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지사에서 생긴 일 본문
1.
우리 공장장은 고교시절 입시준비의 강박관념 때문에 한때 피해망상적 편집증에 시달렸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는 정신병원에도 잠시 다녔고 결국 기독교계 기도원에서 치료도 받으면서 증세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는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처음 발령을 받아 자카르타로 떠날 당시 그는 교회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고 내가 자카르타에 도착하던 해에는 모 한인교회 집사로서 남선교회 총무까지 맡고 있었습니다. 내 부임 초창기 시절엔 일요일 아침마다 내 집 앞에 차를 대놓고 교회 가자고 강요했던 것도 당연히 우리 공장장이었습니다.
"목사 아들이 교회 안다니면 쓰나?"
공장장이 늘 하던 소리였습니다. 난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보았습니다. 열정적인 교인들, 교회 안을 메아리치는 통성기도, 예배가 끝나면 교회마당에서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교제 등, 그런 것들이 좋아 보인 적도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헌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집사들간의 반목과 욕설, 훗날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교회를 키워 낸 후 아무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명예롭게 퇴직하신 한 목사님이 담임을 맡고 있던 당시, 무슨 꼬투리였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일을 빌미로 집사들이 작당해 목사님을 쫒아내던 장면을 보면서 교회에 대한 환멸이 시작되었고 이후 평생을 통틀어 내 신앙의 기저에는 그 환멸이 있었습니다. 군 시절, 내 개인숙소에서 불과 200미터 거리에 있던 대대본부 군교회에 전역할 때까지 단 한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것은 그런 환경을 멀리 떠나온 군대에서만큼은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군사정권 초기 화폐개혁 당시 하나님의 말씀만으론 도저히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고 절망하며 전도사직을 내던졌던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붙잡혀 강경 읍사무소에 갇혔던 그 날 밤의 오래된 서원을 지키기 위해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나이 50이 넘어 개척교회 목회라는 가시밭길에 들어서 있었지만 난 모태신앙에도 불구하고 신이 인간을 자유케 하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데 교회는 왜 그토록 성스럽고 복잡하면서도 이율배반적이기까지 한 무수한 교리들로 사람들을 칭칭 휘감아 숨통을 짓누르다가 급기야 그 교리에 못박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신앙심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건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 함께 교회 가자는 공장장의 강권이 당연히 부담스럽기만 했습니다. 회사의 상사는 회사에서 만나는 것만으로 족한데 말입니다.
그 해 3월, 이슬람 최대 명절인 라마단(Ramadhan)이 시작되었고 공장장은 전 한국인 직원들을 발리(Bali) 옆 롬복(Lombok)섬으로 여행을 주선했습니다. 800여명의 인도네시아인 직원을 거느린 공장에 한국인은 나를 포함해 관리직과 생산직을 통틀어 모두 여섯 명. 여행에는 공장장만 유일하게 가족을 대동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현지 독신이었고 나 역시 아직 가족들이 인도네시아에 합류하기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카르타에 가족과 함께 사는 또 다른 한 사람인 창고장은 이 여행에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공장장과 창고장 사이에 차가운 냉기가 흐른다는 사실은 공장 출근 첫 날부터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남부 자카르타 어딘가의 다른 한국인 교회에서 역시 집사직을 맡고 있던 창고장과 우리 공장장의 오랜 반목이 뿌리깊은 것이란 걸 알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부임 초기에는 같은 동네, 서로 마주보는 집에서 이웃사촌으로 살았다는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회의 중에도 서로 시선을 잘 맞추지 않았습니다.
롬복 여행에서 돌아오자 그 동안 다른 업무들 대부분이 넘어온 당시 시점에 공장장이 끝까지 틀어쥐고 있던 경리업무도 조금씩 넘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난 공장장 후임 내정자 자격으로 자카르타에 부임했습니다. 하지만 예전엔 부장급에서 차장 4년차가 맡고 있던 공장장 자리에 왜 고작 과장 1년차인 내가 발령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영어 전공으로 일본수출 담당을 맡고 있던 내가 인도네시아 생산공장으로 가게 된 자체가 의외였습니다. 물론 당시 미국, 일본 지사 주재원을 역임하는 것은 경력관리에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수당이 현지 대기업 수준으로 크게 오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큰 이익이어서 공들여 줄을 잘 선 사람들에게 먼저 돌아가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최소한 영어를 쓰는 다른 나라 주재원으로 가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남방의 생산공장에 가게 된 것도, 그리고 내 직급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 맡던 자리에 보내진다는 것도 당시엔 큰 물음표로 다가왔습니다.
아무튼 현직 공장장으로부터 공장업무 일체를 인수인계 받는 것이 내가 당면한 우선적 임무였습니다. 징검다리 개념으로 새 공장장이 오기 전까지 단순히 대행을 맡는 것인지도 구체적인 언질이 없었습니다. 난 본의 아니게 애매한 상황에 뛰어들게 된 것입니다.
공장설립부터 간여했던 전임 공장장이 본사에 귀임한 후 그 후임으로 승진한 지 2년차인 현직 공장장은 지사 근무 연한 5년을 훨씬 넘겨 벌써 7년차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 해 7월이면 본사로 귀임하는 것이 거의 확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리업무 인수인계에 뜸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빨리 넘겨 주고 나면 좋아하는 골프나 치고 교회생활에 충실하면서 남은 임기를 보다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내가 공장에 부임한 여러가지 이유들 중 하나는 아마도 비용을 줄이겠다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사무직 3명, 생산직 3명 중 사무식인 공장장을 과장 1년차가 맡는다는 건 사무직 1명, 생산직 3명 미만으로 가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어차피 공장은 설립된 이후 거의 매년 적자를 내던 중이었고 어쩌면 문을 닫는 수순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경력관리를 해야 하는 차장-부장들이 이 자리를 고사해 일천한 직급인 내가 소모품 성격으로 발령받은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부임 초기부터 비용을 줄일 수 방편들을 연구했고 그중엔 이면지 사용운동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지난 7년 동안 서류 한 장 버린 적 없는 방대한 양의 파일들을 반 이하로 줄이는 성과를 보였습니다. 사실 당시 본사에서는 이미 그런 성격의파일 정리작업이 이미 오래 전에 완료된 상태였습니다. 중요성에 비해 거의 들춰보지 않는 옛날 파일들은 모두 박스로 만들고 비표를 붙여 시외 별도 창고로 옮겨 보관했고 정라과정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이면지들은 품의서 등 잡다한 내부문서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면지 사용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작은 돈을 아끼지 못하면 큰 돈도 지키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한국인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창고장은 창고 서류들이 너무 중요해 버릴 게 하나도 없다며 아예 파일정리 무용론을 고수했으므로 결국 난 그 쪽 서류를 단 한 장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생산책임자인 윤대리는 한번 보고 나면 버릴 주간 회의 자료인데도 이면지로 프린트해 배포하는 것이 내가 한국 생산직 관리자들을 우습게 보기 때문이라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내가 내부용 작업 지시서 수백 장을 이면지에 복사하여 배포하자 나 몰래 현지 직원을 시켜 모조리 새 용지로 다시 복사해 가기도 했습니다. 옛날 소위 임관하여 훈련 마치고 소대장으로 배치되었을 때 자대 상병, 병장들이 하던 텃세를 인도네시아에서 다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내게 나대지 말라며 때로는 위협적인 몸짓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밀려서는 나중에 전혀 관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소대장 시절에 이미 경험한 바 있었습니다. 공장은 내가 부임한 후 한동안 시끄러웠습니다.
