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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예수 시대 로마군인들의 기관단총

beautician 2021. 2. 2. 12:06

 

인도네시아 영화를 통해 역사에 질문하다.

 

 

 

마음을 사로잡는 콜라주: 요셉 앙기 눈(Yosep Anggi Noen)의 실험적인 단편 영화 <장르 서브장르('Genre Sub Genre')에서 호수를 항해하는 거대한 종이배가 등장하는 이 장면을 통해 영화가 단지 기록물일 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응분의 영화상들을 수상한 이 영화는 동부 누사떵가라(East Nusa Tenggara) 박물관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 (Courtesy of mubi.com/-)  

 

역사를 다룬 영화들이 반드시 모두 사실을 그대로 묘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예들은 아돌프 히틀러나 그의 나치당, 개인사, 홀로코스트, 그가 독재적 권력을 휘두르며 포문을 연 제2차 세계대전 등을 다루는 많은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글을 시작하면 피할 수 없는 거센 반발과 막무가내 비판도 있기 마련이다. 사극에서 옥의 티를 찾아내길 즐기는 이들에게는 당시 시대상의 고증을 제대로 하지 못해 미흡해잔 사전준비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경우도 분명 없지 않겠지만 그런 오류가 극이 내놓으려는 메시지에 전혀 부하를 걸지도 않고 때로는 오히려 그 메시지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면 의도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고 최소한 문제삼을 부분이 아니라고 봐주어야 할 것이다. 1973년 예수의 일대기를 새롭게 해석한 뮤지컬을 영화화한 노만 쥬이슨(Norman Jewison) 감독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에서는 예수님 시대의 로마군들에게 방패와 창뿐만 아니라 기관단총까지 들려주었다. 당연히 그 시대에 없어야만 할 물건이 스크린에 등장했지만 아무도 그걸 문제삼지 않았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1973)  

 

비슷한 맥락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urious Basterds)>과 타이카 와이티티(Taika Waititi) 감독의 <조조 래빗(Jojo Rabbit)>, 독일 영화감독들의 신랄한 풍자 코미디들 즉 다핏 브넨트(David Wnendt)의 <누가 돌아왔는지 봐(Look Who’s Back)>, 쉔케 보르트만(Sönke Wortmann)의 <아돌프가 뭐 어때서? (How About Adolf?)> 등이 우리가 오늘날 감상할 수 있는 가상의 역사, 즉 대체 역사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에 비해 인도네시아 역사영화들의 목록은 상대적으로 다채롭지 못하다. 아자르 키노이 루비스(with Azhar Kinoi Lubis)의 <까르티니를 위한 연서 (Surat Cinta Untuk Kartini)>(2016년작, 영문으로는 <우체부와 까르띠니(The Postman and Kartini)>로 번역되었다) 정도가 가장 최근의 비근한 예일뿐이다. 이 영화는 국가적 여성영웅의 일생을 살짝 비틀어 그녀와 우체부 사이의 로맨스를 그렸다.

 

 

<까르티니를 위한 연서 (Surat Cinta Untuk Kartini)>(2016)

 

요셉 앙기 눈 감독은 스스로 영화광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로부터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는 인도네시아 영화들이 얼마나 지루했는지를 기억했고 언제나 편년체 식 전개에 민족주의적 유토피아 이념을 잔뜩 채워 넣어 결과적으로 식상해진 관객들이 관람 후 진정한 역사 이야기를 서로 나눌 여지도 주지 않았다고 자신의 경험과 감상을 말했다.

 

그는 2020년 6월 18일부터 12월 17일 사이 괴테-인스티투트(Goethe-Institut)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유튜브로 생방송된 ‘빙끼스(Bingkis = Bincang Kamis)란 제목의 목요 공개토론의 일부로서 인도네시아 영화사에 대해 말하던 중이었다.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다시보기를 할 수 있다.

 

그는 영화감독들이 역사책이나 아카이브 또는 인터넷에서 발견한 것들을 보다 설득력 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시키는 ‘시적 라이선스(Poetic License)’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영화감독들은 자신들만의 ‘영화적 진실’을 창조해내는 사람들이며 대중의 관심사를 적당한 장르의 영화에 실어 섬세한 디테일을 가미해 정교하게 살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앙기는 2016년 그러한 대중의 관심을 발견하여 이를 <입 좀 닥치지 ('Istirahatlah Kata-kata')>라는 영화에서 시인이자 활동가 위지 투꿀(Widji Thukul)이란 인물을 구현해 냈다. 영화 제목을 좀 더 직역하자면 <말 속에 잠들라> 정도가 될 텐데 외국 국제영화제에서 <독신, 고독, 하나의 비판(Solo, Solitude. One criticism)>이란 영문제목을 달았다. 이 영화 속엔 당시 사건이 벌어지던 1996~1997년 사이에 아직 생산되지도 않은 밴 자동차가 등장한다.

