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강당 앞 긴 계단의 추억

beautician 2018. 6. 10. 10:31

 


중학시절 내게는 두 명의 영웅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깜찍한 자태를 뽐냈던 루마니아의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였어요. 오랜 시간이 지나 동구권의 철의 장막이 무너진 후 미국에 온 훨씬 나이 들고 살이 통통이 오른 코마네치의 모습을 그 후 TV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나는 그녀를 76년 당시의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처음 느꼈던 감정은 연민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 길고도 길었던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배워왔던 공산주의에 대한 교육이 그런 감정을 부추겼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배출해 낸 걸출한 체조영웅들. 그러고 보니 한국계 넬리 킴도 그 당시 소련 올림픽대표 체조선수였죠. 고문당하거나 맞아 죽지 않기 위해 저만큼 되기까지 죽을 힘을 다해 연습했겠지...라며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으니 그 당시 내 사고의 메커니즘은 너무나도 단순했고 체제순응적이었습니다. 옛날 서커스단에서 아크로바트를 하는 소녀들에게 억지로 식초를 먹여 뼈를 부드럽게 한다는 허황된 얘기가 돌았던 것을 사실이라 믿고 분개하면서 완장을 찬 공산당 간부들이 어린 체조선수들에게 강제로 빙초산을 먹이는 장면까지 머리 속에 구체적으로 그려보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전혀 아무런 힘든 내색도 없이 평균대 위에서, 또는 뜀틀 출발선에서 천사같은 미소를 띄고 있는 모습이 내심 무척 애처롭게 느껴졌고 그래서 당시 체조 종목 금메달을 모조리 휩쓴 코마네치의 선전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고 그 후 골수 팬이 되고 말았죠.

 

나의 또 한 명의 영웅도 코마네치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덕호는 수업시간이면 교실 맨 뒷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곤 했습니다. 그는 어디선가 되게 얻어맞은 적이 있는 듯 콧등 한가운데가 움푹 내려 앉아 있었고 턱 밑에는 칼자국 같은 작은 상처들이 몇 개씩이나 새겨져 있었습니다. 가끔 그 웅크린 자세로 앞을 올려다 볼 때면 그 만만찮은 반항적 기질도 감지할 수 있었고 감당하기 힘든 야수 같은 사나움이 문득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것 같이 바짝 메마른 목소리까지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살벌무쌍하게도 당시 친구들은 그를 '칼잡이라 불렀어요. 하지만 그건 '구미 쌍칼', '방배동 휘발유' 같은 양아치적 별명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명 칼잡이였어요. 덕호는 학교와 검도부의 영웅으로 소년체전과 각종 검도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어 오곤 했던 것입니다.

 

죽도를 삐죽이 끼워 넣은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오전수업이 끝나면 검도부 도장으로 쓰이던 언덕 위 강당으로 이어진 넓은 돌계단을 어슬렁어슬렁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은 학교 주변을 배회하던 양아치들이나 동네 깡패들을 무척이나 닮아 있었고 어느 날 운도 지지리 없던 옆반 짱이 싸움을 걸어오던 것을 주먹 단 한 방에 날려버릴 만큼 그쪽 방면으로도 전도양양 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검도 외에는 별다른 관심사가 없는 듯 했고 전혀 거들먹거리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친구들과 어울려 온갖 장난을 함께 치는 악동이자 호쾌한이었습니다. 거칠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지극히 섬세한 감수성에 심지어 착한 심성도 가지고 있었다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불가사의라 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런 덕호가 코마네치 사진을 오려 책갈피에 끼우고 다닌다는 것은 정말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다시 강당으로 올라가려고 책상을 정리하던 그의 책갈피에서 몇 장의 사진들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던 거에요. 길가에서 파는 카드 크기의 코마네치 브로마이드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의 한 클릭 우전방에 앉아 우연히 몸을 틀다가 그가 허둥대는 모습을 처음 본 나도 깜짝 놀라며 사진들을 함께 수습해 주었는데 내게 비밀을 들켰다고 생각한 덕호는 귓볼까지 빨개지며 민망해 했지요.

 

운동선수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단 말이야.”

 

덕호는 그렇게 말하며 얼버무리려 했지만 강당까지 따라 올라가며 코마네치 이름이 무수히 등장하는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눈 후 어느새 우린 둘도 없는 더욱 친한 친구가 되어 갔습니다.

