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니 민속과 주술

[무속과 괴담 사이 (7)] 흑마술사 두꾼(Dukun)

beautician 2021. 3. 22. 13:58

인도네시아 전통사회 속 두꾼의 지위

 

 

 

전편에서 즐랑꿍 빙의인형으로 한 마을을 멸망시킨 두꾼의 이야기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두꾼들이 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건 아닙니다.

 

1939년 인도네시아 국영출판사인 발라이 뿌스타카(Balai Pustaka)에서 출간한 함카(Hamka)의 소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Tenggelamnya Kapal Van Der Wijck)>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략) 이 때까지만 해도 병이 아주 위중하지 않으면 의사에게 가지 않는 게 보통이었는데 사람들이 의사 모욕하기를 주저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도대체 의사가 뭘 안다고? 의사들은 이런 환자를 치료하지 못해! 상처를 치료하려면 주술사를 불러와야지!” 그러다가 나중에 환자 상태가 정말 위중해지면 그때 가서야 의사한테 달려가곤 했다. (후략)

 

두꾼, 즉 주술사들은 신비한 치료술사로 여겨졌습니다. 말하자면 백마술사인 거죠. 그런데 같은 책에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전략)만약 여자에게 마음을 다쳤다면 상처를 극복하는 길은 두 가지에요. (중략) 물론 우리 빠르와들의 극복방식은 똑같은 고통을 줘서 복수하는 거고요. 용한 두꾼을 시켜 너무 사랑하거나 너무 미워하는 상대방 여자가 남자와 이혼하거나 미쳐버리도록 시준다이나 빠렌당안 같은 흑마술을 걸어버리는 거죠. (후략)

 

당연하게도 주술사들 중엔 누군가에게 저주를 거는 저주술사, 즉 흑마술사도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게 분명하게 선을 그어 누구는 흑마술사, 누구는 백마술사, 이런 게 아니라 같은 두꾼이 치료도 하고 저주도 하고 그랬던 겁니다. 이 책엔 이런 묘사도 있습니다.

 

(전략)빤더까르 수딴의 처신과 용기있는 행동에서 드러나는 성품은 매우 매력적이었고 심지어 간혹 주술에도 일가견을 보여 노인은 그가 마음에 쏙 든 나머지 자신의 딸 다엥 하비바와 혼인시켜 사위로 삼았다. (후략)

 

당시 주술은 일종의 기본 소양이자 상식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요즘도 주술 비슷한 것을 행하는 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나는 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시골에서 데려온 어린 뻠반뚜(가정부)가 남의집살이를 견디지 못해 자기 방 벽걸이 달력 뒤에 이상한 문자와 그림을 그려 그 집안에 저주를 걸어 놓고 야반도주하는 일도 일어나죠. 집안에 뻠반뚜와 안좋게 헤어지면 그가 있던 방을 잘 둘러보세요. 이상한 그림이나 수상한 물건이 남아 있다면 급히 내다 버리거나 태워버릴 것을 추천합니다.

 

이 소설의 저자 함카(Hamka)는 수마트라 미낭까바우 지역 출신의 유명 언론인이자 작가 겸 정치인이었을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주요 이슬람 단체인 무함마디아에서 요직을 거친 성직자이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초, 내로라하는 이슬람 성직자조차 주술과 두꾼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심지어 상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21년 개봉 예정인 팔콘픽쳐스와 파자르 부스토미 감독의 함까 전기영화 <부야 함까(Buya Hamka)>  

 

오랑삔따르(Orang Pintar)라고 불리는 이들도 두꾼의 일종입니다. 두꾼이 전문직이라면 이들은 일반인으로 분류되어 우리 곁에 보통사람처럼 살고 있지만 대개 귀신도 보고 이런저런 간단한 주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죠. 말하자면 아마추어 무당이라 할까요?

 

제법 알려진 빠웡(Pawong)이란 사람들은 기우제를 지내는 빠웡 후잔(Pawong Hujan), 맹수들을 쫓고 가축들의 출산과 건강을 돌보는 빠웡 헤완(Pawong Hewan) 등으로 세분됩니다. 말하자면 두꾼의 하위 카테고리인 셈이죠.

 

꾼쩬(Kuncen)들은 꽤 독특한 포지션을 차지합니다. ‘주루꾼찌’(Juru Kunci), 즉 ‘열쇠관리자’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주로 산지기, 묘지지기처럼 신령한 장소의 관문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해당 장소나 지역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잘 아는 꾼쩬들은 미술관의 큐레이터 같은 존재입니다. 그가 가르쳐주고 설명해 주어야 비로소 깨닫게 되니까요. 물론 최근엔 주술과 관계없이 나이 지긋한 안내자를 꾼쩬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인도네시아 무속에서의 꾼쩬은 스스로 주술을 부리진 못해도 불가사의한 존재의 속삭임을 듣고서 사람들에게 언제 어디에 가면 어떤 혼령을 만나 무슨 일을 겪게 될 지를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대표적인 두꾼의 이미지는 아래 사진과 같습니다. 1925년에 찍힌 이 사진 속 남자는 표정부터 심상치 않죠.

