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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3) 본문

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3)

beautician 2019. 2. 11. 10:00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3. 배경


1) 프레틸린(Fretilin), 유디티(UDT), 아포데티(APODETI)

 1974 4월 동티모르에서는 여러 정당들이 합법적으로 출범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세 개의 정당이 다수 민중들의 지지를 얻으며 전면에 나섰다. 티모르 민주연합(유디티-União Democrática Timorense : ‘UDT’)은 부유한 지주들을 중심으로 5월에 결성되어 처음엔 동티모르를 포르투갈의 보호령으로 유지하자는 주장을 펴다가 9월에 접어들면서 독립을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UDT보다 일주일 후 독립 동티모르 혁명전선(프레틸린:Frente Revolucionária de Timor-Leste Independente : Fretilin)이 등장했는데 처음엔 사회주의 보편교리’ ("the universal doctrines of socialism)독립할 권리’(The Right to Independence)라는 곳의 지원을 받는 단체인 ASDT(티모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연합-Associacão Social Democrata Timorense)로 시작했다.


 ASDT는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자 유일하고도 합법적인 민중의 대변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며 나섰다. 5월 말에는 세 번째 정당인 티모르 대중민주연합(아포데티-Associacão Popular Democratica Timorense : APODETI)이 발족했다. 이들은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와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발족 당시 이들의 명칭은 그 목적을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티모르의 인도네시아 합병을 위한 연합’(Associacão Integraciacao de Timor Indonesia)이었다. 아포데티(APODETI)의 입장은 동티모르가 독자 독립할 경우 경제적으로 매우 미약하고 위태로운 상태가 될 것이라는 우려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림: 프레틸린 정당기)

프레틸린은 내전을 통해 국가를 장악하고 1975 11 28일 동티모르의 독립을 선언했다.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자들과 군 강경파들, 특히 정보기관인 Koptamtib 사령부와 특수부대 Opsus(Operasi Khusus)의 지도자들은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쿠데타가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에 합병할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중앙정부와 군은 동티모르에 좌익정권이 들어서면 적대적인 세력(, 공산주의 세력)이 인도네시아를 위협할 전진기지가 될 것이며 동티모르의 독립이 인도네시아 열도 전반에 걸쳐 각 주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고무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국가해체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수하르토와 가까운 군지휘관들 논리의 바탕을 이루었고 그것이 1990년대에 들어서서도 동티모르의 독립이나 자치를 전혀 허용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초창기엔 군 정보조직들이 비군사적 전략을 추구하며 아포데티를 부추겨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을 성사시키려 노력했다.


1975 1월 유디티와 프레틸린은 동티모르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잠정적 제휴에 동의했다. 이때 호주 정부는 인도네시아군이 람뿡에서 하고 있던 군사훈련이 동티모르 침공의 전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수개월 간 인도네시아 특수작전사령부인 OPSUS는 코모도 작전(Operasi Komodo)을 통해 은밀하게 아포데티를 지원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프레틸린 내부의 공산주의 분파에 대한 비난방송을 했고 유디티 연합에 불화를 심는 공작을 통해 동티모르의 불안을 부추겼으며 눈치 빠른 언론은 그것을 침공의 전조로 여겼다. 결국 그 공작은 상당한 성공을 거둬 유디티와 프레틸린의 제휴가 깨지고 말았다. 포르투갈 비식민화 위원회는 동티포르의 미래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1975 6월 마카오에서 회합을 요청했다. 동티모르의 독립을 추구하는 프레틸린은 인도네시아에 편입을 주장하는 아포데티까지 그 회합에 초청되었다는 이유로 이를 보이콧했고 유디티와 아포데티의 대표들은 프레틸린이 비식민화 프로세스를 방해하려는 한다며 비난을 쏟아냈다. 1987년의 프레틸린의 지도자인 호세 라모스 호르타(José Ramos-Horta)의 회고록인 푸누: 동티모르의 끝나지 않은 모험’(Funu: The Unfinished Saga of East Timor)에서 그 회합 참석을 거부한 프레틸린 지도부에 대해 자신이 극렬 항의했던 일을 기록했다.  그들의 결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지성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정치적으로 실패한 전술이라고 그는 회고했다. (사진: 호세 라모스 호르타)

 

2) 쿠데타, 내전 그리고 독립선언

1975년 중반, 두 독립지지 정당들이 정권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역내 갈등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1975 8월 유디티가 수도 딜리(Dili)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소규모 내전이 촉발되었다. 라모스-호르타는 이 피비릿내 나는 전투상황을 묘사하며 유디티와 프레틸린이 저지른 폭력의 참상을 증언했다. 이 내전으로 2~3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그는 국제적십자위원회에서 밝혔다

