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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막스 하벨라르

내부고발자가 정상급 필력 보유하면 생기는 일.

beautician 2019. 8. 26. 11:00


내부고발자가 정상급 필력 보유하면 생기는 일.

 



 

국내 모신문 통신원으로서 1969년 대의원 투표를 거쳐 인도네시아에 합병되었지만 적잖은 현지인들이 강점당한 것이라 주장하며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서파푸아 전역에서 지난 독립기념일 주말인종차별 폭력을 계기로 발생한 폭동에 군경이 출동해 벌어진 유혈사태에 관해 보낸 후속기사가 데스크에서 잘리는 것은 적도 너머 먼 나라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든 그게 한국 독자들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판단 때문입니다.

 

그런 매커니즘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막스하벨라르>와 저자 에두아르트 다우어스 데커르 선생 이름을 새삼 꺼내려는 건 참 뜬금없는 일입니다. <막스하벨라르>1860년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출간된,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 총독부의 실정과 이에 편승한 토호들의 가혹한 수탈을 유럽사회에 까발린 고발소설입니다. 영미문학에 익숙한 우리들이 160년 전 네덜란드어로 쓰인 이 문학작품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어림 반 푼어치라도 있는 걸까요? 더욱이 위도상으로나 경도상으로나 네덜란드나 인도네시아나 대체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오래전에 기획되어 동남아학에 정통한 한국외국어대학교 양승윤 명예교수를 중심으로 2016년말에 꾸린 번역팀을 통해 3년간의 작업 끝에 올해 7월 한국어 완역본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세상엔 사람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분야에 혼신의 노력과 시간을 갈아넣는 꼴통들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물타뚤리'라는 필명을 쓴 데커르 선생이나 당시 동인도 각지에서 식민정부 관료로 성장해 반뜬주 부지사로서 선정을 베풀려 했던 막스하벨라르 역시 많은 면에서 꼴통이라 불려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주류세계와 분명한 금을 긋고 있는 꼴통들과 동인도 역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막스 하벨라르>의 배경이 되는 1840년대에는 동인도 전역에서 네덜란드에 대한 반란이 거의 끝나가던 시기였습니다네덜란드는 당시 람뿡에서 벌어진 농민군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중이었고 수마트라 북부 메단아쩨 지역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발리 왕국들을 대상으로도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의 네덜란드 총독부는 물론 본국 재정마저 파탄낸 디포네고로 전쟁이 10여년 전 그 막을 내린 상태였어요

 

네덜란드군이 디포네고로군에게만 집중하기 위해 동인도 전역의 모든 반란군들과 휴전을 맺었다는 사실이 당시 디포네고로 전쟁의 치열함은 웅변합니다. 1825년 자바 전쟁 발발 초기에 네덜란드군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패했고 디포네고로군의 위세는 총독부가 있는 바타비아까지 위협했습니다네덜란드는 더 이상 지방세력들의 군소반란에 매달릴 여유가 없을 만큼 디포네고로군에게 밀리고 있었으므로 전황을 뒤집기 위해 가용한 모든 병력을 자바섬으로 소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심지어 네덜란드 본국으로부터도 추가 파병을 받았습니다네덜란드의 동인도 식민지 강점은 이때 그 종말을 고할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중반을 지나며 네덜란드 식민지군 총사령관 헨드리끄 머르쿠스 드콕 장군(General Hendrik Merkus de Kock)이 벤뗑 스텔셀 전략(Strategy Benteng Stelsel)을 도입하는데 ‘요새 시스템 전략’ 정도로 번역될 만한 단어입니다. 점령지역에 신속하게 간이 요새를 세워 해당 지역을 영구적으로 확보하고촘촘히 구축된 요새망 사이에 통신로를 기민하게 운용하여 각 지역 반군들을 분할, 격리시키고 궁극적으로 역외로 몰아내거나 섬멸하겠다는 것이었죠이 전략이 성공을 거두면서 디포네고로군은 마침내 수세로 돌아섭니다그런데 그 성공의 이면에는 천문학적인 전쟁비용 지출이 있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요새 시스템을 운용하면서 자바섬 일대에 300개가 넘는 요새를 건설한 것입니다결국 총독부는 물론 네덜란드 본국의 국고마저 거덜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1830년 드콕 장군이 휴전협상을 빌미로 불러낸 디포네고로 왕자를 마글랑에서 나포하면서 5년간의 자바전쟁은 마침내 그 종지부를 찍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로서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신속히 메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그래서 식민지를 더욱 본격적으로 쥐어짜기 시작하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강제경작제도’(Cultivation System=Cultuurstelsel)라는 정책입니다.

