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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송병장

beautician 2019. 8. 10. 10:00

송병장

 

 

한참 글을 쓰며 옛날 일들을 들추다 보면 영영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옛날 친구들 이름들이 하나 둘 기억나기 시작하는데 그 중 가장 기억해 내기 어려웠던 것은 군에서 같이 생활한 소대원들 이름이었다.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신병이 전역병들 자리를 채우곤 했지만 언제나 12명에 불과하던 그들 이름이 이제 와서 왜 그렇게 기억해 내기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아직 이름없이 떠오르는 얼굴들이 많고 전역이 가까왔을 때 전입해 온 신병들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많이들 다녀가셨을 제 3땅굴을 군시절 내가 근무하던 부대에서 관리했다.  임직각에서 자유의 다리를 건너자마자 도착하는 멸공관이 나와 내 소대원들의 숙소였다.  주말이면 사단 면회소로도 사용되던 그 곳은 반공전시장과 강당으로 이루어진 본관 뒤로 대성동 통일촌 방위가 출퇴근하던 피엑스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소대원 내무반, 오른쪽으로는 내 숙소가 있었다.  그래서 같은 울타리 안에 있던 대대본부 간부들이 오랜만에 찾아온 애인과 회포를 풀 때면 내 방을 주로 빌리곤 했다.

 

본관 앞으로는 우리 소대원들이 선임하사에게 쪼인트 맞아가며 가꾼 넓은 정원이 있고 이 정원의 왼쪽 끝 대대 위병소에서부터 시작되는 회차로가 둥근 원모양으로 본관 앞을 지났다.  실장 26호 찝차와 중요한 손님들을 실어 나르는 미니버스가 정원 건너편 공터에 전시된 군용 경비행기 옆에 항상 서 있었고 때로는 땅굴소대장이 자가용으로 사용하는 앰블런스가 나란히 서 있기도 했다. 그 뒤 둔덕 위에는 내가 근무하던 2년동안 두 번인가 세 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헬기장을 중심으로 키가 넘는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우리 소대원들이 소주박스를 즐겨 숨겨놓는 장소였다.  도라전망대가 완공되고 군단장이 날아온다는 소식에 소대장 이하 전 소대원이 매달려 벌초작업을 할 때 그 동안 꼬불쳐 두었다가 잊어먹은 소주박스들이 열 개는 더 나왔다.  그렇게 풍부한 재고를 가지고서도 내가 소주 좀 찾아와 보라고 하면 오리발만 내밀던 우리 소대원들은 만만찮게 야속한 넘들이다.

 

소대원들중 아주 잘 어울리는 또래 트리오가 있었는데 영우, 병진이, 민섭이가 그들이다.  같은 나이인 그들은 입대시기도 거의 비슷했지만 대학재학기간에 따른 군복무 혜택기간이 달라 제대는 제각기 하게 되었다.  2년 넘는 군생활을 하다 보면 소대원들 중 속썩이는 녀석들이 꼭 있기 마련이고 때로는 소대장이 소대원들 속을 썩이는 경우도 많지만 이들 세 명은 꽤 모범적인 친구들로 기억하고 있다.

 