내 일이라면 사사건건 반대하며 나서는 고졸 출신 창고장은 내겐 큰 형뻘이지만 만년 대리로 직급은 내 밑으로 밀려나 버렸는데 내가 태어나던 해에 입대한 상사를 우리 부대 선임하사를 겪어본 나로서는 어느 정도 그의 입장을 이해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는 고졸 사원이라는 차별 속에서도 애써 인내해 왔고 조금만 있으면 자신이 차기 자카르타 공장장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나의 부임이 그의 희망을 산산히 부수어 버린 셈이었으니까요. 거듭된 실망으로 급기야 절망해 버린 그의 뒤틀린 심사를 헤아리지 못할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지사 생활 7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으므로 본사가 공장장과 함께 그에게도 귀국발령을 낼 것은 거의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공장에서 가장 큰 비용 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인, 그것도 근무연한을 훌쩍 넘긴 직원들의 숫자를 우선적으로 귀국시킨다는 것이 분명한 본사방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처지를 이해했지만 뭐든 간단히 수긍하지 않는 그를 매번 애써 설득해야 한다는 것은 쉽게 지치는 일이었습니다.
그 창고장이 언제부터인가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러 내 책상에 찾아오거나 나를 그의 창고 사무실로 불러냈습니다. 메인 사무실과 창고 사무실은 생산현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유리와 샷시로 벽을 세워 양쪽에 에어컨을 단 창고 사무실은 그가 이미 적잖은 마찰을 빚고 있던 전임 공장장과 몇 달을 싸운 끝에 자신만으로 공간으로 얻어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적자인 공장에서 불요불급한 비용이 무던히도 투입된 그 사무실에 창고장은 무척 만족해 했지만 누구에게도 간섭 받지 않는 그 환경에서 그가 분명히 무엇을 하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창고 사무실에 들를 때마다 내가 본 것은 그가 컴퓨터로 테트리스 게임을 하거나 교회 주보를 만드는 모습이었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지나칠 정도로 공장장을 씹었습니다. 나이도 어린 놈이 공장장 되어 건방을 떤다는 거였죠. 앞으로 내가 공장장이 되면 자길 절대 우습게 보지 말라는 위협으로 들렸습니다. 그는 공장장은 귀국해도 자신을 공장에 남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씹어주는 대상에는 공장장 부인도, 자카르타 시내 지사장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공장장과 입사동기인 지사장이 함께 똘똘 뭉쳐 자기를 무시하려 든다는 것이었죠. 생각해 보면 우리들 모두가 원래 속해 있던 본사 의류팀의 현직 팀장도 공장장, 지사장과 입사동기였습니다. 한번 시작되면 그칠 줄 모르는 그의 뒷담화는 내가 중간에 끊지 않으면 한 시간도 넘게 이어지곤 했습니다.
가장 피곤한 대목은 공장장도 똑같이 창고장을 씹는다는 것이었어요. 창고장의 가족까지 싸잡아 씹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특이한 점은 그의 비난이 매우 종교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청교도적 신앙을 강조하던 공장장은 창고장의 신앙심과 그가 다니던 교회의 정통성 여부까지 지적하며 문제 삼았습니다. 자기 주제를 모르는 창고장에게 안수집사를 준 교회가 제대로 된 곳일 리 없다는 식이었죠. 난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며 어떻게 맞장구를 쳐주어야 할 지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에 대한 가열찬 비난에 여념없던 두 사람이 회의실이나 작업장에서 마주치면 서로 비수를 등뒤에 숨기고서 공장장님, 창고장님 하며 화기애애하게 웃는 모습에 나는 도통 혼란스러웠습니다.
내 눈에 비친 우리 자카르타 현지공장은 복마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2.
본사에서도 줄곧 해외 마케팅 담당이었던 나는 인도네시아에 부임한 후에도 바이어들에게 써큘러 레터를 자주 썼습니다. 수백 장을 보내야 한 두 통 회신 받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인연을 맺고 팔로업 한 결과 차츰 적잖은 금액의 오더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함께 기뻐해야 마땅할 공장장의 반응은 지극히 냉소적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스스로 영업해서 오더 받는 회사들도 없고 그럴 방법도 없기 때문에 모두 본사에서 보내주는 오더들만 쳐내는 거라며 언성을 높였던 것입니다. 그의 인식과 내가 자카르타의 영업현장에서 듣고 겪은 일들이 왜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니 진출 초창기의 한국공장들은 공장장 말대로 본사로부터 한국 국내외 오더를 토스 받아 소화해 내는 게 전부였지만 80년대 말,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지에 진출한 수많은 바이어 에이전트들은 물론 미주와 유럽의 거래선들과 직접 연결해 자체 수주영업을 하며 본사 의존도를 줄이기 시작한지 오래였기 때문입니다.
현지 바잉오피스들로부터 직접 수주한 오더들이 실제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공장장이 이번엔 이상한 이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공장이 직접 오더를 받으면 모든 디테일과 자재를 직접 챙겨야 하는데 만의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공장이 모두 뒤집어 쓸 것이므로 내가 현지 수주영업을 하는 것은 공장에 불이익을 주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게 화이트칼라 출신 봉제공장 사장의 한계였던 건지도 모릅니다. 본사에서 보내주는 자재 수급에 문제가 생겨 생산이 차질을 빚으면 노련한 현장 출신 사장들은 현지시장에 나가 비슷한 자재를 찾아오거나 급히 현지수급을 도모하기도 하고 심지어 억지를 써서라도 이웃 공장에서 빌려와 공장가동과 납기엄수를 담보하려 할 텐데, 본사 탓만 하며 생산일정을 늦추거나 생산 순서를 바꾸면서 본사에 납기연장을 요구하는 것이 당시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본사 의류팀과 한 몸인 자카르타 공장이 완전히 면책되는 것도 아니고 그 피해는 고스란이 적자로 남아 공장 수지를 크게 악화시킬 뿐이었죠. 누적적자가 산더미 같은 상황에서 말이죠.
반년 만에 현지 수주액이 상당히 커지자 공장장은 이제 오더 따러 다닌다고 생산관리 빵꾸내면 어떻게 책임질 거냐며 겁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걸 책임질 한국인 생산관리자가 세 명씩이나 있는데 말입니다. 그는 더 이상 한때 매일 교회 가자며 일요일마다 내 집 앞에 차를 대던 사림이 아니었습니다. 난 공장장이 내게 품게 된 적개심의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다 넘어온 줄 알았던 경리업무의 마지막 부분이 부임 4개월차가 되어서야 넘어왔습니다. 비자금 장부였어요. 그걸 내 책상 위에 던져 놓던 공장장의 흔들리던 눈빛이 자꾸 맘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장부를 들춰본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재단이 끝난 뒤 ‘기레빠시’라고 일본식 용어로 부르던 남은 원단조각들을 재처리업자들에게 매각하면서 받는 대금이 당시 비자금 조달방법의 전부였습니다. 실리콘 코팅이 된 고급원단보다는 100% 비닐 원단조각들이 훨씬 더 높은 가격에 팔렸습니다. 재처리가 쉽기 때문이었죠. 비자금은 전임공장장이 귀임하기 전까지는 꽤 많은 금액의 플러스를 기록했고 주된 사용처는 수출입 절차를 보다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해 세관, 선사, 부두 등에 지출되는 담뱃값이나 기름칠 하는 뒷돈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정식 경비로 영수증 처리가 어려운 비용들을, 어차피 정식 수입으로 잡히지 않는 그 비자금으로 처리했던 것이죠. 그러나 현 공장장이 재임하는 동안 비자금은 마이너스 폭이 급격히 늘어나 있었습니다. 내게 넘어온 비자금 장부에 적힌 총액은 마이너스 28만불. 즉 본사에 보고되지 않은 채 펑크가 난 금액, 있어야 하지만 장부 상에만 있고 사실은 없는 금액이 당시 환율로 약 2억원 남짓, 지금 가치로는 20-30억 원 정도일 것 같습니다.