 

이에 대한 앙기 감독의 반응은 이랬다. “이건 창작영화지 다큐멘터리가 아니니까요.” 영화에 등장하는 몇몇 특정 사건들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위지가 1998년 결국 실종되기 전까지 수하르토 대통령의 신질서정권 추격을 피해 도망다니던 시기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창작해 집어넣은 가상의 사건들이라고도 덧붙였다.

 

 

요셉 앙기 눈 감독이 2016년 감독한 <입 좀 닥치지 ('Istirahatlah Kata-kata')>라는 영화에 시인이자 활동가인 위지 투꿀(Widji Thukul)로 분한 배우 구나완 마리얀토(Gunawan Maryanto). 그는 결국 신질서 정권 말기에 실종되고 만다. (Courtesy of KawanKawan Media/-)

 

영화연구가인 우미 레스타리 교수는 인도네시아 영화가 이미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여러 장르로 다양하게 재구성하여 제작해 왔다고 말한다

 

그녀에 따르면 독립전쟁이 벌어지기 전, 그리고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제조창들이 국가산업을 선도하던 1940년대부터 인도네시아 영화들은 이미 청년들의 로맨스 드라마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 등장하는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긋한 청년들은 당시 국가적인 사건이나 상황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마르 이스마일(Usmar Ismail)과 국가지원을 받는 첫 영화제작사 뻐르피니(Perfini)가 만든 영화들에서 보는 것처럼 민족적 정체성이 당시 영화들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다. 그 영화들은 영화감독의 개인적인 경험과 독립적 연구를 토대로 만들어졌지만 대체로 특정 역사적 사건을 도식적 틀에 맞춰 시각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경향을 깬 것은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연계되어 있던 예술문화단체 레크라(Lekra) 소속이었던 꼬똣 수까르디(Kotot Sukardi) 감독이 1951년에 만든 <절름발이(Si Pintjang)>였다.

 

 

<절름발이 (Si Pintjang)> (1951)  

 

이 영화는 장애를 가진 기만(Giman)이란 인물을 따라간다. 기만은 길거리 아이들 그룹에 합류하여 독립 전 일본군 강점기와 독립선언 후 식민지 회복을 꾀하는 네덜란드군의 침공에 살아남으려 노력한다

 

또 다른 영화는 영문으로 <튜베로즈 (Tuberose-네덜란드 수선화)> 또는 <Sweetness of the Night>로도 번역되는 1951년작 <맛있는 저녁>(Sedap Malam)이다. 인도네시아 첫 여성 영화감독인 랏나 아스마라(Ratna Asmara)는 다른 어린 여자에게 홀린 남편에게 버림받아 창녀가 된 여주인공 파트마(Patmah)를 조명한다. 이 영화는 일본군의 인도네시아 강점 당시 성노예 위안부의 서사를 처음 꺼낸 영화이기도 하다.

 

1951년 작 <맛있는 저녁 (Sedap Malam)>은 첫 여성감독인 랏나 아스마라(Ratna Asmara)의 작품으로 독립 전 일본군 강점기 당시 위안부가 되어야 했던 여주인공 파트마(Patma)를 조명하지만 이런 주제의 등장은 좀 갑작스럽다 (Courtesy of filmindonesia.or.id/-)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인도네시아 역사 영화들은 대체로 정권 입맛에 맞는 버전의 역사들을 소재로 삼았는데 나위 이스마일(Nawi Ismail) 감독의 <거짓말쟁이 벤야민 (Benyamin Tukang Ngibul)>(1975) 같은 B급 코미디 영화로 만들어지는 경향을 보였다고 우미 레스타리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주장했다. “이 영화는 마을 단위까지 군대를 주둔시키는 정부 정책에 대해 간접적으로 코멘트를 하고 있습니다. 벤야민은 못에서 낚시를 하다가 군화를 건져 올린 이후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에 휘말리게 되죠.”

 

 

< 거짓말쟁이 벤야민 (Benyamin Tukang Ngibul)>(1975)

 

사회개혁의 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작되는 영화 장르는 좀 더 다양해졌지만 전기영화가 여전히 압도적인 추세였다.

 

당시 많은 투자자들이 자기 선조들의 이야기가 국가 역사에 포함되기를 원했어요. 그런 영화들은 대체로 일종의 유사성을 공유했는데 영화의 구성이 밋밋하고 주인공은 언제나 영웅적인 인물이었죠. 그들을 자세히 그려내려면 상상력에 의지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그러다보니 사실상의 이야기 전개가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뭉뚱거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어요.”