정말 힘든 쫄병생활을 했던 영우는 공고출신의 똑똑한 친구로 전역 후 자수성가하여 세운상가와 용산전자상가에 컴퓨터샵을 내기도 했다.  다정다감하고 손재주까지 있던 이 친구와는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어 내가 첫 286 컴퓨터를 산 것도 영우의 샵에서였다.  건국대를 다니다 입대한 병진이는 활달하고 붙임성이 좋은 포항출신이었다.  그의 군생활도 절대 평탄하지 않았지만 우스개 소리를 잘하고 엉뚱면서도 재미있는 짓을 많이 해서 소대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한편 민섭이는 군산인가 목포인가에서 수산대를 다니다 온 친구로 탤런트를 해도 될 정도의 수려한 용모에 성격마저 서글서글하여 가끔 엿보이는 남자답지 않은 섬세함은 단연 돗보였다.  그래서 민섭이가 멸공관 정문에서 위병을 설 때에는 땅굴을 견학하러 온 여고생들이 그의 주변에 많이도 모여들었다.  그런 민섭이가 영우, 병진이들과 줄곧 군생활을 같이 해 오다가 가장 먼저 제대하게 되자 남은 두 친구의 착찹한 심정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군시절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민섭이의 전역식 전야에 당시 내무반장이었던 영우는 예의 트리오 전원의 외출을 요청해 왔다.  이미 소대에서 전날 별도로 환송회를 해 주었지만 나역시 민섭이를 보내는 마음이 못내 섭섭했던지라 흔쾌한 마음으로 외출증을 끊어 주었다.  병진이의 조금은 심한 술버릇이 걱정은 되었지만 믿음직한 두 친구가 함께 나가니 큰 일은 없으리란 생각이었고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저녁 7시 이전에 꼭 돌아오라는 단서를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산으로 나가려면 꼭 지나야 하는 자유교 헌병들에게 미리 협조를 구해 놓는 것도 이런 날에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병진이는 그전에도 이미 내무반에서 술을 먹고 주정을 부려 한번 경고를 준 적이 있었다.  그는 말하자면 우리 소대의 개그맨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그랬고 술만 좀 먹으면 술술 풀려나오는 예전 내무반장 이병장과의 갈등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면 모든 소대원들이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이곤 했다.  하지만 조금 기분좋게 마신 것과 엉망으로 취해 망가지는 것 사이의 변화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병진이는 술에 대해 아무래도 좀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신임 소대장으로 처음 부임해 왔을 때 짬밥으로 날 정면으로 들이받아 완존히 맛이 가게 했던 옛날 내무반장 이병장은 제대하는 날까지 병진이와 잘 지내질 못했다.  터미네이터 못지 않은 덩치와 근육을 가진 이병장은 농촌진흥청에서 일하다 입대한 친구로 태권도 4단인 병진이를 그토록 갈군 것은 아마도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고질인 지역감정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병진이도 만만한 넘은 아니었다.

 

한 일화가 있다.

 

우리 부대에는 이병장이나 병진이 말고도 호신술이나 주먹에 일가견이 있다는 친구들이 꽤 있었는데 서진 룸살롱 사건의 사시미파 조폭들과 선후배 관계라는 테니스병이 있었고(얜 처음 왔을 때 벌써 인상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지만 예상과는 달리 정말 다정다감한 친구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코미디언 남철씨의 아들로 와세다대학을 마치고 뒤늦게 입대한 일본어 통역병 길형이도 있었다.  나이들어 입대한 사람답지 않게 동생뻘인 고참들에게 아마도 천성인듯한 싹싹한 태도로 대해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며 모범적인 군생활을 한 길형이는 어릴 때부터 이소룡을 흠모해 언젠가 액션 스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쿵후를 익혔다며 가끔 소대원들의 성원 속에 멋진 무술시범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 외에 영사병인 성국이도 쿵후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빼어난 운동신경으로 우리소대 축구, 족구팀의 대표선수이기도 했다.  기관총사수 특기인 그는 제대 후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었지만 멸공관 근무 당시에는 상황실에 간이 2층으로 만들어진 영사실에서 관광객들에게 사단홍보영화를 틀어주는 것이 그의 주 임무였는데 가끔 영화 틀어놓고 잠이 들어 안내장교들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작업이 있는 날이면 보직을 불문하고 모두들 선임하사 김상사의 지휘 아래 노역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날은 성국이도 병진이와 함께 우리 부대 윗쪽의 사단장 전방공관에서 멸공관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리어카에 경유 드럼통을 잔뜩 싣고 한 넘은 앞에서 한 넘은 뒤에서 조심조심 내려오고 있었는데 앞에서 브레이크 역할을 하던 병진이가 그만 발을 헛딛으면서 무거운 리어카가 급기야 내리막길을 질주하게 된다.  병진이는 리어카 앞쪽 손잡이게 매달리고 성국이는 엉겁결에 드럼통들과 함께 뒷칸에 올라탄 상태가 되어서.  그때 마침 비탈길 아랫쪽 공터에는 신교대에서 행군나온 신병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이 사건의 증인이 되어 주었다.  내리막길을 치닫던 리어카가 결국 굉음을 내며 뒤집어지고 매달려 있던 두 사람이 마치 공기돌처럼 공중으로 내팽겨쳐지자 탄식을 내지르던 신병들은 병진이와 성국이가 각각 공중제비를 돌아 균형을 잡으며 마치 기계체조선수처럼 사뿐히 착지하자 이번에는 우뢰와 같은 박수로 환호했다고 한다. 