티모르 신생정당들 사이의 정치적 반목은 곧 무장충돌로 번졌고 여기엔 총독부 경찰관들과 포르투갈 군의 티모르인 군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741114일 포르투갈령 동티모르의 신임총독 겸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마리오 레모스 피레스(Mario Lemos Pires)는 얼마 되지 않는 포르투갈군 병력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측근들과 함께 딜리를 떠나 25km 가량 떨어진 아타루오 섬(Ataruo Island)으로 행정부를 옮겼다. 그와 동시에 그는 리스본에 증원병력을 보내달라 요청했고 본국에서는 전함 NRP 아폰소 쎄르퀘이라(the NRP Afonso Cerqueira)를 보내 10월 초 티모르 해역에 진입했다.


내전의 전개는 이랬다. 1975 4월 유디티 지도부의 균열이 생겨 로페스 다 크루즈(Lopes da Cruz)가 이끄는 분파가 프레틸린과의 연합을 깨고 나가려 했다. 그는 프레틸린의 좌익 극단주의자들이 동티모르를 공산주의 최전선으로 만들 것이라 우려했다. 그러나 프레틸린은 그런 혐의를 두는 것 자체가 인도네시아의 음모에 놀아나는 것이며 당내 좌익은 권력기반이 없다고 받아 쳤다 그러나 8 11일 프레틸린은 유디티 지도부로부터 연대를 종식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유디티의 쿠데타는 “정리 작전”이라 부르며 거리에서 힘을 과시하는 쪽에 라디오 방송국, 국제통신시스템, 공항, 경찰조직 등 핵심적 인프라들이 따라붙는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쌍방의 지도층은 사뭇 절제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지지자들은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폭주하고 말았다.

내전 초반에 유디티 지도부는 프레틸린 당원들 80명 이상을 붙잡았는데 그들 중엔 훗날 프레틸린의 지도자가 되는 자나나 구스마오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디티 당원들은 네 군데 지역에서 수십 명의 프레틸린 당원들을 죽였다. 희생자들 중엔 프레틸린의 발기인도 있었고 부통령 니콜라우 로바토의 형제도 있었다. 이에 프레틸린은 훈련된 포르투갈 동티모르군 부대들을 설득해 최선전에 세우며 전세를 뒤집었다. 초반에 유디티가 주도권을 쥐면서 촉발시킨 내전은 3주간 계속되었고 유디티의 1,500명 병력은 이제 프레틸린 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는 2,000명의 정규군과 맞서는 형국이 되었다. 프레틸린에 합류한 포르투갈 동티모르 군이 전향하면서 팔린틸(Falintil)이라는 부대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제 강력한 군대를 갖게 된 프레틸린은 파죽지세로 유디티 부대를 몰아붙였다.

8월말에 이르러 유디티 부대는 후퇴를 거듭하여 인도네시아 접경지역까지 몰렸고 1975 9 24 900명가량의 유디티 병력이 국경을 넘어 서티모르로 들어갔고 뒤이어 1천 명이 그 뒤를 따르면서 프레틸린이 동티모르의 주도권을 가져오게 되었다서티모르로 넘어간 유디티 지도자들은 9 7일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에 합병시켜 달라는 청원서에 서명했는데 당초 독립을 지지했던 유디티가 자신의 주장과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인 것은 인도네시아에게 강요받았기 때문이라는 정황이 보인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포르투갈에서 벌어진 쿠데타를 동티모르 합병의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었다. 특수작전부대 OPSUS 사령관은 물론 수하르토 대통령 측근인 알리 무르토포 소장과 베니 무르다니 준장이 정보전을 벌여 동티모르의 인도네시아 합병지지파들 등을 밀어주는 방향을 제시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의 인도네시아 국내 정치상황은 이러한 확장정책을 진행할 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다. 1974-1975년 사이 국영석유공사 뻐르따미나를 둘러싼 금융스캔달로 한창 시끄러울 때였으므로 해외원조를 받거나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받으려면 뭔가 위기상황을 만들어서는 안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수하르토도 처음엔 동티모르 침공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상황을 숙고해 본 바 프레틸린의 자익극단분자들이 승리할 경우 인도네시아와 국경을 접한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되어 인도네시아의 적대적 세력의 공격기지로 사용되거나 서방 잠수함 경로가 위협받을 것이란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또한 동티모르가 독립할 경우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들에게도 독립의지를 불러 일으킬지 모른다는 걱정도 따라붙었다. 이러한 인도네시아의 생각은 인도네시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던 서방국가들, 특히 막 인도차이나에서 병력을 철수하던 미국의 지지를 얻었다. 군 정보조직은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을 요구하는 아포데티 같은 정당을 이용해 합병을 유도하는 비군사적 전략을 구사했다. 한편 신질서 정부에서는 동티모르 침공도 함께 계획하고 있었다. 신질서 정권에서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지 않았고 정부는 굳이 동티모르와 좋게 얘기헤 볼 의향도 없었다.

