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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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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하벨라르

<막스 하벨라르> 완역본 출간 카운트 다운

beautician 2019. 2. 26. 10:00



  2월 중순에 '시와진실' 출판사에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시와진실'은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출간한 이모르문디 출판사 말고 양승윤 교수님이 나를 끼워넣어 조직한 번역팀의 <막스 하벨라르> 완역본을 내기로 한 또 다른 출판서입니다 . 


  그 이메일이 새삼스러웠던 것은 내가 그 책의 영문판을 초벌번역해 양 교수님께 보낸 것이 13개월 전인 2017 11월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책 한권을 통으로 번역하기 위해 영문판 두권, 인니어판 한 권을 펴놓고 5개월간 노력한 끝이었습니다. 그런 후 양 교수님 께서 재번역과 감수를 마친 후 출판사에 넘긴 것이 2018 5월이었습니다. 그분이 들인 공이 너무 컸으므로 내 위상은 공동번역자에서 초벌번역자로 강등되는 순간이기도 했죠. 내 마지막 원고가 내 손을 떠난 지 1년도 넘은 시점에 출판사 연락을 받았으니 새삼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인 겁니다.


  원래 <막스 하벨라르>의 출판일정은 2018년 초로 계획되어 있다가  4월로 연기되었더랬습니다. 그런 후 1, 2교가 진행되면서 다시 9, 10, 연말로 계속 지연되었죠. 그 사이, 내가 초벌번역을 넘긴 직후인 2017 12월에 계약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2018 9월 먼저 출간되어 나왔습니다. 훨씬 먼저 나와야 미땅하리라 생각했던 <막스 하벨라르>는 이제 2019 4월 초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출판을 위한 완성파일을 4월초에 인쇄소로 넘긴다 하더군요. 드디어 나오긴 나올 모양입니다.


  2
월 중순에 받은 이메일은 내 '초벌번역 후기'의 교정 파일이었습니다. A4 네 장 남짓한 분량이었는데 수정할 곳이 200군데가 넘었습니다. 그 대목에서 이런 독백이 저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
이렇게 꼼꼼한 사람은 내 평생 처음일세."


  시인같은 멋진 이름의 편집장은 아마도 여자분같은데 그 수정 내용을 모두 수용하면 간단히 끝날 것만 같았던 교열교정이 몇 차례 반복되어 3교까지 갔습니다. 최종본이 나온 후에는 내가 오히려 좀 더 고쳐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죠. A4 네 장 짜리 후기 가지고 교정교열이 이 정도면 수 백 장 분 본문의 교정교열을 오죽하겠냐고요. 그건 거의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싶었습니다.

  "
생업으로는 하는 일이라 그리 어렵지 않아요."

  편집장은 당연히 그렇게 대답할 것 같았는데 그렇게 몇번 교정파일이 오가면서 이 책의 출간이 왜 이렇게 늦어지고 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생애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19세기 제국주의의 변곡점을 제공한 네덜란드 고전소설 완역본을 내려는 노교수의 고집과 팔리는 책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분명한 개념을 가진 꼼꼼한 편집장의 완벽주의가 맞붙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상황을 눈치 챘으면 누구 편들지 말고 모른 척 있는 게 상책입니다. 양교수님께도 출판사에게도 눈밖에 나면 좋을 일 없으니까요.


  그래서 아무튼 2016 12월 자카르타에서 이 책의 번역이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지 2 5개월만에, 내가 2017 6월 번역을 시작한지 22개월만에 드디어 책이 나오는 것인데 두 사람의 기싸움이 어떠했을까 미루어 짐작해 보면 이것도 너무 늦은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북미 정상회담에 맞춰 양교수님과 출판사가 서로 통 큰 양보를 한 끝에 마침내 윤전기에 걸리게 된 거라 생각됩니다. 고생하셨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느 책인들 작가와 편집자, 출판사의 피와 땀을 갈아넣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고수들의 노력이 최대치로 투여된 이 책은 분명 더 특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많이 팔려야 할 텐데 걱정이 앞섭니다.  내 현대사 책은 지난 6개월간 700 여 권이 나갔는데 양 교수님은 <막스 하벨라르> 4.000권 분 선인세를 받아 번역료 명목으로 먼저 내게 주셨으니 말입니다. 4천 권 이상 팔리지 않으면 내가 양교수님과 출판사에 큰 빚을 지게 되는 셈입니다. 이 책 나오면 또 누군가의 목을 조르러 나갈 각입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 책이 이제 세상에 나오기 위해 시동을 걸고 있는데 지난해 7월쯤 스토리를 넘겼던 <다포네고로 왕자 전기>의 만화도 올해 진전이 있을 것 같다는 연락이 얼마 전 있었습니다. 올해도 이래저래 매우 문학적, 문화적인 한 해를 보내게 될것 같습니다.


2019. 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