 

그런 병진이도 이병장에게는 언제나 밥이었다.  이병장의 제대 전야.  서로 계급장 떼고 나 몰래 이병장과 원터치를 붙은 태권도 달인 병진이의 깊은 내공도 외문기공에 달통한 싸움도사 이병장의 벽력장 앞에서는 전혀 먹히지 않았는지 결국 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백기를 들고 말았다.  여담이지만 와신상담 재대결을 별려온 병진이는 제대한 후 경기도 어딘가의 농업진흥청에 다니던 이병장(이 친구는 젖소 인공수정 전문이라고 함) 직장까지 찾아가 또한번 도전하여 무공을 겨루었지만 그날 역시 농업진흥청 뒷산에서 다시 떡이 되고 말았다는 후문도 들었다.

 

그런 이병장도 제대하고 병진이 짬밥도 높아지자 그를 둘러싼 소대 내의 알력이나 폭력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번에 그의 주사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전방에서 조금씩 소주잔을 몰래 들이키는 것은 옛날부터 있어왔던 일이지만 곤드레가 되도록 취해 야밤에 위병소를 향해 소리를 질러 대거나 사단장 전방공관에 오줌 싸갈기는 건 얘기가 좀 틀린다.  그러던 끝에 병진이는 결국 경고까지 한번 먹었고 그런 다음에는 꽤 조신하게 지내오던 터였다.

 

내 기대를 저버리고 이들 세명은 저녁 7시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 8시 반, 자유교 남문 헌병대 김병장이 이들 세 명이 다리를 건넜다는 걸 친절하게도 전화해 준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헌병대 김병장그넘 병장 마이가리인 건 분명하지만 그동안 틈틈히 전달해준 라면박스 약발을 톡톡히 받아 갸륵하게도 꽤 취했을 우리 애들 통과하는 거 시비걸지도 않고 이렇게 보고까지 해 준다.  하지만 대대 위병소에서는 상황이 좀 달랐다.  만약을 대비해 소대 중고참 한명을 위병소에 보내 뒀지만 내 숙소에서도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병진이 목소리가 들리더니 결국은 열받은 대대 당직사관에게 싹싹 빌고서야 애들을 상황실로 데려올 수 있었다.

 

꽤 찐한 환송회가 문산에서 있었던 모양이다.  이미 제 정신이 아닌 병진이는 상황실 바닥에 길게 누워 이리 저리 구르면서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고 정작 오늘 주인공인 민섭이, 내무반장 영우는 미안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있다.  마음 속으로야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지만 이거 그냥 넘어가게 되면 앞으로 소대 관리하기 정말 힘들어진다.  게다가 병진이는 벌써 두 번 째.  말년이 다 된 고참이지만 병진이 자신을 위해서라도 제대할 때까지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못하게 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날밤, 아무 죄도 없는 소대원들 전원이 완전군장을 매고 본관 앞 회차로를 50바퀴 돌았다.  완전군장 꾸리는 것, 짧은 회차로 50바퀴 도는 것은 보통 군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상황병, 공관병, 운전병, 테니스병, 영사병, 보일러병, 통신병, 일본어 번역병, 뭐 이런 특기가진 우리 소대원들에게는 절대로 장난이 아니었다.  사실 화는 병진이에게 나 있었지만 이런 경우 소대장은 가끔 좀 싸이코처럼 보일 필요도 있다.  하지만 1년넘게 친구처럼 지내온 소대원들에게 정말 화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역시 특별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기 위해 몽둥이 하나 깎아 오라고 했을 때 한손으로는 도저히 들기도 힘든 웬 전신주같은 몽둥이를 가져오는 바람에 정말 열이 나기 시작했다.  군생활하면서 절대로 부하들 건드리지 않겠다던 결심이 그날 흔들렸다.  하지만 차마 그 무식한 몽둥이로 사람은 건드릴 수 없어 소대원들 구형 군장에 달려 덜그럭거리던 애꿎은 반합들만 여러 개 찌그러지고 말았다.

