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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호러 영화의 미래 본문
예전과 선을 그은 인도네시아 호러 영화의 새 시대
이젠 인도네시아에서도 귀신만 몇 번 등장시키면 만사형통하는 호러영화의 시대는 지났다.
최근 잇단 흥행성공을 통해 호러 장르의 위상이 괄목할 만큼 높아진 것은 실감나는 캐릭터와 살아있는디테일, 충분히 숙고하고 계산된 장면들을 포함하는 시나리오가 큰 부분을 차지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조코 안와르 감독은 영화제작자가 된 이후에도 13년이 지난 후에야 호러 영화에 손을 댔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가 1981년에 보았던 <사탄의 숭배자 (Pengabdi Setan)> 원작의 프리퀄을 만드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는 영화제작에 지식이 충분히 쌓인 후에야 호러영화를 만들 엄두가 났다고 말한다. 인고의 과정을 거쳐 제작된 그의 영화 <사탄의 숭배자>는 흥행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2017년 인도네시아 영화제(FFI 2017)에서도 여러 상을 받으며 제작기술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 영화 한 편으로 인도네시아 호러 영화 장르의 위상을 한 단계 올려놓은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 호러 영화는 이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 B급 영화라는 인식을 벗어났다. 호러영화에 미학적 세련됨이 더해지면서 조코 안와르 감독은 2020년 인도네시아 영화제(FFI 2020)에서 <지옥의 여인(Perempuan Tanah Jahanam)>으로 영화제 사상 최다인 1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어 7개 부문을 수상하며 자신의 기량과 높아진 호러영화의 위상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1990년대 인도네시아의 공포영화는 저속한 에로 장면들을 남발하는 밋밋한 스토리에 내미는 귀신들조차 재고가 충분치 않았으나 이젠 그런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예전에 <켜지지 않는 바이올린(Biola Tak Berdawai)>의 조감독 경력을 가진 조코 안와르 감독은 예전엔 호러 장르가 카스트 계급사회의 불가촉천민 같은 위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조코 안와르 감독은 <사탄의 숭배자>를 제작한 이래 더 이상 저급한 수준의 호러 영화를 제작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호러영화 장르를 존중받는 장르로 만들겠다는 맹세하고 실천하는 중이다.
조코 감독이 판단하는 인도네시아 호러 영화의 두 가지 약점 중 하나는 빈약한 시나리오다. 예전 사람들은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귀신이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시나리오의 창의성을 한정지었다. 또 다른 약점은 인물설정 역시 빈약하다는 것이다. 만약 등장인물의 성격설정이 충실치 않아 관객들이 그 등장인물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호러영화가 무서워질 수 없다고 조코 안와르 감독은 주장한다. 호러영화를 만들 때 등장할 귀신의 종류만 신경쓰는 것이 아니라 각 등장인물들의 사고방식과 능력, 감정 등을 중시하여 인물들을 설정하고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출신과 배경은 물론 성격이 분명히 설정되어 있고 철저히 계산하여 준비된 각 장면들은 충분한 개연성을 갖춰 이전의 다른 호러영화들과 차별성을 보인다.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몰고가는 방법도 충분히 숙고되어야 한다. 갑자기 귀신 얼굴을 들이밀어 관객들을 놀래키는 점프스케어(jump scare) 장면들에 의존하지 않고 영화상 설정과 관련 장면들을 통해 무서운 분위기로 접어들어야 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관객들 역시 귀신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충분히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젖어 들어 있어야 한다.
영화 <다누르(Danur)> 연작 역시 비슷한 기조를 가지고 있다. 아위 수리야디 감독(Awi Suryadi) 역시 인물과 스토리 설정을 통해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프릴리 라두쫀시나(Prilly Latuconsina)가 여주인공으로 열연한 이 연작영화는 2017년 첫 작품부터 270만 명 넘는 관객을 모았다.
뻴리타 하라빤 대학교(Universitas Pelita Harapan)의 자유예술학부 교수이자 '복수의 이름으로: 인도네시아 전쟁영화의 진면목(Atas Nama Dendam: Wajah Narasi Film Laga Indonesia)’이란 책을 쓰기도 한 영화평론가 F. 파울 헤루 위보워(film F. Paul Heru Wibowo)는 신질서시대나 개혁시대(2000~2016)에 만들어진 호러영화들에 비해 최근 3~4년 간 제작된 호러영화들은 대체로 미학적, 예술적 측면들이 많이 강조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특히 영상 테크닉과 스토리의 전개방식에서 그런 측면이 더욱 두드러진다. “영상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영화제작과정에 사용되는 카메라들은 일반 범용 카메라가 아니라 매우 값비싼 장비들이 사용되었고 그 카메라를 운용하는 사람들 역시 충분히 훈련되고 오랜 경험을 쌓은 전문가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CGI (computer-generated imagery 컴퓨터 기반영상처리) 기술이나 애니메이션, 특수효과 등이 이미 호러영화와 접목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흑마술여왕(Ratu Ilmu Hitam)>이나 <악마가 낚아채기 전에(Sebelum Iblis Menjemput)> 등의 영화들이 대표적인 예죠.”
