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

beautician 2021. 1. 21. 11:23

 

귀싸대기의 묘미는 맞받아치는 데에 있다.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꼭 풍족하지 않더리도 있는 것을 함께 나누라고 했다.

남을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고귀한 것이라고.

도움을 받는 것보다 도움을 주는 것이 더욱 보람있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그래서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마저 내어주라고....

 

 

그게 다 헛소리란 걸 깨달은 게 40대의 일이란 게 너무나 한심했다.

 

전 직장 사장은 외국어가 되지 않아 애를 먹던 중이었다.

내가 합류해 사내 회의는 물론 외부와의 모든 미팅에서 영어와 인도네시아 언어 문제를 해결해 주자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몇 달간 그는 산적했던 모든 궁금증들이 해소되자 나한테 법인카드를 만들어 주겠다, 새 핸드폰을 사주겠다 하면서  온갖 호의적 제스쳐를 했다. 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그가 나를 채용한 것은 그런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러자 그는 회사관리를 하나 둘 내게 맡기기 시작했다. 원래 내 job discription에는 없던 일이었지만 상황이 딱하고 인력이 부족하니 모두 처리해 주었다. 그에겐 며칠씩 걸리는 일이었는지 몰라도 언어가 되고 길을 아는 사람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도 아니었다. 그는 이제 점심시간 전후에 퇴근해도 될 정도로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그는 내게 매우 고마워했지만 일을 더 시키는 만큼 급여나 수당을 조정하는 등의 보상을 하지 않았고 만들어주겠다던 법인카드도, 사주겠다던 새 핸드폰도 모두 립서비스에 그쳤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딱 3~4개월 정도만 유효했던 것이다.

그가 나를 지난 해 2월 해고한 이후 막상 일이 돌아가지 않자 다시 나하테 이런저런 일들을 부탁하면서 온갖 약속을 해왔지만 하나도 지켜진 것이 없었다. 퇴직금조차도 아직 모두 정산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 사이 애써 찾은 다른 생계수단에 대해 '그런 거 다 쓸 데없는 일이니 나한테 와서 일하시오' 같은 소리를 하는데 거기서 느낀 것은 내가 해고된 후 그의 부탁을 처음 들어준 것부터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나를 그렇게 쉽게 볼 여지를 만들어 준 것이다. 몇 번이나 경험하고서도 난 그에게 호구처럼 보이고 말았다.

 

그는 지난 10월 현지상황을 엉망진창인 상태로 놔두고 한국에 돌아가 11월-12월 사이에 내키진 않지만 집문제, 차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해야 했다. 그가 차량 담보대출을 받을 때 이름을 빌려준 운전사가 해결사들에게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책임도 아닌데 왜 내가 나서서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 했을까? 운전사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그의 문제도 해결해준 셈이었으므로 그는 더욱 나를 쉽게 보게 되었다.

 

비슷한 일이 지난 2014-2015년에도 있었다.

베트남에서 활로를 찾아보던 시절의 일이다. 알던 후배와 협력해 내가 그의 현지 사업을 돕고 그는 내 정착을 돕는 식의 딜이 기본이 되었다.호치민에서 사업하는 그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하노이 지점은 골치덩어리였는데 그곳을 맡기로 했던 지인이 몇 개월만에 사업장을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3개월간 시장조사를 한 후 하노이 지점 폐쇄하도록 조언하고 해당 절차를 모두 진행해 준 나에게 그는 고마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난 사양했지만 그는 당시 자카르타로 돌아가던 나에게 이런저런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주면서 꼭 다시 돌아와 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반복되는 도움을, 도움받는 사람은 권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내 합류조건을 정하면서 '6개월 후부터 보수를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당장 지금부터 적은 금액으로 시작해 6개월 후에 full로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6개월간 무료로 일해주면 그 후에 보수를 주겠다는 생각의 본심이 처음부터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때 거절했어야 하는데 그러자고 한 순간 난 또 다시 호구가 되고 만 것이다. 6개월 후 그는 당연히 보수를 주지 않으려 했고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그와의 관계도, 베트남에서 뭔가 하려던 계획도 모두 없던 것이 되고 말았다.

 

내가 누군가 나한테 고마움을 느낄만한 일을 해주었다면 반드시 그에 대한 당연한 댓가를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걸 허허 웃으며 뭐, 그런 일로 고마워 해~ 이런 멘트를 날리는 순간 내가 그에게 해주었던 모든 노력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리고 상대방은 나에게 그 이상의 일을 기대하고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공짜로.

 

왼뺨을 맞고서 오른뺨을 내주는 호구가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귀싸대기를 맞는 순간 상대방에게도 귀싸대기를 날리지 않으면 그 순간 호구가 되는 거다.

 

 

 

뿌지(Puji)는 20년 쯤 전에 만났을 때엔 골프용품 수입판매를 하던 한 한국인 사업가 밑에서 열심히 일하던 마케팅 직원이었다. 오랜 후 다시 연락이 닿았을 때 그녀는 결혼하여 찔레곤으로 내려가 작은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 첫 연락이라는 것이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적지 않은 금액을.

 

사실 인생 막장에 여러번 처해 봤던 나로서는 그 심정을 잘 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오래 전에 연락이 끊겼던 사람에게 무턱대고 연락을 내 돈을 빌려달라는 심정을 말이다. 게다가 떄마침 당시 그 달엔 일시적으로 돈에 여유가 있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보내주었다. 돌려받을 생각도 없었다. 내가 그런 연락을 내던 시절의 절박한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이후에도 뿌지는 계속 도와달라 요청했고 4~5차례 돈을 보내준 후 비로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뿌지는 날 호구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수십 차례 돈을 빌려달란 요청이 있었지만 난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연말 또 다시 부탁을 받고 연말에 선물을 보낸다는 생각으로 또 한번 송금을 해주었다. 그리고 뿌지는 내가 호구라고 더욱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월이 되자 또 다시 엄청난 문자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3백만 루피아를 요구하더니 조금 있다가 자기가 백만 루피아 있으니 2백만 루피아만, 나중엔 60만 루피아만이라도 보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팬데믹의 와중에 난 그럴 여유도, 그럴 이유도 더 이상 없다 

게다가 그동안 여러차례 돈을 빌렸던 그는 늘 다음 번엔 돈을 갚겠다고 하면서도 그건 그냥 말로 그치고 만다. 전 직장 사장이 말하던 법카나 핸드폰처럼, 베트남 후배가 약속했던 그 빌어먹을 보수처럼 말이다.

 

뿌지가 어려운 상황이란 건 충분히 이해한다. 코로나 상황에서 지금은 더욱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사이 단 한번만이라도 스스로 노력하는 제스쳐를 보였다면 난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좀 더 도우려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호구로 본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 그런 관계는 영원히 끝나고 마는 것이다.

 

 

난 더 이상 '착한 사람,' '친절한 사람' 이란 위상이 싫다.

날 만나는 사람마다 하는 '정말 선해 보이시네요' 이런 멘트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호구짓은 이제 끝이다

 

 

2021.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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