본사 결재를 받고 지원했던 것으로 생각해 본사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했던 그 롬복 여행비도 비자금에서 나온 돈이었어요. 그것 말고도 굵직굵직한 금액들이 비자금 장부 여러 장에 걸쳐 빽빽하게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 밑에 적힌 거액의 접대비, 기부금들. 더욱이 세무서와 세관에 주었다는 뒷돈은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전임공장장이 귀임한 다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현지 원부자재 업체들이 전임공장장 귀국 후 모두 공장장이 다니는 교회의 고교, 대학 동창생들의 회사로 바뀐 것 역시 석연치 않았습니다. 내부 규정으로 정해진 가격비교 방식이나 규정된 결재기간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공장장 친구들이 그를 심심찮게 저녁식사며 골프회동에 불러내는 대신 결재대금은 그들이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나 경리직원이 그들 회사에 가져다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내게 현금 들고 찾아와 대금 결재해 주는 기특한 거래선들을 난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인도네시아라는 국가적 특수성이 분명 작용하긴 했겠지만 우리 회사는 그 평균에 비해 여기저기 돈다발을 들고 뛰어다녀야 하는 일이 비정상적으로 많았습니다. 불필요해 보이는 경우에도 말이죠.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자꾸 나타나면서 난 고민이 점점 늘어갔습니다.
따로 불러 물어본 경리과장은 내 눈치를 보며 비자금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습니다. 어차피 모두 인계 받고 나면 내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인데도 말입니다. 전임 공장장 시절 한번 퇴직했던 이인(Iin)이라는 이름의 이 새파란 경리과장은 지금의 공장장이 다시 스카우트해 왔고 그래서인지 그 위세도 당당해 명색이 공장의 넘버 투인 나를 대하는 태도가 건방지기 짝이 없었습니다. 뭔가 보고하라고 하면 경리과 부하 여직원에게 쪽지 한 장을 달랑 들려 보내곤 했습니다. 비자금 지출증빙을 요구해도 경리과장은 비자금 전액이 모두 영수증 없이 처리됐다며 단 한 장의 증빙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는 비자금 마이너스를 떨어낼 길이 없었어요. 상황은 마치 이 모든 문제를 나 혼자 덮어쓰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비는 금액을 모두 메우려면 앞으로 몇 년간 원단조각을 팔고 비자금 지출을 정지시켜도 요원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공장장은 조언을 구하려는 내게 매번 짜증을 부리면서도 그때마다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넌 경리일 잘 모르니까 뭐든 경리과장한테 물어보고 나서 해. 비자금 증빙 같은 쓸데없는 거 쑤시며 돌아다니지 말고. 경리과장, 걔 없으면 이 회사 안돌아가."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더욱이 경리과장이 공장장을 '아빠'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유대관계가 그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공장장이 내 반대편에 서있다면 경리과장도 내 편일 리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좀 더 시간이 흘러 내가 인도네시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었을 때, 여자가 남자를 '파파(papa)'라고 부르면 그건 ‘자기 아빠’의 의미보다 ‘내 아이의 아빠’라는 의미를 더 강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런 것까지는 모르던 당시가 어쩌면 오히려 속 편한 상황이었습니다.
자카르타 연락사무소의 지사장도 별다른 조언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확실한 근거 없이 공장장을 의심하지 말라는 원론만 되풀이 할 뿐이었어요. 그러나 이건 의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내가 맡게 될 공장은 그렇지 않아도 지난 몇 년간 쌓인 산더미 같은 적자에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본사에 보고도 안된 비자금이 이미 만회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었다는 현실이 숨막혔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금액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간 표면에 떠오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으므로 그때 내가 침묵한다면 나중엔 나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으리란 건 당연한 추론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비자금 장부에는 지사장의 룸살롱 술값을 갚아주었다는 명세도 여럿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사장은 내 학군 선배였습니다. 나보다 8년 앞서 ROTC 과정을 거쳐 장교로 임관한, 그래서 모든 동문관계가 그러하듯 일정 부분 나와, 같은 경험과 경력을 공유한 사이였어요. 내게 있어 학군 선배란 하늘 같은 존재였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에 서줄, 말하자면 내 대신 기꺼이 총알을 맞아 주거나, 최소한 내가 총에 맞지 않도록 엄호사격을 해줄 사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지사장은 내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죠.
창고장과는 이 일을 협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기회에 공장장을 더욱 깎아 내리려고만 할 것이고 어쩌면 이 사건이 본사에 새어나갈지도 모르는 일이었어요. 28만불은 그 때나 지금이나 적은 돈이 아니었으니 그 정도 금액이 증발해 버린 사건에 연루되면 절대 무사할 수 없었습니다. 처리방법의 가닥이 잡히기 전까지는 보안을 지킬 필요가 있었어요. 창고장에게 고민을 토로한다는 건 어쩌면 파국만 앞당기는 꼴이 되기 쉬웠습니다.
결국 몇 주간의 고민 끝에 난 본사에 전부 오픈하고 양해와 지침을 구하자고 공장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건의했습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대로 두면 나중에 내가 몽땅 뒤집어 쓸 것이 뻔한 이 일을 언제까지나 덮어두고 쉬쉬 하는 것은 내 무덤을 파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장장의 입장에서는 전임 공장장이 플러스로 넘겨준 비자금을 자신이 공장을 맡은 1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플러스를 유지하긴 커녕 회사 돈 28만불을 비게 했다고 보고하는 것이 자살행위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 폭탄을 내게 넘기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날 대판 언쟁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5월에 들어서자 본사가 공장장의 주재기간 연장신청을 받아들였다는 얘기에 난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그는 불과 두 달 후에 귀국할 예정이었고 그간 임대한 큰 집이 꽉 차도록 현지에서 잔뜩 사놓은 원목가구들을 한국에 보낼 가장 저렴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공장장의 임기 만료 6개월을 앞두고 내가 자카르타 공장을 인계받기 위해 부임한 지 4개월 만의 일이었어요. 앞으로도 난 최소한 1년 넘게 넘버 투로 근무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뿐 아니라 창고장의 주재기간 연장신청도 일괄 승인되었다는 소식이 잇달아 들려 왔습니다. 넘버 투로도 둘 수 없다는 뜻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공장적자를 줄이기 위해 현지법인 내의 한국인 관리자 수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 본사의 당초 취지였으므로 내가 그 상황을 이상하게 받아들인 것은 당연했습니다. 애당초 공장장과 창고장을 귀임시키기 위해 부임해 왔던 내가 본의 아니게 마치 두 사람의 본거지에 어정쩡하게 빌붙은 형국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장장의 주재기간 연장신청이 받아들여지던 날, 어쩌면 역시 당연하게도 내 책상서랍 안에 보관하고 있던 비자금장부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 책상 서랍 자물쇠가 뜯겨 있었습니다. 공장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회수해 갔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어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본을 만들었는지 여부가 우려되어 뒤져 보았는지 듯 내 책상서랍 안의 내용물들이 모두 발칵 뒤집어져 있었습니다. 기가 찼습니다
3.
당초 귀임을 앞두고 몇 개월 째 거의 업무에 손을 놓다시피 했던 공장장과 창고장이 전처럼 풀가동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모든 업무를 내게 넘긴 공장장은 주재기간 연장신청이 받아들여진 후에도 많이 늦어진 출근 시간이 다시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골프회동도 획기적으로 늘어나 있었어요. 인도네시아에서의 마지막 해(?)를 보내는 의미에서인지 한국에서 방문해 오는 공장장의 본가, 처가식구들, 친척들도 부쩍 늘어났습니다.
충격적인 일들은 또 벌어졌습니다. 몇 년 전의 결산보고에 대해 세무서가 이제 와서 무더기로 승인을 거부했다는 것이 그 중 하나였습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2년 전 것까지 3년치가 반려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장장과 경리과장 이인이 부산하게 회동하기 시작하면서 내게 와있던 경리업무들도 공장장이 다시 회수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공장장은 주간회의를 통해 세무서에서 엄청난 뒷돈을 요구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보세공단 세관업무가 북부지청으로 이관되면서 실시된 재고실사 결과 재고가 대장과 너무 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적잖은 금액의 벌금을 청구 당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죠.