헤루 교수는 내용 전개에 있어서 인도네시아 호러영화 제작자들이 꾼띨아낙이나 뚜율, 뽀종, 흑마술의 결과물인 요괴 등 토착 귀신들을 등장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사고를 하게 된 용기를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제작된 호러 영화들은 공포의 새로운 얼굴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그런 전국구 귀신들을 등장시키는 대신 <람뽀르(Lampor)>처럼 전국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특정 지역의 괴담이나 <다누르>처럼 특정 개인이 겪은 초자연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발돋움하고 있는 영화들은 다 이상 귀신에 대한 이야기만을 담지 않은 호러 영화들을 포함하지만 <지옥의 여인>처럼 좀 더 소름끼치는 상황을 내포한 심리적 공포를 담은 영화들입니다.” 헤루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결국 지난 수십 년간 인도네시아 호러 영화 장르를 지배하고 있던 ‘악마적 공포’, 즉 종교적인 악, 인간을 파괴하려는 영적 존재, 즉 귀신들을 절대적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하는 기조에서 무시무시한 인간들을 조명하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2020년 흥행영화들을 살펴보아도 ‘악마적 공포’를 전면에 깔고 있는 호러영화가 아직도 인도네시아 영화계에서는 수적으로 압도적 우의를 점하고 있다.
이제까지 언급한 <사탄의 숭배자>, <다누르>, <지옥의 여인> 등의 성공에 힘입어 영화제작자들은 호러 영화의 잠재력을 새삼 확인했고 MD 픽쳐스는 <다누르> 연작 시리즈는 하나의 영화적 세계관을 형성하면서 다른 영화사들과의 합작, 또는 단독으로 여러 프랜차이즈 영화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MD 픽쳐스는 호러 영화 제작에 좀 더 많은 제작비 투입을 계획하고 있다. 아위 수리야디 감독에 따르면 MD 픽쳐스가 <다누르> 연작 각 영화에 투입한 제작비는 다른 드라마나 코미디 영화에 비해 좀 더 싸게 만들었다고 한다. MD 픽쳐스의 또 다른 공포영화인 <뻐나리 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KKN di Desa Penari)>은 2020년 초에 촬영이 진행되었는데 여기 약 150억 루피아 정도의 제작비가 투입되었다. 한화로 약 11억 원 정도. 인도네시아 로컬영화 제작비로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제작비의 상당부분이 작품가치 제고를 위해 제작과정과 시각효과를 위한 부분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2021년 1월 현재 아직 개봉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 예산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아직 확인할 수 없다. 참고로 조코 안와르 감독의 <사탄의 숭배자>(2017 라삐필름)도 고작 20억 루피아(약 1억 6천만 원)의 제작비가 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옥의 여인>을 제작한 바세 엔터테인먼트(BASE Entertainment)의 샨티 하르마인(Shanty Harmayn)은 <지옥의 여인>의 성공이 호러 영화도 제대로 만들면 거대한 잠재력을 얼마든지 현실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주장한다. 그는 호러영화를 통해서도 인류 전체의 문제 또는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고 부각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편 2017년 <사탄의 숭배자>를 만든 라삐필름(Rapi Film)의 제작자 수닐 삼타니(Sunil Samtani) 이사는 <사탄의 숭배자>가 이후 모든 공포영화들의 표준이 되었다고 말한다. “우린 감독의 역량만 보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에 주목합니다. 의구심이 드는 시나리오는 영화화되기 어렵습니다.”
최근 몇 년간 넷플릭스, 아이플릭스, 디즈니 등 OTT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들도 제휴영역을 계속 확대해 나가고 있는 가운데 헤루 교수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인도네시아 호러영화의 미래가 밝다고 말한다.
그중 하나는 인도네시아의 호러영화가 헐리우드 호러영화들에 비해 매우 다르고 독특한 작품이란 사실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더욱 적극적으로 해외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관광창조경제부를 위시한 정부를 포함해 영화산업 종사자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인도네시아 전체가 영화적 스토리텔링으로 얼마든지 각색할 수 있는 괴담과 전설들이 넘쳐나는 거대한 보물창고라는 사실이다.
“미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에 따르면 한 지역의 귀신 이야기는 그곳의 문화와 조화를 이루며 해당 공동체의 사회적 시스템과 깊은 연관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그런 괴담들은 그저 실없는 소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자연과 내세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을 담은 문화 또는 사고방식과의 연관성 측면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헤루 교수의 이 주장에 필자 역시 동의한다. 필자가 열심히 인도네시아의 괴담과 전설에 주목하는 것이 그 시작은 보다 현실적인 어떤 사건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무속과 괴담을 통해 현지 문화와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생각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꾼띨아낙 영화를 몇 번 보러 갔다가 개연성 없는 진부한 스토리 때문에 치워버렸던 사람 입장에서 최근 날로 발전하는 인도네시아 호러영화가, 그 대열 선두에 선 사람이 다름 아닌 인도네시아 차세대 명장 조코 안와르 감독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기대를 갖게 한다. (끝)
참고자료: 자와뽀스- 29 Novem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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