 

 

청소당번이 되어 교실청소를 마칠 때쯤이면 덕호의 검도부도 연습이 끝날 시간이었습니다. 강당은 중학교동과 고등학교동을 사이에 둔 운동장 한쪽 끝 높은 언덕 위에 있었고 강당과 운동장은 긴 석재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난 청소당번이 아닌 날에도 가끔 그 계단에 앉아 덕호를 기다리곤 했는데 3학년 선배들이나 고등부 선배들은 천상 범생 자투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내가 덕호와 친하게 지내는 걸 무척이나 의아해 하는 듯 했습니다. 아마도 검도부에서는 덕호도 무척 터프했던 모양이고, 그랬으니 거의 무패에 가까운 높은 승률을 쌓을 수 있었겠죠. 검도 명문이었던 우리 학교의 검도부는 그 군기가 엄청 쌨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강당 계단에서 덕호를 만나는 것이 거의 매일의 일과처럼 되어버린 것은 그 해 겨울로 접어들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강당을 호젓하게 감싸고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잎사귀를 모두 떨구고 이제 문밖에만 나서면 입김이 폭폭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던 시절에도 난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늦어지는 덕호의 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리곤 했고 때로는 먼저 연습을 끝낸 덕호가 기다려 주기도 했습니다.

 

훤칠한 키를 하고서 어깨근육이 드러나도록 앞으로 웅크린 자세로 차가운 강당 계단에 철퍼덕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다가 청소를 끝내고 찾아오는 내게 멀리서부터 씩 웃으며 손을 작게 흔드는 그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 당시 그는 이미 어른 티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웃는 모습은 주먹다짐 직전처럼 사뭇 험악하게 일그러진 평소의 표정과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그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웃곤 했는데 분식집에서 학교와 검도부, 그리고 코마네치에 대한 얘기들을 하면서 그는 언제나 그런 웃음을 웃곤 했습니다.

 



그러던 덕호의 시련이 시작된 건 중3이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그가 소년체전 서울대표에서 제외된 건 나이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출전권이 없다는 통보를 받던 날, 그는 세상이 끝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이나 가족들 얘기를 거의 입에 담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도 그 날이었어요. 예의 그 강당계단에서 그는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히 얘기했습니다.

 

그에게 두 살 위의 형이 있었습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고 만 형은 부모님 마음에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겼겠죠. 특히 첫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절망은 무척이나 깊었고 곧 알코올 중독과 성격파탄으로 이어졌던 모양입니다.

 

"남들보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게 2년쯤 늦었어."

 

덕호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어린 시절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는 그의 아버지를 난 한 번도 뵌 적이 없었습니다. 덕호가 마땅히 학교에 들어가야 할 나이에도 그의 아버지는 깊은 상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겠죠. 그가 또래들보다 나이가 좀 많은 것 같다는 것은 그의 어른스러움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소년체전 출전에 걸림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 배후에 그런 가정사가 있다는 것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콧등과 턱의 상처들도 검도를 시작하기 오래 전부터 달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그의 얘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 말하는 덕호도 듣던 나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품고 있던 삶의 열정과 검도에 대한 열망이 더욱 처연하게 느껴졌습니다.

 

"난 검도만 생각하고 살고 싶은데..."

 

하지만 그는 그 후 졸업할 때까지 거의 아무런 대회에도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나이제한 때문이었겠죠. 그러나 그는 3학년 내내 밤늦게까지 도장을 떠나지 않고 죽도를 휘두르며 더욱 연습에 열중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이젠 그런 제한 없이 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런 잡념을 떨쳐버리려는 몸부림이었을까요? 방과 후 강당 계단에서 덕호와의 만남은 그 후로 뜸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린 무슨 대단한 계획이라도 세우는 듯 틈틈이 진학과 진로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물론 덕호는 검도 국가대표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난 소설가나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요. 덕호는 스카웃 손길을 뻗쳐오고 있던 검도명문 학교들을 거론하며 진로 문제들 얘기했고, 그러나 그런 현실적인 얘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덕호가 그렇게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어 저 앞으로 달려가는 동안 영원히 어린애로 남아 뒤쳐지고 말 것 같은 왠지 모를 열등감을 느끼며 나 같은 비특기자는 뺑뺑이가 진학과 운명을 결정해 줄 거라고 자조하곤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덕호의 어머니를 처음 보았지만 그 얼굴이나 분위기를 이젠 전혀 기억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날 끌어안으며 기뻐하던 덕호의 상기된 표정은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는 검도명문인 서울 북공고로 스카우트 되었고 난 당시 아직도 신문로 경희궁에 있던 서울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뺑뺑이의 결과치고 나로서는 감지덕지한 일이었어요.