재고실사가 있기 전 그 일정이 이미 통지된 상태였는데도 공장장은 직원들의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 창고에서 제품 수십 박스를 꺼내 반출한 일이 있었습니다. 수출용 제품들은 수입관세를 물지 않은 자재들로 만들어진 것들이어서 무단으로 보세지역 밖으로 반출해서는 안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반출 자체가 원칙적, 절차적인 부분에서 불법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이미 세관실사 날짜가 공시된 마당에 무모하게 제품들을 무단 반출한 것은 세관실사 결과 발견된 재고차이로 인해 맞은 거액의 벌금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제품 반출 당시 정작 공장장은 골프를 치러 자리를 비워 그 박스들을 몰래 빼내 창고 앞에 세워둔 공장장 차에 실어 준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토록 공장장과 반목하던 창고장이었습니다.
"교회에 기부하는 거라는데 세상 일이 하나님 사업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어. 너도 아버지가 목사라면 알 거 아냐?"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본의 아니게 우리 아버지가 소환되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눈을 부라리던 두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말만 나오면 무슨 마술이라도 걸린 듯 한편이 되어 버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인 거고 신앙은 마침내 승리하는 것이죠. 하지만 기독교가 벌금을 줄여주진 않았습니다.
그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명백히 보이거나 짐작되기도 했지만 그 처리 방법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세무처리 문제는 역시 경험 많은 공장장이 처리하는 게 당연할 것 같았고 나도 이 기회에 그의 처리방법을 견학하면서 타락할 데로 타락했다는 인도네시아 세무행정의 실체를 경험하고 방어책도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관에서 맞은 벌금이나 세무서에서 반려된 세무보고로 인해 담판을 지으러 가는 날이면 공장장은 나는 물론 경리과장까지도 떼어 놓고 뒷돈으로 준비한 수 만 불이 든 돈가방을 들고 혼자 약속장소로 나간다는 점이었습니다. 난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 세관원, 세무서 직원들과 안면을 트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동행하겠다고 얘기했지만 공장장은 그때마다 불같이 화내며 단칼에 거절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정말 그 사람들을 만났는지는, 그 돈이 정말 전달되었는지는 오직 공장장 혼자서ㅁ 알 수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세금이나 벌금은 별로 줄어들지도 않았어요. 아무런 결과도 없이 돈만 사라졌는데 어쩌면 그것도 공장장이 믿는 신이 내린 기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기적 같은 일은 또 벌어졌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공장장과 창고장이 거의 같은 시기에 서울에 아파트를 샀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시내 지사장도 거의 같은 시기에 서울 아파트를 샀습니다. 공장의 적자는 날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한국인 관리자들의 경제력은 획기적으로 높아져 갔습니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저녁식사에 초대받아 공장장의 으리으리한 임대저택에 모였는데 초대형 거실엔 고가의 원목가구들 수십 개가 빽빽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얼마 전에 가본 창고장의 대형주택에도, 월 천불도 될까 말까한 주택을 월 2천불에 임대했다고 빡빡 우기는 지사장의 집에도 그런 가구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귀국할 때 이사짐으로 붙여 한국에서 팔면 이익이 많이 남는다는 경험자들의 이야기가 한창 돌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은 월급을 모두 가구 장만에 털어넣을 정도로 자금 여유가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그만큼 가구 장사가 노나는 일이었을까요? 인도네시아 생활 7년을 넘기고서도 또다시 주재기간 연장을 신청한 사람들이 한국에 돌아갈 때 붙일 이사짐들을 그렇게 준비해 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습니다.
부인들까지 모인 저녁식사 자리가 끝난 후 내 아내는 남편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장장 부인등과 따로 모여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물론 가정부 두 명, 아기가 있는 집은 유모까지 두는 것이 보통인 지사원 부인들은 한국에서와는 달리 남편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쇼핑이나 골프에 진력이 날 때쯤이면 품위 있게 티타임을 가지며 서로 모여 수다도 떨고 정보도 교환하는 거지요. 때로는 뒷담화도 즐기면서 말이죠. 하지만 가끔은 괜찮은 정보들이 오가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내의 좋은 식당들, 싸게 나온 차량이나 재임대 주택들, 공예품이나 수재가구 전문상점들, 그리고 돈 버는 법들.
지사장 부인은 주택 3년 임대계약을 하면서 주택임대계약서를 실제 임대료보다 월 천불 정도 높게 만들어 본사에 보고했고 그 결과 본사 결재승인이 나면서 자기 주머니로 굴러 들어온 알토란 같은 차액, 3만 6천불의 이익을 이웃 아줌마들에게 이미 수도 없이 자랑해 온 터였습니다. 인도네시아같이 더운 나라에 와 고생하며 살면서 돈도 못 벌면 바보라는 취지의 얘기를 하던 중이었겠죠. 그런 식으로 아줌마들은 각자 자기들의 무용담을 서로에게 뽐냈고 자카르타에 온지 얼마 안된 어리숙한 내 아내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 여자들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4.
어느 날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아내의 떨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공장장의 혼다 어코드가 우리 집 앞 모 공기업 주재원 집 앞에 서있다는 것이었어요. 공장장은 지금 공장에 있으니 그 차를 타고 간 사람은 공장장 부인이 틀림없었죠.
엄혹한 시집살이로 한때 심한 우울증까지 경험했다가 뉴욕 등을 거쳐 자카르타까지 온 그 공기업 주재원 부인은 한국에 비해 정신적으로 조금은 여유로운 해외생활을 하면서 심신이 많이 안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내 아내가 며칠 들르지 않자 대뜸 극도의 히스테리를 부렸습니다. 사실 마음의 병이란 그리 쉽게 낫지 않는 법입니다. 주재원 부인이 내 아내에게 니년이 뭐가 잘났다고 우리 집에 안오는 거냐, 너도 내가 미친 년이라고 깔보는 거지, 내가 니 남편 매장해 버릴 테니까 두고 봐! 하며 기염을 토한지 몇 시간 만에 우리 공장장 차량이 그 집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별 일이 다 벌어지는 게 세상인데 아무 것도 아닌 일을 맘대로 해석하고 오해하면서 급기야 광분하고 마는 사람도 분명 있기 마련입니다.
아내는 인생의 질곡을 겪은 연배의 그 여자를 측은히 여겼고, 아내 자신도 지인들이 널린 한국을 멀리 떠나와 외로움을 타고 있었으므로 그간 서로 살갑게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공장 한국인직원 부인들의 돈씀씀이를 따라가지 못해 따돌림 받던 아내에겐 그 여자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이웃이었습니다. 마치 나에게 아내와 시내 지사장이 유일하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람들이었던 것처럼요. 하지만 아내에게 말해 준 회사에 대한 내 고민들이 아내에겐 말도 못할 더 큰 마음 속 응어리가 되었다는 걸 미처 헤아리지 못한 사이 아내는 그 이야기들을 그 주재원 부인에게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늘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공감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던 그 여자가 어느날 갑자기 아내가 했던 그 얘기들을 무기 삼아 매섭게 협박해 올 줄을 아내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공장장 부인과 교회에서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것도 아내는 몰랐습니다. 한 다리만 건너면 누구나 다 알게 되는 교민사회에서요. 그 여자가 남편을 매장시키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덤벼든 것은, 그래야 할 타당한 이유는 없었지만, 얼마든지 그럴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내에게 나는 짐짓 걱정 말라 말했지만 당시 비자금 장부 문제로 나빠질 대로 나빠진 나와 공장장 사이를 감안하면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불보 듯 했습니다. 공장장 부인은 그 주재원 부인의 터져나오는 방언을 거의 동시통역 하듯 남편에게 옮기는 모양이었고 그래서 쉴 새 없이 사무실에 계속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공장장이 매번 전화가 끝날 때 마다 공장장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점점 험악해졌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날, 그리고 그 다음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공장장이 여자들끼리의 일이라 생각하고 대범하게 넘기는 대인배가 된 건 아닐까 잠시 생각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냉랭한 사무실 분위기를 보면 절대 그런 게 아니란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공장장은 뭘 기다리는 것일까요?
