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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캄보디아에서 짐을 찾아 달라던 미군

beautician 2018. 6. 13. 10:00



어쩌다가 Marina Gendruau라는 미군 병장이라 주장하는 여자를 페이스북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 속의 여인입니다.



그녀는 시리아에서 평화유지군으로 근무하고 있는 미군이라면서 페이스북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리하여 약 2주간 동안 또 다른 신천지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당시 시리아 내전은 많은 사상자를 내는 중이었으므로 그곳에서 근무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게다가 간호원으로 일한다고 하니 더욱 존경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연락이 오가면서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첫 번 째는 그녀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과장해서 표현한다는 것이었어요.

간호원이라면 환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다가 실패하면 좌절하기도 할 것이라 이해됩니다.

그런데 마리나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 한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어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의 위생병도 아니고 군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원이 죽음의 위험에 그렇게 드러나 있는 것인지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배경은 내전 중인 시리아.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 군 간호원들, 특히 여성 간호원들은 대부분, 아니 모두 간호'장교'라고 생각했는데 병장으로서 간호원으로 일한다는 것도 좀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미군이고 시리아이니, 거긴 내가 모르는 일들이 수두룩 할 터였으니까요.


그런데 또 하나 이상한 점은 패트롤을 나가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강조하는 것이었어요.

그녀는 패트롤 중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참 이상했어요. 군 간호원이 왜 패트롤을 나가는 걸까요?

전투부대를 따라 나서는 2차 대전 당시의 군위생병을 떠올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Marina Gendreau라는 미군 병장 여군 간호원이라고 주장하는 이 사람이 사실은 저 그림 속의 인물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사람 머리 속에 이런저런 정보가 섞여 뭔가 단단히 착각한 상태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 그림은 그녀의 페이스북에 있던 사진에서 찍은 것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실제로 Gendreau 였고(군복 이름표엔 성만 있었으므로 이름이 마리나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미군 병사인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을 타고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갑자기 주인공의 얼굴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성형수술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페이스북을 운영하던 사람이 예전에는 다른 사람으로 활동했던 것일까요?


매우 이상한 일이었지만 난 처음엔 그다지 개의치 않았습니다.

내게 말을 거는 저쪽의 마리나 겐드로는 내게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않았으니 그녀가(또는 그가) 거짓말을 한다 해도 대수로울 것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난 계속 말을 받아 주며 별다른 의심의 표식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어느날 그녀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짐이 캄보디아에 있는데 거기 매우 고가의 물건(그 의미하는 바는 현금인 것으로 보였는데)들이 들어 있고 자긴 시리아에서 받을 수 없으니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대신 받아 달라는 것이었어요.


이런 구도를 예전에도 많이 접한 바 있습니다.

난 별별 경험을 다해본 사람이에요.

예전 아프가니스탄전, 이라크전이 한창일 당시에도 이런 제안을 하며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군인이거나, 정치가의 가족이거나 회개한 대형 사기단 단원이거나 뭐, 그런 부류의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습니다. 그들은 고가의 물건을 대신 보관해 달라 요구하면서 이를 위한 수속에 필요하다며 내 민감한 개인정보나 적잖은 수속비를 먼저 요구하곤 했습니다.  너무 뻔해 보이는 그 수법에도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리나가 그와 똑같은 수법을 쓰며 나선 것입니다. 겐더로는 물건값의 30%인 45만불을 수수료로 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 요구를 한 사람이 마리나 당신이 처음이 아니에요. 당신이 정말 마리나인지, 또는 마리오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건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소."


결국 난 이런 회신을 해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이틀쯤 지나자 그녀의 페이스북 계정이 사라졌습니다.

여러 번 검색해 보았지만 계정을 삭제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겐드로'라는 진짜 당사자는 그런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이 있었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저 위의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그녀의 사진은 분명 도용되었던 것이었고요.

저 그림을 보고도 당시 상대방은 자기를 그린 것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른 소리를 하고 있었죠. 

그때 이미 이 사람이 도용한 아이디를 쓰고 있는 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터넷이란 예나 지금이나 익명의 방패 뒤에 숨은 사람들이 온갖 거짓말을 하는 위선의 바다이고 우린 그 위에서 서핑을 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어쩌면 다들 조금씩은 '과장'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사진을 보정, 수정해서 원본과는 사뭇 다른 풀픽을 내놓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 거짓말장이들 중엔 정말 악당들이 섞여 있기도 하고 자칫하면 당신의 등에 비수를 꼽게 되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저 마리나 겐더로를 가장한 악당 역시 그런 위험한 인간들 중 한명이었을 거고요.



2018.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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