 

선조와 영웅들의 수많은 우여곡절을 하나하나 찍어 편집하기보다 등장인물의 대화 속에서 이미 일어나 버린 기정사실로 만드는 것은 영화제작비를 크게 줄이는 방편인 동시에 관객들에게 큰 실망을 안기는 부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타노스의 군대가 어벤져스들과 맞붙는 마지막 대전투의 경과와 결말을, 호수가 벤치에 앉은 캡틴이 그때 우리가 타노스를 멸망시키고 세상을 구했지라는 한 마디로 줄여버리면 제작비 수십, 수백억 원은 분명히 절약되겠지만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거대한 스팩터클 영상을 기대했던 관객들도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갈 테니 말이다. 아무튼……

 

 

<알키사의 소동 (Hiruk Pikuk si al-Kisah)>(영문제목 - The Science of Fictions)  

 

2018년 자카르타 인터내셔널 다큐멘터리 및 실험영화 페스티벌(2018 Jakarta International Documentary and Experimental Film Festival (Arkipel))을 큐레이션한 앙그라에니 위디아시(Anggraeni Widhiasih)는 앙기의 가장 최근작인 <알키사의 소동 (Hiruk Pikuk si al-Kisah)>(창작의 과학- The Science of Fictions이란 영문제목이 달린 2019년작)이 시청각 매체를 이용해 역사적 사료들과, 그 사실과는 사뭇 다른 선전을 온통 저글링하듯 뒤섞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가적 기억즉 국민들이 집단적으로 갖게 된 특정 기억이 정말 진실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스페셜 맨션 어워드(Special Mention Award)를 수상하고 2019년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는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이 색다른 코미디는 역사적 사건들, 개인적 회상, 그리고 오늘날 허위정보로 가득찬 시대에 영상물의 힘을 입증한 시청각 재구성 등을 탑재하고 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뉴스보도보다는 영화를 참조하는 편이지만 오늘날 참고할 만한 시청각 자료들은 영화 말고도 얼마든지 널렸습니다. 역사를 소개하는 주된 방식은 이제 오늘날 역사가들이 집ㅎ필하는 역사기록과도 경쟁해야 하지만 사용자 즉 컨텐츠 소비자들이 동시에 스스로 컨텐츠를 생산해내는 플랫폼에서 그 역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른 이들과 실시간으로 나누는 식으로 진화해 가고 있죠.” 앙그라에니의 말이다. 결과적으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은 지속적으로 솔깃하고 있을 법한 가짜뉴스들을 동영상과 문서로 만들어내 사람들을 현혹하고 속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하겠지만 다양한 정보 소스를 갖게 된 현대인들은 거기 간단히 속아넘어가지 않을 방법과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앙기는 영화제작자가 역사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실험함에 있어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가 매우 결정적인 요소라고 덧붙였다. 미디어 리터러시란 사람들이 미디어에 접근하고 비평하고 창조하거나 조작할 수 있도록 하는 관습적 행동이나 능력을 말한다. 바로 앞 문단에서 설명한 내용을 함축한 단어라 하겠다.

 

앙기 감독의 2014년 단편영화 <장르 서브장르 (Genre Sub Ganre)>는 누사떵가라 지역의 경관을 기록한 실험적인 흑백영화로 그 해 Arkipel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놓여있지도 않은 철도를 달려 해당 지역을 가로지르는 열차와 호수 위를 항해하는 거대한 종이배가 등장하는 장면 등으로 큰 반향을 끌어냈다.

 

우리 관객들은 시청각 작품을 볼 때 이를 그냥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사실관계를 검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술전시회나 무용공연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를 감상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매우 불공평한 부분입니다. 물론 그런 예술분야들이 시대정신을 담아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영화제작자들은 관객들의 영화관람경험을 흔들고 우리 작품들을 지하 상영관이 아니라 상업공간에서 상영해 미디어 리터러시에 대한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앙기는 그렇게 덧붙였다.

 

 

 

요셉 앙기 눈 감독

 

영화나 다른 창작물에도 반드시 관련 취재와 고증이 필요한 법이지만 모름지기 그런 사료와 고증이 시나리오 작가나 영화감독이 창의력를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까마득히 모른 채 집어넣게 된 역사적, 과학적 오류는 반드시 피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오류, 예의 로마군병이 든 기관단총 같은 것은 예술의 일부이고 작품 속 섬세한 의미와 디테일들을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작가의 친절함과 용의주도함이 묻어나는 장치인 셈이다. ()

 

 

참고자료: 자카르타포스트- TERTIANI ZB SIMANJUNTAK / Sat, January 23, 2021 

https://www.thejakartapost.com/life/2021/01/22/questioning-history-through-indonesian-cinema.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