며칠 후 출근했을 때 시내 지사장이 내게 미리 알리지도 않고 아침 일찍부터 공장에 와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공장장, 창고장과 함께 회의실로 나를 불러들였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지사장이 앞장 서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내미는 '징계요청서'라는 것을 보고 기가 찼습니다. 상기인은 지사근무와 공동체 생활에 부적합할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한국인 사회에서 당사의 품의와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로... 그들이 내 코 앞에서 흔들어 대던 그 서류엔 자기들 서명이 빽빽이 되어 있었지만 정작 내가 서명하거나 한 마디 첨부할 공간은 애당초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날 당황스럽게 한 것은 그동안 내가 털어놓았던 고민을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몰래 해두었던 메모를 꺼내 들고 공장장과 창고장 앞에서 흔들며 “맞지? 네가 이렇게 얘기했었잖아?” 라며 의기양양해 하던 지사장의 표정이었습니다. 그는 날 보호해 주어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학군선배이었고 정의롭고 자랑스러워야 할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장교였는데 내가 공장장과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던 그 순간, 도움을 요청하며 내민 내 손을 기꺼이 잡아주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 동안 공장장에게 내 동태보고를 하며 함께 대책회의를 했던 간첩이었던 것입니다.
공장장 부인이 그 공기업 주재원 부인을 방문한 바로 그날 밤, 시내 지사에서 긴급회의까지 소집했던 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그렇게 징계요청서를 준비하는 등, 모든 준비를 다 마친 후 다함께 나를 난도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외인 것은 창고장도 벗겨진 머리 끝까지 벌겋게 흥분하여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창고장이 열을 내는 이유는 그가 능력도 없고 회사월급이나 축내는 주제에 미국이민 가겠다는 헛된 꿈을 꾸며 미국대사관이나 들락거린다는 뒷담화를 내가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공장장과 지사장이 만나면 늘 창고장을 씹던 단골메뉴였어요. 나나 아내는 오히려 창고장의 입장을 이해하며 대체로 동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공장장과 지사장이 이간질을 한 것입니다. 완벽한 사냥을 위해 그들에겐 창고장이 꼭 필요했던 거죠. 분명 서로 입장이 다를 세 사람을 그렇게 손발이 착착 맞는 팀워크 뛰어난 한 팀으로 묶은 결정적 매개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그 세 사람이 한국에서 동시에 장만한 그 아파트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전세값을 속였다고 어떤 놈이 그래? 이 새끼, 아주 회사 말아먹을 놈이네. 야, 이 새끼야! 니가 그렇게 해쳐먹으려고 마음 먹었던 거 아냐? 니네 집 전세 계약서 어딧써!?" "넌 뭐가 그렇게 떳떳하고 깨끗해서 난리야? 세상 물정 모르면 가만히나 있어!!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치데? 너희 아버지 혹시 사이비 목사 아냐??"
그렇게 사전에 주의를 들었건만 외국의 좁은 교민사회에서 아내를 충분히 조심시키지 못한 것은 분명 큰 실수였습니다. 하지만 지사장이 내 등에 칼을 꽂으리란 건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직접적인 이유는 그 공기업 주재원 부인과 공장장 부인이 톡톡히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지만 공장장은 그 28만불 비자금 문제를 겉핥기 식으로나마 들어본 사람이 회사 외부에 있다는 사실이 큰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 뻔합니다.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내가 더 입을 열기 전에 반드시 짓밟아 제거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번 한번 만은 이 사태를 본사에 보고하지 않고 봐줄 테니 앞으로 행동 똑바로 하라고 엄포를 놓는 것으로 그날 아침의 난리를 대충 마무리 짓는 듯했습니다. 난 시내 지사로 돌아가는 지사장을 공장 주차장에서 따라 잡았습니다.
“선배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검정색 토요타 코롤라 승용차 뒷자석에 타려던 지사장은 뒤돌아보며 내게 눈을 부라렸습니다.
“착각하지마, 이 새끼야! 내가 왜 네 선배야? 너 같은 새낀 내 후배도 아니야!!”
거기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상이한 가치관의 체계가 있고 그래서 나름대로의 우선순위 역시 각각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는 그를 학군선배로 대했지만 그는 나를 입사동기인 공장장의 입지를 위협하는 공동의 적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날 내 등을 찌를 때까지 그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 감정을 애써 드러내지 않고 내가 더 많은 얘기를 하도록 유도하면서 결정적인 기회를 노린 것이죠. 비자금 장부에 그의 이름이 여러번 등장했는데도 불구하고 설마 그가 이런 더러운 문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애써 부인할 정도로 난 너무나 순진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지사장은 그날부터 자기 감정을 더 이상 내게 숨기지 않았습니다.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총공격을 받았던 그 아침 사태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끊임없이 걸려오는 괴전화에 시달렸습니다. "나 코리아 센터에 있는 미스터 리란 사람인데, 야! 이 개자식아!! 너, 지사생활 똑바로 못해? 어디서 교민선배들한테 지랄을 해? 가족들 모두 한국에 무사히 돌아가고 싶으면 공장장 제대로 모시란 말이야!" 괴전화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자기가 할 말만 하고는 뚝 끊기곤 했습니다. 마치 교민사회 전체가 모두 한 통속이 되어 날 비난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절대 그럴 리 없는데도요.
그 와중에 본사 의류팀 동료들의 격려전화가 위안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난 사건들을 어느 새 본사에서도 대충 알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공장장 일당이 흔들던 '징계요청서'는 본사에 날아가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당시 사건에 대한 공장장 버전, 지사장 버전의 이야기는 이미 본사에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중국 신장성 우르무치 지사 사무실에서 내 입사동기가 지사장을 때려 눕히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회사의 여론이 지사장과 대립각을 세우는 지사원들을 비난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나의 원래 소속팀장이자 대학선배였던 의류팀장마저 전화통화 중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정을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도 공장장, 지사장의 입사동기였습니다. 지사생활이 투쟁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면서 피아를 구분하는 일은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 견뎌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집으로도 쉴새 없이 걸려오는 이름 모를 남자들의 괴전화를 아내가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들은 온갖 무서운 말로 아내를 위협했으므로 아내는 전화벨만 울리면 경기를 하곤 했습니다. 그 위에, 예의 그 공기업 주재원 부인은 아무 이유도 없이 이따금 골프채를 들고 우리 집 철제 정문을 사정없이 두들기다가 돌아가곤 했어요. 마음의 병이 정말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날로 수척해지는 아내의 눈물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며 나는 이사를 가거나 가족들을 한국으로 돌려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5.
내가 살던 간다리아(Gandaria) 주택단지 주택의 임대기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주택 임대료가 자카르타 남부에 비해 3분의1 정도인 북부 끌라빠가딩(Kelapa Gading)으로 이사하겠다는 품의서를 계속 반려하던 공장장이 다시 올린 마지막 품의서를 며칠째 결재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좀 황당했습니다.
"우리같은 대기업이 지사원들을 끌라빠가딩같은 촌동네에 살게 할 줄 알아? 지사원들은 슬라딴(Selatan ; 남부)에 살아야 되는 거야. 끌라빠가딩은 고졸들이나 공장 기술자들이나 사는 곳인데, 얘가 회사를 뭘로 보는 거야? 너 정신이 있는 놈이야??"
실제로 우리 공장 한국인 생산직 관리자들도 끌라빠가딩에 살고 있었지만 당시 적잖은 화이트칼라들도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줄곧 살아온 사람에게 지방 소도시가 잘 상상되지 않듯 인도네시아 주재기간 내내 번화한 남부 자카르타에 살던 공장장에게는 끌라빠가딩이 마치 오지 촌구석 같은 이미지가 선입격으로 들어차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가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더 농후한 게 사실이었어요. 그가 언급한 끌라빠가딩에 사는 고졸이란 창고장을 뜻했습니다. 창고장 역시 공장장이나 시내 지사장처럼 사규가 허용하는 주택임대료를 최대한으로 사용해 끌라빠가딩에서 으리으리한 집을 임대해 살고 있었어요.