 

당시에도 체육특기생 스카웃에 거액의 계약금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자신의 꿈을 고등학교에서 맘껏 펼칠 수 있게 된 덕호를 나는 진심으로 축하했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헤어지게 됨을 못내 아쉬워 하면서요 하지만 꼭 서로 연락하고 곧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덕호를 다시 만난 것은 고3 진급을 앞두던 시절이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한동안 곧잘 주고받던 전화통화가 뜸해지더니 언젠가부터는 거의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중학시절 이후 줄곧 살고 있던 남가좌동의 우리 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저녁 덕호가 느닷없이 우리 집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시종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지만 무척 초췌하고 기운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의 목소리에서도 예전의 자신감이 사라져 있었어요. 빵집에서 마주앉았을 때 나는 그토록 절친했던 덕호를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자신을 나무라며 그의 근황을 물었습니다. '요즘도 검도로 메달 많이 따고 있니?' 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물은 것을 금방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 요즘 검도 안해..."

"!?"

 

그가 검도를 그만 둔 것은 반년쯤 전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3시절 시작된 그의 불운을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북공고 검도부 군기가 아무리 엄청났다 해도 강인한 그가 견뎌내지 못했을 리 없고 시작부터 시합성적이 나빴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당시 자신의 몸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이미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뿐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허교길에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실려가서야 정신을 차렸어. 사람들 하는 말이 내가 사지를 뒤틀고 입에 거품을 물더래...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정신을 못차리고 눈을 뒤집어 까구..."

", 그거 혹시...?"

 

간질이라는 것이 그토록 건강하던 덕호에게 발병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시의 간질은 불치병으로 인식되고 있었어요.  덕호의 집은 여유 있는 형편도 아니었으므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얼마 후 도장에서도 똑같은 증세로 다시 정신을 잃었고 검도부에서는 그를 퇴부시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자격증을 따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선생님 말씀이 요즘은 자격증 시대라 자격증만 여러 개 따두면 졸업하고서도 취직하는 데 문제가 없데. 벌써 가스용접기사 자격하구 몇 개를 땄어."

 

멋적은 미소를 지어가며 그렇게 말하는 덕호의 한마디 한마디가 안타까움이 되어 비수처럼 내 마음을 헤집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 그의 낙담과 충격을 헤아리자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옵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난 친구의 불운을 대할 때 얼간이처럼 제대로 된 위로의 말 한 마디 해주지 못했습니다. 자꾸 갈라지는 덕호의 메마른 목소리를 들으며 점점 더 슬퍼지는 마음을 스스로 껴안고 덕호에게 들키지 않으려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었죠.

 

얼마 길지 않았던 오랜만의 만남을 마치고 헤어지면서 덕호는 오히려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꼭 서울대에 가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예의 어슬렁거리는 발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덕호의 뒷모습이 그날은 그렇게도 서글퍼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나는 덕호를 또 잊고 말았습니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6.25 전쟁 당시 하나님과 세운 약속을 지키겠다며 신학교로 돌아가 목사가 되면서 우리 집안은 경제적으로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필 그때부터 철들기 시작한 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생활 자체를 버거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난 서울대에 가라던 덕호의 당부도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등록금을 낼 형편이 못됨을 충분히 알고 있던 난 서울대 농대에 지원하라며 집요하게 종용하던 담임선생님을 뿌리치고 내 학력고사 점수에 학비면제 조건을 내건 외대를 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제 막 나의 대학생활이 새롭게 펼쳐지려던 시기에 덕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아무런 통보 없이 캠퍼스에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미 우리가 전에 살던 집에서 사당동으로 이사를 나왔으므로 덕호는 아마 내 고등학교에 연락해서 내가 진학한 대학을 알아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눈부신 흰색 해군 수병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영장이 나와서 학교를 그만 뒀어."