 

바타비아 신임총독 요하네스 반덴보쉬(Johannes Van Den Bosch)가 도입한 이 제도로 인해 농부는 자기 농지의 5분의 1을 할애해 설탕커피인디고 같은 환금작물 제배해야 했고 농지가 없는 주민들은 1년의 5분의 1을 정부 토지에서 노역해야만 했습니다좀 더 손이 많이 가는 작물임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벼를 경작하는 정도의 비용만을 지불했고 그나마 판매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윤은 나누어 주지 않으면서 비용이나 흉작에 대한 책임은 모두 농부에게 지웠습니다심지어 세금을 낸 농부들이 강제노역에도 거푸 동원되거나 비용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례도 빈번했습니다자바인들은 자기 농지를 관리할 틈도 없이 환금작물 재배에 강제동원되어야 했으므로 강제경작제도가 시행되던 40년 동안 몇 번씩이나 혹독한 기근이 자바를 휩쓸어 엄청난 아사자들이 속출했습니다. 3모작이 가능한 천혜의 땅 자바에서 말이죠네덜란드는 그런 식으로 디포네고로 전쟁에 대해 처절하게 보복했습니다.

 

1840년대 서부 자바의 반뜬과 르박수마트라의 나딸과 빠당 등을 그 무대로 하는 <막스 하벨라르>의 시대적 배경은 그 강제경작제도가 한창 시행되던 시절입니다성직자들은 동인도의 주민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부가해 이교도들의 죄악을 정화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정신나간 설교를 하고 책의 화자는 르박의 토양이 커피재배에 적합치 않은 것이 나태한 주민들을 쥐어짜 토양개선을 하라는 신의 계시라고 말합니다. <막스 하벨라르>는 이를 통렬히 비판합니다그 결과 책이 출간되고 10년 후인 1870년 강제경작시대는 마침내 종말을 고하고 유럽열강의 식민지시대도 서서히 저물기 시작하죠.

 


데커르 선생이 이 책을 쓰게 된 동력의 일부는 환 담머 장군에 대한 앙심에도 있습니다. 환 담머 장군의 실존 모델인 안드레아스 빅토르 미힐스 대령은 드콕 장군 밑에서 디포네고로 전쟁에 참전했던 인물입니다그는 훗날 바타비아 총독대행의 자리까지 오르는데 소설에서처럼 실제로 나딸에서 회계문제로 데커르와 충돌합니다당시 수마트라 서부해안의 주지사이기도 했던 미힐스 대령은 미관말직 데커르가 상대할 수 없는 거물이었습니다. 데커르는 매우 불명예스럽게 공직에서 떨려나면서 이를 갈았죠. <막스하벨라르>엔 미힐스 대령에 대한 비난과 자신을 위한 변호가 많은 지면을 차지합니다데커르 선생이 이 책을 개인적 복수의 도구로 사용한 측면을 부인할 수는 없는 대목입니다.

 

이 책이 첫 출판된 것은 1860년으로미힐스 대령은 그보다 11년 전인 1849년 발리 정복전쟁 중에 전사했고 네덜란드의 국고를 파탄시킨 드콕 장군과 디포네고로 왕자는 각각 1845년과 1855년에, 10년의 터울을 두고 세상을 떠납니다그들이 모두 죽은 후 <막스 하벨라르>가 나왔으니 이 책은 어쩌면 ‘끝까지 살아남은 자의 주장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불멸의 고전으로 남은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타당한 인간애에 대한 깊은 성찰을 그 기저에 담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1999년 뉴욕타임스는 <막스하벨라르>지난 천 년 베스트 스토리의 하나로 선정했고 2003년 네덜란드에서는 아코문학상을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데커르 선생은 이 책을 출간한 후 본국에서 공직은커녕 변변한 일자리 하나 얻지 못해 유럽을 떠돌며 집필과 강연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1887년 타향인 독일 인겔하임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주류사회에 다시는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내부고발자들 운명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죠.

 

하지만 그의 인생은 또 한 편으로 1992년 군부재자투표 부정을 고발한 이지문 중위, 삼성비자금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 이명박정부 민간인불법사찰을 고발한 장진수 주무관, 박근혜 정권 국정농단 최순실 미르재단 비리를 증언한 노승일 차장 같은 이들이 같은 운명을 살지 않도록 시민적 관심이 절실히 필요하다며 경종을 울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2019.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