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막스 하벨라르

막스 하벨라르 삽화

beautician 2018. 4. 26. 11:58


삽화설명

 

대학졸업과 임관이 코 앞에 다가오자 함께 학군단에서 생활했던 ROTC 동기들을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거라 생각하며 섭섭한 마음에 뭔가 선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짬뽕국물을 안주삼아 소주 마시던 시절에 변변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어요. 그래서 결국 몇몇 친구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전공자가 아닌 사람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어딘가 닮은 듯 닮지 않은 애매한 그 그림들을 임관식 직전 받아든 친구들은 그래도 무척 좋아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드라마틱한 이별을 한 친구들 대부분을 며칠 후 광주 상무대 전투병과 훈련소에서 다시 만났을 땐 괜한 선물을 했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들었습니다. 그놈들을 요즘도 SNS에서 자주 만납니다. 30년이 훌쩍 지났는데 말입니다. 인터넷은 극적이어야 마땅할 인생을 너무 밋밋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좀 생이별(?)도 하고 그래야 하는 데 말이죠.

 

오래 살았던 인도네시아에서 언젠가부터 먹고 사는 일이 힘들어지면서 어쩌면 이곳을 곧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또 눈에 밟히는 게 인도네시아 지회의 ROTC 동문들이었어요. 떠나기 전 뭔가 선물을 하고 싶었습니다. , 인생 뭐 새로울 거 없습니다. 또 초상화를 그리기로 하고 동문 70명의 초상화를 1년 동안 그렸습니다. 그런데 잘 둘러보니 그리 간단히 철수하진 않을 상황이었는데 이번엔 보다 장대한 스케일로 또 오바해 버린 겁니다. 그러고 삽니다. 문제는 동문들 말고 틈틈이 다른 그림도 그려보다가 물타뚤리 번역팀도 그렸다는 거였어요.

 



후배님이 삽화를 좀 그려 보시겠어요?”

 

그 결과 양승윤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일을 키우고 만 겁니다. 내 사업을 이렇게 키웠다면 지금쯤 교민회 높은 사람이 되어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을 거에요. 날고 기는 고수들이 즐비한 한국에서 정식 출판되는 서적에 내 삽화가 정식으로 실릴 리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난 초상화밖에 그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손도 못그려요.

 

그래도 내가 가진 장점 중 하나는 시키면 무조건 (할 수 있는 만큼은)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막스 하벨라르의 저자 에두아르트 데커르의 사진과 초상화들은 인터넷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닮은 듯 안닮은 듯한 연령대별 데커르들이 탄생했습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실존인물을 모델로 만들어졌지만 물타뚤리(데커르)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사진자료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환 담머 장군의 실존 모델 안드레아스 픽토르 미키엘스(Andreas Victor Michiels) 대령만이 여러 장의 초상화를 남겼습니다.


 

 

그는 워털루 전쟁 이후 동인도로 넘어와 1830년 디포네고로 왕자 기습작전에 참가했고 1837년에는 이맘 본졸의 반란을 진압해 대령으로 진급합니다. 그리고서 1837년에 수마트라 서부해안 주지사로 임명되어 1843년에 현금회계 부족액 문제로 당시 나딸의 감찰관이었던 물타뚤리와 충돌하게 되죠. 그는 잠시 동인도 네덜란드군 임시 총사령관이 되었다가 1849 발리의 왕국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야간기습을 당해 전사했고 그의 유해는 지금도 자카르타 따만 쁘라사스티(Taman Prasasti)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물타뚤리의 아내는 소설 속에서 막스 하벨라르의 부인 띠너로 등장합니다. 실사 사진으로는 왼쪽의 나이든 모습만 찾을 수 있었고 젊은 시절의 모습은 1976년작 동명의 네덜란드-인도네시아 합작영화의 스틸컷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왼쪽부터 르박의 영주 아디빠티, 네덜란드군의 듀클라리 중위, 그리고 감찰관 훼르브르흐입니다. 실존인물인 아디빠띠는 실사 사진자료가 남아 있었고 듀클라리 중위와 훼르브르흐는 앞서 언급한 영화에서 따왔습니다. 훗날 영화 <블레이드 러너> 1982년 원작에서 인조인간 리플리컨트들의 영웅이자 도망자로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유명한 네덜란드 배우 룻거 하우어(Rutger Hauer)가 신인 시절 듀클라리 중위로 이 영화에 출현해 젊은 날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초등학교 시절, 사회과부도에 나오는 세계지도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대륙별로 따라 그려보며 언젠가 지리학자가 되려는 포부를 품었던 일이 쟈바와 수마트라의 지도를 따라 그리는 데에 적든 많든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그린 삽화들이 어떤 식으로든, 여러 면에서 의미깊은 책의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된 것은 정말 영광스럽고 벅찬 일입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 땅의 모든 삽화작가들에게 민망하고도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2018. 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