한 목소리를 내면서 엉뚱한 행동을 했다. 의상학과 5명. 요리학과 3명, 컴퓨터과 1명, 미용과 2명.
우린 패닉 상태에 빠졌다. 쓰러진 아이들은 미쳐서 날뛰고 선생님들은 몸부림치는 아이들을 잡아 진정시키려 하고, 지켜보던 아이들은 무섭다고 울고 불고.
아무 대책도 없는 집단빙의사건.
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말로는 뭐라 할 수 없는 그 미스테리함.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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