 

학교 앞 다방에서 그는 여전히 담담한 말투로 그의 근황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의 불운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3시절, 연기하려면 얼마든지 입대를 연기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을 텐데 덕호는 굳이 자퇴와 군입대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자포자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애쓴다던 그가 고교 졸업장을 포기하고 자퇴서를 냈을 때 앞으로 사회가 저학력의 그를 얼마나 냉대할 것인지를 남들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고 현실적이었던 덕호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될 데로 되라는 심정이었을까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해군도 영장을 받고 입대하는 것인지 자원하는 것인지 아리송합니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 학교를 그만 두고 자원입대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밀어붙였던 것일까요? 어느 정도의 절망이, 어느 정도의 절박함이 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자포자기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 그건 정말 자포자기였을까요?

 

그는 이미 몇 차례 군함을 타고 출항했었다고 하며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 한 복판에서 느꼈던 것들을 마치 시를 읊듯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래도 시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군복은 그에게 아주 멋지게 어울렸습니다. 하지만 그 흰색 군복에도 어딘가 서글픔이 묻어 있는 듯 했어요.

 

"그동안 그... 발작은 없었어?"

 

그는 신체검사를 이상 없이 통과했고 입대 이후 아직까지 한번도 발작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간질이 그런 식으로 자연적으로 치유될 수도 있는 건지 의아했습니다. 아니면 언젠가 재발하기 위해 몸속 어딘가에 숨죽이고 잠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죠. 그것도 아니라면 덕호를 절망케 했던 그 증세는 애당초 간질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안정적일 것만 같았던 그의 인생 항로가 그 일련의 발작으로 완전히 뒤틀려 버리던 시절, 덕호는 병원에서 그 증세에 대한 정밀검사를 전혀 받지 않았던 것이라는 생각이 이제 와서 듭니다. 당시 덕호의 운명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마구 내둘러 쳐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검도는...?"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검도는 그의 인생이자 꿈이었죠. 이제는 늠름한 수병이 되어 있는 덕호였지만 그 질문을 들었을 때 예의 빙그레 미소짓던 그는 실제로는 팔다리가 절단된 사람처럼 참담한 심정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덕호는 그 대답만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덕호는 그 후 다시는 내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가끔은 함상에서 발작을 일으키는 덕호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건설현장을 지날 때면 철골 구조물 저 높은 어딘가에 가스용접기사 자격증을 가진 덕호가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젠 그 험악한 인상과 강한 주먹, 그리고 예의 경쾌한 칼솜씨를 가지고 어느 뒷골목 조직의 거물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망상까지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가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은 애써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제 그의 불운이 충분히 그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음에도 난 자꾸 불길한 쪽으로만 생각의 갈래가 뻗쳐 갑니다.


그러나 그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떠오르는 것은 중학교 교정 강당 앞 긴 계단에 앉아 있던 덕호의 어른스런 모습과 손을 흔들던 그의 입가에 번져 있는 예의 정겨운 미소입니다.

 

덕호야 잘 있니... ?

정말 잘 살고 있어야 한다. 인마.

 

 

이미 강산이 몇번이나 변한 옛날 일이지만 88년 서울올림픽이 다가오던 당시, 한국 국가대표 검도선수를 꿈꾸던 덕호를 떠올리며 부대 BOQ에서 하릴없이 끄적였던 가사 하나를 덧붙이며 이 글을 맺습니다.

 

강당 앞 긴 계단에서 나를 맞던 미소

 

오래 전 잊혀진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낡은 사진 속의 추억처럼

잊혀져 가는 너에게.

 

네가 내게 베푼 우정을 나는 잊지 못한다.

강당 앞 긴 계단에 앉아

나를 맞던 네 미소도

 

어디에 있든 소식 전하렴

검도에 인생 걸던 나의 친구야

예전처럼 다시 이야기 나누자.

바다로 떠나간 나의 친구야

 

(중략...)

 

너의 슬픈 이야기는

오래도록

추억 속을 맴돈다.

 

그 슬픈 이야기는 오늘도

너의 늙은 아버지 마음에도...

 

 

 

2013. 11. 21 (R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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