공장장의 그런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끌라빠가딩은 기본적으로 자카르타의 북부 부심이었고 비교적 호화로운 남부 지역만은 못하지만 당시 최소한의 주거환경이 갖추어진 적당히 안전하고 임대료도 저렴한 외국인 주거 가능지역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공장이 있는 짜꿍(Cakung) 보세공단과 가깝다는 것이 큰 이점이었습니다. 월 수천 불짜리 크고 좋은 집들이 있는 자카르타 남부에 살면서 품위 있는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공장까지 차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매일 달리는 건 지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누적결손이 산더미 같은 회사에 일하면서 남부 고급주택지에서 폼 잡으며 살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살아도 되는 세상이란 걸 십수 년이 더 흐른 후에는 나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지만 공장장은 끝내 내 끌라빠가딩 주택임대 품의서에 서명해 주지 않았으므로 나와 가족들은 이미 계약기간이 끝나버린 기존 주택에서 한 달씩 임시로 임대를 연장하며 어정쩡하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사실은 내 주택임대는 물론이고 내 인도네시아 근무기간을 더 이상 지속시킬 마음이 없다는 것은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공장장의 압박과 괴롭힘이 따갑도록 느껴지던 시기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퇴근 길에 아리스가 내 차 뒤에 따라붙고 있었습니다.내가 특별히 훈련 받은 것도 아닌데 단번에 미행을 눈치챌 정도로 아리스의 미행실력은 어수룩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가 날 미행당한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것도 없었습니다. 공장장은 일과 후에 내가 누구를 만나는지 궁금했고 초조했던 모양이지만 난 그가 경계할 만한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술집에 들르면 아리스의 차는 멀리 뒤쪽에 서 있다가 결국 내가 집에 들어설 때에서야 내 주택단지 앞에서 차를 돌리곤 했습니다. 아리스가 뭐든 어려운 일 있으면 자기에게 부탁하라며 사무실에서는 내게 살갑게 굴었지만 수출팀이나 사무실 여직원들은 그를 조심하라고 내게 속삭였습니다. 내가 생산현장으로 내려가거나 외출하여 사무실을 비우면 아리스가 쪼르륵 공장장실로 달려가 내 전날 행적을 보고한다는 것이었어요. 아리스는 자신을 총애했던 전임 공장장이 본사 귀임한 후 한동안 느슨해졌던 자신의 입지를, 이민국이 공장에 처들어오도록 자작극을 벌이거나 그렇게 나를 팔아먹는 방식으로 다시 성실하게 다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내가 자주 가던 술집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단골 말친구가 되어 주었던 한 아가씨가 직장을 옮겼다며 전화를 해왔습니다. 옮긴 술집으로 한번 왕림해 주십사 하는 의례적인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전하는 소식에 나는 또다시 등에 칼을 맞은 기분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전 직장을 그만두기 전, 역시 그 술집 단골이었던 지사장이 몇 번씩이나 그녀를 불러 내가 거길 자주 오는지, 주로 누구랑 술을 먹는지 집요하게 물었다고 합니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지사장의 술친구들도 나에 대한 질문을 해왔다는데 코리아센터의 미스터 리처럼 그들도 지사장의 사주를 받았음은 두 말할 나위 없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그리고 공장장에게 매우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고 반드시 뭔가 중대한 위해를 가하기 위한 준비라는 심증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부담스러운 상황이 그녀가 직장을 옮긴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굳이 날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복잡한 일을 피한 것이기 쉬웠지만 어쨋든 서로 보살펴 주며 살아야 하는데도 사실은 상대방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직장 속 한국인들보다 그녀는 훨씬 나은 사람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생활 1년이 좀 넘을 무렵 모든 게 피곤해졌습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시작했던 지사 생활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내는 꼬챙이처럼 말라갔고 77kg이던 내 몸무게도 66kg까지 떨어졌습니다. 주변의 지인들은 암이 아닌가 의심하며 종합검진을 받아 보라고 종용했지요.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술과 담배는 늘어갈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짜꿍(Cakung) 톨을 달리다가 차에서 뭔가 타는 냄새가 났습니다. 급기야 차체가 자꾸 왼쪽으로 기울었고 곧 뒤쪽에서 굉음이 나며 차체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브레이크를 살짝 밟자 차가 요동을 쳐 기겁을 하며 발판에서 발을 떼고 차가 저절로 멈출 때까지 굴러가도록 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차가 멈춘 갓길에서 차를 살펴 보다가 왼쪽 뒷바퀴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거리고 있는 모습에 흠칫 놀랐습니다. 내가 탄 차 바퀴가 그렇게 너덜거리는 모습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되었을까요?
하필이면 운전사가 출근하지 않아 내가 직접 운전하던 날이었어요. 운전 경력은 꽤 오래된 편이었지만 한국에서조차 단 한번도 직접 타이어를 갈아보지 않은 내가 넥타이를 풀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마침 고속도로 관리회사 순찰차가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터진 바퀴를 순식간에 스페어 타이어로 교체해 주었는데 다른 바퀴들을 살려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견인차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차가 달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였어요. 그들은 바퀴 옆면을 가리켰습니다. 그곳을 자세히 들여다 본 나는 또 한 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퀴에 깊은 칼자국들이 여럿 나 있었던 겁니다. 다른 바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젯밤 차를 집에 주차한 후 오늘 아침 내가 차를 몰고 나오기 전까지의 어느 시점에 누군가 몰래 내 바퀴들레 손을 댔던 겁니다.
만약 앞바퀴가 먼저 터졌다면 난 아마 차와 함께 고속도로 어느 구석에 곤두박질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바퀴뿐 아니라 뒷바퀴에도 정성스럽게 칼자국을 내놓은 범인의 남다른 성실함이 오히려 날 살렸습니다. 뒷바퀴가 먼저 터진 건 천운이었습니다. 당시 들리던 소문으로는 20만 루피아, 그러니까 당시 환율로 100불 정도가 청부살인의 정가였고 돈이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무리들을 몇 다리만 거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어요. 그래서 그 두 배 이상의 돈을 주면 청부는 몇 명의 손을 건너가 나중에 범인이 잡히더라도 살인을 사주한 원청자를 찾기 힘들다는 거였죠.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누군가 쉽게, 저렴하게 죽일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내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내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누구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싱거울 정도로 뻔했습니다. 아마도 그 즈음에 공장장과 지사장은 내 손발을 묶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을 했던 겁니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건 단순히 날 본사로 쫓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비자금 28만불과 재고문제와 막대한 뒷돈의 행방과 처리방식, 그리고 그들의 아파트에 대해 내가 다시는 말할 수 없도록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피해망상이었을까요? 그럼 저 칼자국은 내 눈에만 보이는 헛것이었을까요?
피해망상이 빚어낸 환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바퀴들에 나있는 칼자국은 너무 깊고 선명했습니다. 견인차가 왔지만 정비소에서 한가하게 차나 고치고 있기엔 감정이 너무 격앙되어 견인차 운전사에게 돈을 쥐어주고 정비소가 아닌 우리 집으로 끌고 가도록 부탁했습니다. 차만 돌아가면 아내가 놀랄까봐 나도 그 날 출근을 포기하고 견인차와 함께 집에 돌아 갔어요. 바퀴 상태를 본 아내는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인도네시아 현지법인에서 근무하는 동안 난 내 천성이 반골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런 남편과 사는 아내의 고초가 크다는 것도 그 즈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멀쩡히 출근한 나를 본 공장장 얼굴에 일순간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고 생각한 건 그저 기분 탓이었을까요?
6.