9월초에 이미 2백명 규모의 인도네시아 특수부대가 미국의 인지 하에 공격을 감행했고 10월에는 재래식 전력의 공격이 뒤를 이었다.



 동티모르의 보보나로 지역(Bobonaro District)는 서티모르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데 내전 후 폭력사태가 여기까지 번졌고 인도네시아는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 지역의 몇몇 도시를 점령했다.

프레틸린은 동티모르의 주도권을 쥐자마자 서방과 인도네시아군 그리고 소규모의 유디티 부대들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는 1975 10 8일 국경도시 바투가데(Batugade)를 점령했고 8일 후 발리보(Balibo)와 말리아나(Maliana) 인근까지 진출했다. 발리보 전투 중 훗날 발리보의 5’(Balibo Five)라는 명칭을 얻게 되는 호주 TV 뉴스 크루들이 인도네시아군에게 살해된다. 인도네시아 군관계자들은 그들의 죽음이 우발적 사고였다고 해명했으나 동티모르인 증인들은 기자들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살해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들의 죽음과 계속된 전투, 그리고 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국제적 관심이 집중되었고 동티모르 독립을 지지하는 해외 집회들도 열리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 잠시 발리보 사태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기로 한다. 

발리보의 5(발리보 파이브-Balibo Five)는 호주 TV 네트워크에 근무하다가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 침공이 임박한 시기에 살해당한 일단의 저널리스트들을 말한다. 발리보는 서티모르 국경에 인접한 동티모르의 한 마을로 본격적인 침공 이전 이루어진 인도네시아군의 19751016일 공격으로 이들 기자들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발리보의 5인은 기자 그렉 쉐클턴(Greg Shackleton, 29)과 음향녹음 토니 스튜어트(Tony Stewart, 21) 등 두 명의 호주인과 멜번 HSV-7 방송국(세븐 네트워크)의 카메라맨 개리 커닝햄(Gary Cunningham, 27), 그리고 시드니 TCV-9 방송국(나인 네트워크)의 영국인 카메라맨 브라이언 피터스(Brian Peters, 24)와 역시 영국인 기자 맬컴 레니(Malcolm Rennie, 29)를 말한다.

 


발리보의 5(Balibo Five)

 

기자들은 인도네시아군이 발리보를 공격해 올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인도네시아군이 외국 언론인을 공격하진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렉 쉐클턴이 타운스퀘어의 집 벽에 호주 국기를 그리고 ‘AUSTRALIA'라는 글씨를 쓰는 모습도 동영상에 남아있다. 빅토리아 정부와 TV-7 TV-9 방송국들이 종자돈을 출연해 2003년에 세운 발리보 하우스 트러스트(Balibo House Trust)가 기자들이 살해되었던 이 집을 구매해 현재 공동체 학습센터로 사용하며 보존하고 있다.

2007년 고위 외교관은 조사관의 조사 결과 기자들이 인도네시아군에게 살해되었고 그 방법이 매우 고의적이었다고 말했다.

역사가 페르난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다섯 명의 기자들은 그들이 호주인들이며 언론인이라는 신분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그들은 비무장이었고 복장만으로도 민간인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항복 제스쳐로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들은 처참하게 살해되었고 그건 지휘관이 살해명령을 내렸다는 뜻이다. 그런 후 인도네시아군은 그들의 시신을 군복으로 갈아 입히고 그들 곁에 무기를 놓아 사진을 찍음으로써 그들이 합당한 공격대상인 전투원이었다고 주장하려 했다.”

  200725일 뉴사우스웨일즈(New South Wales) 조사관실은 피터스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원래 브리튼 시민이었지만 유가족들의 변호사는 피터스가 사망 당시 뉴사우스웨일즈의 주민이었다는 주장을 성공적으로 펼쳐 그 지역 법률을 적용받을 수 있었다. 이는 발리보 5인 사건에 대한 첫 공개조사였다.  