 

 

두꾼은 귀신들과 통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무당과 비교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무당들은 ‘몸주’를 섬기죠. 신을 받지 않으면 신병(神病)에 시달리고 결국 내림굿을 통해 강림한 신이 무당에게 신통력을 줍니다. 두꾼은 모종의 술법으로 귀신들을 부립니다. 물론 그 술법이란 귀신과 영적결혼을 하거나 귀신이 원하는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두꾼이 귀신을 부리는 매커니즘은 원래 내 목숨을 바쳐야 하지만 대신 짐승의 목숨 또는 나 아닌 다른 이의 목숨을 바치니 아무쪼록 내 원하는 바를 이루어 달라는 일종의 거래 계약입니다. 모든 주술이 생명을 제물로 요구하진 않지만 본질은 그런 것입니다.

 

두꾼들이 행하는 주술 종류는 수없이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산뗏(Santet)이라 부르는 저주술입니다. 상대방에게 저주를 걸어 병에 걸리거나 나쁜 운이 깃들게 하여 종국엔 목숨을 뺏는 것이죠.

 

땀 흘리지 않고 부자가 되겠다는 야무진 야심을 이루어 주는 재물주술을 뻐수기한(Pesugihan)이라 부르는데 이 주술의 기본적 세계관은 세상의 재물이란 유한하기 때문에 내가 부자가 되려면 남의 것을 빼앗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부토이조(Buto Ijo), 뚜율(Tuyul), 바비응예뻿(Babi Ngepet) 같은 마물과 요괴들을 처방받아 이웃과 자손들의 재물을 훔쳐옵니다. 이 주술의 음습한 점은 반드시 누군가의 생명을 제물로 바친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치면 ‘차력’에 해당할 만한 일무끄발(Ilmu Kebal)이란 것도 있습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금강불괴 신체술. 도검불침의 몸을 갖게 하는 주술로 주로 두꾼이 처방해준 지맛(Jimat)이라 부르는 모종의 부적이나 신물을 소지하면 총알도 몸을 뚫지 못하고 목이 잘려도 나중에 목을 찾아 붙여 놓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실로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합니다. 실제로 물도꼬 현 대통령 비서실장이 인도네시아군 통합군 사령관이던 시절 공공연히 군 체력단련의 일환으로 이 주술이 연마했다는 기사도 있고 과거 식민지 시절 월등한 화력을 가진 네덜란드군과 맞서던 인도네시아 독립투사나 술탄국의 군대들은 대부분 일무끄발 주술을 방탄복처럼 사용했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미친 듯이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뻴렛주술(Ilmu Pelet)은 사실상 나를 버리고 떠난 옛 애인에게 복수의 일환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그래서 뻴렛주술에 걸린 상대방은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전재산은 물론 목숨이라도 내주고 날 보지 못하게 되면 종국엔 미쳐버리게 되죠. 실제로 사랑을 위한 주술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주술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뻴렛주술 말고 좀 더 가벼운 단계도 물론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매일 만나는 직원들 중엔 두꾼이 뼬렛주술을 걸어 놓은 스카프나 파운데이션, 립스틱을 사용하면서 상사의 호감을 얻으려는 여직원들도 있을 것입니다. 광산 답사 길에 거래처 현장사무소에서 내준 새까만 커피에 걸린 주술이 당신이 말도 안되는 구매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들 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몸 어딘가에 신령한 힘으로 신물을 심는 수숙(Susuk)시술도 뻴렛주술의 일종입니다. 말하자면 주술을 이용한 성형수술인 셈입니다.

 

 

대표적인 산뗏 저주술  

 

하지만 두꾼들의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꼭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거나 벼락부자가 되고 싶거나 금강불괴가 되고 싶은 조폭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두꾼을 찾는 사람들은 몸이나 마음이 아픈 사람들, 집이나 직장에서 빙의로 추정되는 불가사의한 문제를 겪는 사람들, 자꾸만 나쁜 운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무당이나 점술가, 역술인을 찾는 우리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거죠. 그런 것들이 해결하는 것이 평소에 두꾼들이 하는 일입니다. 원래 두꾼들은 인간과 사회가 겪는 영과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인 것이죠.

 

 

물론 사기꾼들도 있습니다. 상업화되어 가고 있는 세상에 두꾼들이라도 마냥 산속 움막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을 리 없습니다. 포털에서 주술관련 키워드를 쳐보면 온갖 도사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자신을 저주술의 대가 끼 삼버르뇨워(Ki Sambernyowo)라는 두꾼의 홈페이지를 소개하며 이글을 마칩니다.

 

저주술 전문두꾼들 중 왕중왕으로 1990년부터 말레이시아, 홍콩, 타이완, 네덜란드 등에까지 이름을 날리고 있는 끼 삼버르뇨워의 단골고객들 중에는 고위관리나 성공한 사업가들이 많습니다. 그는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101가지 방법의 주술을 구사할 수 있습니다. 그의 주술에 걸려 마침내 죽고 만 연예인, 관료, 정치인, 사업가들이 수천 명에 이릅니다.

 

끼 삼버르뇨워의 주술은 누구도 치유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음에 이릅니다. 더 늦기 전에 당신의 원한과 분쟁과 미움을 당장 종식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술 서비스는 상대방을 반드시 죽여드립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