공장은 결국 문을 닫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공장설립 자체를 반대했던 전무가 뉴욕지사장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공장철수를 다시 주장한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공장은 매년 적자폭이 늘어나고 있었으니 그 주장을 반박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의류팀과 공장 존속을 위해 발벗고 나서야 할 우리 의류팀장이 오히려 공장철수에 앞장 서 동의하고 강행시켜 의류팀을 공중폭파시킨 것은 예상치 못한 전개였습니다. 화공품이 주력이었던 회사의 한쪽 구석에서 밤을 세워가며 옷을 만들고 전세계 바이어들의 문을 두드리며 열정을 불태운 고참들과 인도네시아 파견조건으로 입사해 발령을 기다리던 인니어 전공 직원들은 허탈할 따름이었습니다. 의류팀의 해체는 무역부문 일반상품부 전체를 와해시키는 도미노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공장 회생을 위해 팀원들이 제기한 수많은 제안들은 시도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이나 거래선에 대한 뒷 수습도 없이 막무가내로 공장을 닫고 의류팀을 없애는 상황에서 환멸을 느낀 의류팀원들이 따로 회사를 차려 나가자는 움직임을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급박한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본사엔 의류팀장이 있었다면 자카르에선 공장장의 활약이 컸습니다.
손해를 무작정 떠안는 공장폐쇄보다 일부라도 투자회수가 가능한 공장매각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나름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직원들이 모두 철수한 후까지도 그 혼자 자카르타 현지에 남아 공장매각에 올인하는 정성을 보였던 것은 일견 회사를 위한 희생정신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가 김춰고 싶은 비밀들을 영원히 묻어버리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본사 감사팀에서 발견했다면 줄초상이 나고 말았을 그 비자금 28만불과 경리상의 추가지출, 지출오류, 과다지출, 허위지출 등을, 회사를 인수하러 온 벨기에 회사에게 떠넘긴 것이죠. 공장장은 공장 매각 협상의 한국측 대리인 자격으로 남아, 벨기에 회사가 그의 치부를 덮는 조건으로 공장을 거의 헐값에 넘겼습니다. 그런 짓을 '배임'이라 부른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그 벨기에 회사는 모든 설비와 숙련공들을 인수하면서 공장의 채무는 하나도 인수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회사는 결국 엄청난 손실을 기록하면서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족들과 함께 자카르타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 벨기에 회사와의 공장매각 이야기는 시작도 되기 전이었습니다.나는 원래 5년 예정으로 부임했다가 불과 1년 반 만에 자카르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창고장만이 유일하게 우리 가족들을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습니다. 나의 날개가 꺾인 후 그는 공장장과 지사장의 공적이라는 원래 위상을 빠르게 회복했습니다. 자신도 내 날개를 함께 꺾었으면서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내 귀임에 대해 공장장을 탓했습니다. 내가 출국장에 들어설 때까지 줄기차게 공장장을 씹고 또 씹지 않았다면 자카르타를 떠나는 내 마음이 그렇게 더럽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 감정을 들키진 않았습니다. 난 어느새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무뚝뚝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자카르타로 출발할 때만 해도 인도네시아 공장을 흑자로 전환시킬 유일한 대안처럼 나를 추켜 세우던 사업부장이나 기획실은 나의 귀임에 냉담으로 일관했습니다. 곧 해체될 거란 이유로 의류팀 원복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인사팀장은 내가 무슨 감정이라도 있는지 능글스러운 미소를 띄 얼굴로 빈정거리며 이죽거렸습니다. 그는 조롱하듯 여직원 책상 옆에 작은 의자 놓고서 나보고 거기 앉으라고 했는데 그게 소위 대기발령이란 것이었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도 얼마 전까지의 자카르타와 별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공장철수의 일등공신이었던 의류팀장은 날 쌤플실에 불러 놓고 자잘못을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의류팀장은 내게 대학선배였지만 공장장, 지사장과 입사동기이기도 했습니다. 내 편이 아니라는 뜻이죠.
"박대리, 저 새끼, 나가서 회사 차린다고 설치는데 넌 따라 나가더라도 딴 애들은 흔들지 마. 너희들이 애들 월급이나 제대로 주겠어? 공장 말아먹은 주제에 너희 놈들 회사 차려봐야 석 달도 못가 문닫을 게 틀림없어. 괜히 애들 장래까지 말아먹으려 들지 마!" 감격스러운 환영사였고 그는 내가 회사를 나가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자카르타를 출발하기 전부터 박대리로부터 같이 나가 회사를 차리자는 제의를 받고 있었고 팀원 대부분이 따라 나가기로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자카르타에서 그 일들을 겪고서도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내가 입사할 당시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지배적이었고 내가 오래 몸담았던 대기업을 떠나 이름도 없는 작은 회사를 만들어 나간다면 은행과 거래선의 냉대를 받으며 오직 맨몸으로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언젠가 공장장, 창고장, 자카르타 시내 지사장도 임기를 마치고 되돌아올 본사에서 그들과 다시 마주치는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곤 했습니다. 최소한 그들은 내 죽음을 공모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이거 뭔지 알지?
난 자기 방으로 부른 기획실장도 내 대학 선배였고 같은 영어과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것만으론 피아를 식별하기에 충분한 정보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책상 위에 펴놓는 서류엔 눈에 익은 공장장, 창고장, 지사장 서명이 빼곡히 들어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본 징계요청서였어요. 그게 세 통씩이나 놓여 있었습니다. 연락소장이 생색을 내며 요번엔 봐주겠다던 그 징계요청서는 물론 그 앞뒤로도 내가 알지도 못하던 징계요청서가 모두 세 통씩이나 기획실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내 서명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것은 내가 비자금장부를 받은 후 공장장과 설전을 벌이던 시기의 것이었습니다. 공장장은 내가 비자금 폭탄을 순순히 인수하지 않자 당장 징계요청서를 써서 본사에 보냈던 것입니다. 나 몰래 내 서명까지 위조해서 말입니다. 세 번 째 것은 아주 최근이었습니다. 충격이 반복될수록 그 체감 강도는 정말로 점점 약해집니다. 그래서 그 징계요청서를 보고 공장장 일당에 대한 환멸이 또 한번 밀려왔지만 그리 충격적이진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런 사람들이란 걸 안지 이미 오래였으니까요.
"이 정도면 널 파면시킬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기회를 줄게. 우리 회사에서 요번에 오러클이라는 시스템을 들여오는데 그 TF팀에서 들어가서 같이 일하면..." 그렇게 말하는 기획실장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징계요청서를 본 순간, 이 회사를 떠날 때가 되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회사를 그만두는 과정에서 인사팀장은 사규를 들먹이며 그 동안 지사에서 받은 주재수당과 주택수당을 모두 토해 내라고 위협했고 담당이사와 사업부장은 다시 한번 잘해 보지 않겠냐며 손을 내밀었지만 그게 그들의 진심일 리 없었습니다. 회사 입사가 간단치 않았던 것처럼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안볼 생각으로 욕설을 퍼붓고 돌아선다면 모를까, 원만히 한 시대를 마감하는 것은 대단한 인내를 요하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마음부터 이미 회사를 떠난 상태.
몸은, 그렇게 떠난 마음을 따라갈 따름이죠.
7.
오래 몸담았던 첫 직장을 그렇게 떠났습니다.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같이 고생해온 팀 동료들과 넓은 세상에 나가 힘을 합쳐 일해 본다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린 생각했죠. 크게 성공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그 모습을 본사에, 의류팀장에게, 저 공장장 일당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고요. 하지만 그런 식의 마음을 먹고 시작하는 사업은 이상하게도 잘 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태국에서 시작한 아시아 외환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하면서 우리들 역시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본사로 돌아온 공장장과 창고장은 경제위기가 닥치자 앞다퉈 희망퇴직을 신청해 몇 배의 퇴직금을 받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최소한 공장장은 결국 회사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충분한 이익을 챙긴 셈이었습니다. 그 후 난 그에 대해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여전히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면서 그 독실한 신앙으로 신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성공적인 청교도적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허물이 있다 한들 원래 기독교는 모든 죄를 사해 주는 편리한 종교이니까요.