  여기서 훗날 1998년과 1999년 하비비 정권에서 공보장관까지 지냈던 유누스 요스피아(Yunus Yosfiah)1975년 당시 발리보 공격을 지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기자들 시신을 군복으로 갈아 입히고 총을 놔두어 그들이 전투원으로 전투에 참여한 것 같은 인상을 주려 했다는 혐의도 제기되었다한 목격자가 다섯 기자들의 죽기 전 모습을 묘사했다. “그때 인도네시아 육군대위 유누스 요피아와 그의 부하들이 비무장으로 손을 들고 있는 기자들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내 눈으로 그들이 총을 쏘는 것을 직접 보았어요. 총을 쏜 사람들은 한 두 명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백인들에게 마구 총을 갈겨댔습니다.” (사진: 유누스 요피아, 사진은 대령 시절)

제시된 증거에 따르면 발리보 5인 중 마지막 희생자는 침실에 들어가 문을 잠궜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밖으로 나온 후 대검에 등을 찔려 죽었다. 마크 테데시(Mark Tedeschi)는 조사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도네시아군이 고의적으로 발리보에서 다섯 명의 기자들을 살해한 것에 대해 목격자의 증언을 포함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최소한 기자 세 명은 유누스 요스피아 대위의 명령에 의해 총살되었고 다섯 번째 희생자는 크르스토포러스 다 실바(Christoforus Da Silva)라는 장교가 등에 대검을 찔러 살해했습니다. 고작 대위가 스스로의 결정으로 기자들을 죽였다면 그의 상관들로부터 징계를 받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대영제국 검찰청은두 사람을 고의 살인의 전쟁범죄로 기소할 충분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뉴사우스웨일즈 조사관실은 발리보 5인은 1975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할 목적으로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고의로 총격과 칼질로 살해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이제 다시 동티모르 침공 직전의 시점으로 돌아가자.

11월 초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의 외무장관들이 로마에서 만나 갈등해소책을 협의했다. 동티모르인들은 이 대화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프레틸린은 포르투갈과 보조를 맞추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회담 결과 포르투갈이 동티모르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는 데에 양측 모두 동의했으나 그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11월 중순 인도네시아군은 아타바에(Atabae)시에 해상으로부터 함포사격을 퍼부었고 그 달 말 그 도시를 점령했다.


포르투갈의 미온적 행동에 좌절한 프레틸린 지도자들은 동티모르의 독립을 조기에 선언한다면 인도네시아의 진출을 더욱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마리 알카티리(Mari Alkatiri)는 아프리카를 외교순방하며 각국 정부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사진: 마리 알카티리)


  마리 알카티리의 조상들은 포르투갈령 동티모르에 살던 하드라미 상인들이었다. 그는 딜리에서 태어났고 10명의 형제자매들을 가졌다. 그는 1970년 포르투갈령 앙골라로 공부하러 떠났다가 귀국해 프레틸린에 발기인으로 참여해 외무상을 맡았다. 19751128일 프레틸린이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함에 따라 알카티리는 고위 외교사절단 임무를 맡아 해외로 나섰다. 하지만 마침 그해 127일 인도네시아가 신생국 동티모르를 침공하자 그와 동료들은 귀국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모잠비크의 마푸토(Maputo)에 프레틸린 외부사절단 본부를 설치했다.

 

  24년간에 걸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점령기간동안 알카티리는 앙골라 지리학 학교의 공인조사원으로 일하며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 망명생활을 했고 모잠비크 마푸토 소재의 에두아르도 몬들레인 대학교(Eduardo Mondlane University)에서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마푸토의 한 개인법률사무소에서 시니어 법률자문으로, 1995년부터 1998년까지는 모잠비크 공화국 의회의 국제법과 헌법에 대한 자문인으로 일했다. 이 시기의 그의 활동은 라모스-호르타나 벨로 주교만큼 두드러지지 않는다


프레틸린은 이 외교순방을 통해 중국과 소련, 모잠비크, 스웨덴, 쿠바 등 25개국으로부터 동티모르를 신생국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쿠바는 지금까지도 동티모르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1975년 11월 28일 프레틸린은 이 지역을 동티모르 민주공화국” (República Democrática de Timor-Leste)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인 독립선언을 발표했다그러자 인도네시아는 다음날 발리보 인근의 유디티와 아포데티 지도자들이 그 지역이 동티모르에 더 이상 속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영토임을 선언할 것이라고 반응했다. 하지만 사실 발리보 선언은 인도네시아 정보국이 초안을 잡고 발리에서 서명되었다. 그래서 이 선언은 발리에서의 거짓말을 뜻하는 발리보홍 선언’(Balibohong Declaration)이라고 불리게 된다. 포르투갈은 두 선언 모두를 거부했지만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 합병을 위한 군사행동을 승인하면서 동티모르엔 전운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1975년 11월 28일 프레틸린 독립선언식

단상 가운데 프란시스 자비에르 도 아미랄 대통령그 옆 수염 덥수룩한 부통령 니콜라우 도스 로바토가 보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