 

정작 문제는 병진이었는데 죄없은 소대원들 그렇게 굴리고 나서 병진이를 가만히 둘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첫날 하루는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병진이는 그날부터 모든 일과에서 열외되었다.  아침에 부대를 떠나며 신고하던 민섭이의 모자에 달린 예비군 마크가 하루종일 떠오르며 웬지 마음이 산란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병진이를 한번만 더 봐달라는 민섭이와 영우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던 터였다.  그날 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병진이를 따로 부르려고 했는데 나보다 더 마음이 급했던 병진이는 부르기도 전에 스스로 내 방을 찾아왔다.

 

그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절친한 친구의 환송회를 엉망으로 만들고 자신 때문에 전 소대원들이 뺑뺑이 돈 것, 자기로 인해 귀대시간을 못지켜 결국 내무반장인 영우가 대표로 욕을 먹어야 했던 것 등, 그는 용서를 구해야 할 많은 이유들을 스스로 이야기하며 소대장에게 사과를 빌었다.  군기교육대도 달게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고참 소대원의 군기문제는 그 밑의 병사들에게 미치는 파급효과가 커 간단히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난 그와는 좀 다른,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너 술 때문에 문제 일으킨 게 벌써 두 번 째야.  난 내 부하가 말 안듣는다고 실장님이나 군기교육대에 일러받쳐서 교육시켜달라는 짓 따위는 안해.  그 대신 내 능력으로 정 어쩔 도리가 없다면 더 능력있는 지휘관이 있는 부대로 보내는 수밖에 없지.”

 

그때는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주사가 심한 친구들을 별로 좋아하지 못한다.  게다가 전방지역 부대에서 술 취한 망아지가 뛰어다니게 놓아 둘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병진이의 황당해 하는 표정과 그 이후 줄곧 풀이 죽어 지내는 허탈해 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고 소대원들에게 엄격하기로 소문난 우리 선임하사 할아버지도 내게 재고를 부탁해 왔다. 선임하사는 내가 태어나던 해에 군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다. 거기에 내무반장 영우는 당사자보다도 더욱 필사적으로 병진이의 선처를 요구하며 나를 쫓아다니면서 들들 볶았다.  제대를 3개월도 남기지 않은 말년 병장이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간다는 것은 그 남은 기간동안 어떤 생활을 하게 되리라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신참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서글픈 말년생활이 될 판이었다.

 

하지만 결국 마음을 돌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병진이를 보내겠다고 마음먹은 후부터 그의 활달한 모습을 나중에는 못내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였다.  부대 회식때마다 눈가가 불그레하게 되어 꺼내든 우스운 대꾸들, 선임하사 지휘하에 화단이나 테니스장에서 사역하다 휴식시간이면 한 바탕 썰을 풀어 동료들을 웃기고 가끔은 대충 가락치, 음치 근처이면서도 목이 터져라 노래도 부르던 모습, 상황병 대타로 상황실에 들어와 멀뚱멀뚱 두리번거리다가도 틈만 나면 장교들에게 능청스럽게 걸어오던 걸쭉한 농담들그런 것들 말이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 중 하나는 보일러병인 병진이에게 보일러실에서 펜치를 가져오라고 시켰을 때였다.  그때 상황실에서 뭘 고치는 중이었는데 웬일인지 그날따라 군기가 제대로 들어있던 그는 지시를 받자마자 큰소리로 복창하고서 보일러실로 달려간 후 30분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다.  결국 영우를 불러 보일러실에 보냈더니 병진이는 소대장이 뭘 가져오라고 했는지를 까먹고서 그걸 기억해 내려고 혼자 머리를 싸잡고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더란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할 때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결국 병진이는 우리 부대에서 전역했고 전역회식도 대대적으로 준비해 주었다.  전출시키는 문제를 마지못한 척하며 슬그머니 번복했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회식상에 올라온 소주잔을 들며 병진이는 내 눈치를 보면서 매우 조심스러워 했다.  그가 부대를 떠나기 전날 밤의 일이다.

 

한가지 안타까왔던 것은 내무반장 영우가 병진이 제대하는 것까지 보고 싶지 않다며 마침 지원을 받고 있던 국군의 날 행사에 지원해 버린 것이다.  내 허락도 받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그런 영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영우는 병진이가 떠나기 몇 주 전 우리 부대를 떠났다.  그리하여 병진이가 군을 떠나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날,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해 누구보다도 긴 군생활을 해야 했던 영우는 병진이보다 빨리 예비군 마크를 달고 뜨겁게 달아오른 여의도 아스팔트 위에서 87년 국군의 날 행사를 위한 행진훈련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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