창고장은 회사를 그만 둔 후 적잖은 나이에 카센터에 나가 차량정비를 배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근교에 자기 카센터를 열었습니다. 원래 정비기술을 배워 미국에 이민가면 관련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우선은 서울 외곽 신도시에 안착한 것입니다. 그가 꿈에도 그리던 미국 이민을 가서 시민권을 손에 쥐게 되었는지 그 후의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언젠가 그토록 자신을 업신여기던 공장장과 지사장 면전에 자랑스럽게 그린카드를 들이 미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지사장은 자카르타 임기를 마치고 본사에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장으로 승진하는 등 한동안 승승장구했습니다. 우르무치 지사장이 되어 또 한 번 해외근무를 하기도 했던 그는, 그러나 몇 년 간 임원 승진에 연달아 실패하다가 결국 후배들에게 밀려 회사를 떠나게 됩니다. 자카르타에서 불거졌던 문제들이 당시엔 비록 공장장 일당의 완승으로 끝났지만 그 흔적이 오래도록 남아 결국 그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회사를 떠나면서 자기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은 나에게 치를 떨며 저주를 빌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가 강남 어딘가에서 볶음밥집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던 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인도네시아에 돌아와 내 사업을 하다가 가물에 콩나듯 한국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을 때 한번 그가 한다는 한 오피스빌딩 지하 식당가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친구들 한 명 데려갔는데 직접 서빙까지 하던 지사장은 짐짓 날 알아보지 못한 척 했고 나 역시 굳이 아는 티를 내지 않았습니다.
“많이 드세요.”
내게 담아준 볶음밥은 같이 간 친구의 것보다 두 배쯤 되는 양이었는데 거기 그의 사과의 마음이 담겼는지 그거 먹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떨어지라는 뜻이었는지 물어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가 내 등에 비수를 찌르지 않았다면 난 학군선배들은 모두 내 편이란 착각 속에 평생을 살며 누군가에게 더 험한 꼴을 당했을 지도 모르니까요. 그는 인간이 얼마나 야비하고 파렴치해질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공장철수에 누구보다도 앞장 섰던 의류팀장만은 뉴욕지사장 출신 전무의 눈에 들어 회사에 오래도록 남았고 훗날 상무보까지 승진했습니다. 자카르타의 저주가 그에게는 미치지 않았던 거죠.
이 사건은 정말 오래 전 일이지만 평생 떨쳐낼 수 없는 경험을 하면, 전역 후 아직 군복무를 하고 있는 꿈을 꾸며 식은 땀을 흘리듯 오랜 시간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난 지금도 그때 일을 곰곰히 곱씹아보곤 했습니다. 특히 고속도로에서 뒷바퀴가 터졌던 그 사건이 꿈 속에서는 앞바퀴가 터지며 갓길 숲 속으로 쳐박히는 사고로 전개되곤 했습니다. 군시절, 보병 1사단 송학 OP로 오르던 도로에서 뒤집힌 찝차가 지뢰지대 안에 처박힌 장면을 목격한 것이 무의식 중에 오버랩되었던 모양입니다.
문득 그날 내 운전사 수하르디가 왜 출근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수하르디는 내가 의류팀 친구들과 동업하는 과정에서 다시 자카르타에 돌아왔을 때에도 회사 운전사로 다시 불러 들여 5년 정도 더 일했던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뜬금없는 깨달음이 뒷북을 치며 벼락같이 찾아 왔습니다.
난 그 동안 자정이 넘어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간에 도둑고양이처럼 담장을 넘어 내 차고에 스며들어 날카로운 나이프로 차바퀴 옆면에 깊은 칼자국을 새겨 넣는 범인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그 범인은 험상궂은 조직폭력배의 얼굴이기도 했고, 사실 더 많은 경우 공장장의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상력을 배제하고 팩트만을 보자면 그 사고 직전, 마지막으로 내 차를 만졌던 사람은 수하르디였어요. 만약 평소와 다름 없는 출근길에 앞바퀴가 터져 차가 뒤집히고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대형사고가 났다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을 사람은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내 운전사 수하르디도 꼼짝없이 변을 당할 판이었죠. 그러나 그는 특별히 지각이 뛰어난 수호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기가 막힌 타이밍에 아프다고 연락하고는 출근하지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아침 내가 직접 운전하다가 혼자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우연은 그런 식으로 벌어지진 않습니다.
그 놈이었어? 수하르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난 그간 그를 의심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내가 왜 그런 가능성을 아예 배제해 버렸는지 불가사의할 지경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공장장이나 지사장, 또는 그들의 사주를 받은 아리스로부터 돈을 받고 사고 전날 퇴근 직전에 내 차 바퀴에 손을 대고서 다음 날 하루를 쉬면서 내 사고소식을 기다렸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하지만 내가 사고에서 살아남자 절대 의심받지 않으리라 확신한 수하르디는 다음 날 다시 천연덕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던 것이죠. 공소시효가 있다면 이미 시한만료되었을 사건이지만 언젠가 수하르디를 다시 만나면 그때 일의 전말을 꼭 물어보고 싶습니다. 십 수년 전 마지막 전화통화를 했을 때 수하르디는 당뇨 합병증을 앓고 있었고 이후 연락이 끊어졌는데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 오래동안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던 의구심은 왜 많은 차장-부장들, 심지어 고참 과장들을 놔두고 회사가 왜 사회경험 일천한 과장 1년차인 나를 후임공장장으로 내정해 인도네시아로 보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시절 소대장으로서 관리경력을 인정받은 것일까 하는 순진한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회사가 그런 것 감안하는 섬세한 조직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전과정을 돌아보면, 난 직급도 미치지 못하고 공장을 관리할 수 있는지 역량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카르타 공장 후임 관리자로 내정되었고 자카르타 도착 후 공장장은 나를 회유하려고 많은 공을 들였죠. 그러다가 공장운영방식과 비자금 문제에서 부딪힌 후 당장 그날 징계요청서를 본사에 보낼 정도로 날 곧바로 밀어내려 했고 급기야 차바퀴에 칼자국을 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배후엔 입사동기 3인방, 즉 공장장, 자카르타 시내 지사장, 본사 의류팀장이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장이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 화공전문회사인 우리 회사가 해외의류공장 관리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 최악의 경우 공장 문을 닫게 될 경우 누군가 그 책임을 져야 하며, 그간 공장에서 벌어진 온갖 영업, 회계, 인사 등의 제반 문제들이 불거지거나 유출된다면 공장장은 물론 본사 의류팀이나 일반상품부, 그 위 상무실까지도 책임을 면치 못할 터였습니다. 그러니 내가 비자금 인수인계를 거부한 이후 본사 의류팀장이 스스로 발벗고 나서 공장폐쇄의 일등공신이 되려 한 것이고 공장장과 지사장은 내가 한국으로 쫓아내는 과정에서 죽이려고도 하고 결국 날 완전히 망가뜨리 본사에서 내가 하는 말을 전혀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죠.
공장에 내재한 중대한 문제들을 잘 알면서도 회사가 과장 1년차를 공장장 후임으로 보낸 것은 내가 공장을 기적적으로 회생시키는 수완을 발휘하리라 기대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 그때 내가 총알받이였구나......
이런 깨달음은 그 사건으로부터 30년 쯤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었습니다. 모든 걸 뒤집어 써야 할 사람이 비자금 인수를 거부하고 오히려 공장운영에 문제를 제기하자 내가 인도네시아로 발령나도록 기여한 사람들은 이제 눈엣가시가 된 나를 폐기하려 했던 것이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0년대 자카르타의 한 지사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2021. 12. 4
(2000년 경의 원본과 2008년, 2012.10. 24 (Rev) 수정된 원고들의 재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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