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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우리들의 시간

beautician 2019. 10. 13. 09:45


우리들의 시간

 




 

천지창조 이후 세대에 걸쳐 아담 후손들이 대략  가까이 살았다는 성서의 증언은 인류 역사가 처음부터 초고령사회로 시작했다는 의미일 있습니다그게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했는지 하나님은 노아의 방주 사건 이후 인간의 수명을 서서히 줄여 결국 100년쯤으로 세팅해 놓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면서 빨리 죽게 만든 걸까요? 물론 100년조차도 우주와 역사를 통찰하는 존재에게 한낱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인간 개인이 맨몸으로 감당하기엔 여전히 너무 시간입니다.


예전 살롱프로 잡지의 사주 히다얏씨가 처음 변하기 시작하던 순간을 기억합니다그는 오래전 수하르토의 철권통치에 맞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다가 폐간당한 템포(Tempo)지의 해직 기자 출신입니다수하르토가 32년간 지켰던 권좌에서 마침내 밀려나고 인도네시아에 민주화바람이 후에도 그는 정치기자로 돌아가지 않고 대신 당시 불모지였던 인도네시아 미용잡지 시장에 뛰어들어 살론프로(Salon Pro)지를 창간했습니다지금도 현지 미용시장에서 가장 유력한 매체입니다뛰어난 통찰력과 놀라운 친화력을 지닌 그와의 대화는  지성의 한계를 시험하는 참신한 경험이었습니다

 

알츠하이머가 찾아왔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지성적이고 친근했습니다하지만 이내 대화가 곧잘 엉켜 갈피를 잡지 못했고 말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는 모습이 지인들에게 충격적이지 않을  없었습니다나도 그가 이상해졌다는 느꼈는데 그후 6개월쯤부터 이상 히다얏 씨를 공식석상에서 없었습니다너무나 갑작스러운 퇴진이었어요빛나는 지성조차 알츠하이머 앞에서는 하릴없이 녹슬어 무너져버릴 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치매는 강단을 떠나자마자 곧바로 찾아왔습니다피아니스트로서 한국교회음악에 나름대로 발자취를 남겼고 핸드벨 연주를 한국에 처음 도입해 대중화에 앞장섰던 어머니는 70세가 넘어 비로서 경제활동을 마쳤습니다당시 어머니는 몇년 지속적인 기억력 감퇴를 겪었고 그래서 가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지만 아직 아무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그러다가 어느날 어머니는 혼자 집을 찾아올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활달해 친구들과 수다 떨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면누가 조금만 신경을 쓰고 관리해 주었다면치매가 그렇게 빨리 진행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자식들이 보다 자주 찾아 뵈며 귀찮도록 말도 걸고 여기저기 모시고 다녔더라도 조금은 도움이 되었겠죠하지만 어머니는 대체로 방치되고 있었습니다친할머니도 외할머니도 오랫동안 치매를 겪은 세상을 떠나셨죠. 너무나 후회스럽습니다.

 

 딸도 없는 집안에서 무심한 아들들이 제각기 가장이 되어 자기 자식들 챙기기 바쁜 사이 치매노인이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고령에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체구가 작아져 보이던 아버지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어머니를 찾아 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 여길 지키고 있어야 해요어머니가 돌아오실 텐데 지금 나가면 길이 엇갈려요.”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외출에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억 속의 당신은 날이 수록 점점 어려지더니 급기야 결혼 전으로 돌아갔고 이젠 우리 형제들 누구도 이상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우릴 낳았다는 잊고 것이죠. 하지만 남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은 몸에 배어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는 말에 최선을 다해 맞장구를 주려 노력했습니다. 어머니의 깊은 배려는 치매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번이나 길에서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탓할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나는 어찌할 없어 발만 동동 굴러야 했습니다다행히 경찰과 이웃들의 도움으로 매번 기적적으로 찾아 다시 모셔올 있었습니다하지만 상황이 아주 심각해진 적도 있습니다. 2 전엔 아버지가 잠시 한눈을 사이 어머니는 혼자 마포역에서 전철을 탔습니다형님 가족들이 마포와 공덕동 합정동 사이를 하루 종일 다니며 탐문했고 경철서에도 번씩이나 들렀지만 어머니가 어디로 가셨는지, 얼마나 멀리 가셨을지, 길이 없었습니다 한국 들어가는 비행기표를 백방으로 구했지만 당일 표는 하늘의 별따기였어요물론 내가 한국에 간다 한들 뾰족한 수가 없다는 알고 있었습니다하지만 하늘이 무너지는데 자카르타에 가만이 앉아있을 없었습니다.

 

저녁 8시쯤 거의 자포자기할 무렵 통의 카톡이 들어왔습니다어머니를 방화역에서 찾았다는 연락이었어요. 혼자 그리 멀리 가신 겁니다. 어머니는 누굴 찾아 어딜 가려 했던 걸까요? 갑작스러운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경찰이 끝까지 노력해 결과였습니다. 그날 눈물이 왈칵 쏟아진 우리 사회가 아직 만한 곳이라는 생각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게 결코 마지막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후에도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찾아헤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마다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이 옛날 가까이 살던 인간들 수명을 늘려주진 못할 망정 오히려 10분의 1 줄여버린 이유를 새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늙고 병들어 약해지고 초라해진 인간들 모습이 하나님조차 안쓰러웠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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