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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동티모르] 산타크루즈 학살사건

beautician 2019. 2. 9. 10:00


산타크루즈 학살 

(Santa Cruz massacre)

 

딜리 학살사건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산타크루즈 학살(Santa Cruz Massacre)은 인도네시아의 강점기간 중 19911112일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산타 크루즈 공동묘지에서 동티므로 독립요구 데모데에게 총격을 가해 250명 이상을 살해한 사건이다.

 


199110월 인권에 관한 유엔 특별기록위원회(UN Special Rapporteur) 피터 코이만스(Pieter Kooijmans) 위원장의 방문에 맞춰 포르투갈 의회 의원들과 12명의 언론인들이 사절단으로 동티모르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인도네시아가 독립운동단체 프레틸린을 지원한다고 의심되는 질 졸리페(Jill Jolliffe) 기자가 포함되는 것에 반대의사를 표하자 포르투갈을 사절단 파견 자체를 취소했다. (사진: 질 졸리페 기자) 그들의 방문을 계기로 자신들의 명분을 국제적으로 알릴 기회로 삼고자 했던 저항 활동가들은 그 방문취소로 인해 사기가 꺾였다. 포르투갈의 방문취소에 맞춰 인도네시아 당국과 동티모르 젊은이들 사이의 긴장감이 더욱 높아졌다.

1028일 인도네시아군은 딜리의 모타엘 교회(Motael church)에서 일단의 저항조직원들을 포착했다. 합병지지 시위대와 교회 안의 사람들이 충돌했는데 그 결과 양측 모두 각각 한 명씩 사망자가 나왔다. 동티모르 독립지지 측의 세바스티아오 고메스(Sebastiao Gomes)가 교회 밖으로 끌려나가 인도네시아군에게 사살되었고 혼전 속에서 합병지지파의 아폰소 헨드릭스(Afonso Hendriques)가 칼에 찔려 사망했다.


포르투갈 사절단의 방문을 취재하기 위해 동티모르에 온 외신기자들 중엔 미국 독립언론인 에이미 굿맨(Amy Goodman)과 앨런 네인(Allen Nairn), 영국인 카메라맨 맥스 스톨(Max Stajl)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11월 12일 고메즈의 장례식에 참석했다여기 참석한 인근지역 주민들인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을 포함한 수천 명의 조문객들이 모타엘 교회로부터 인근 산타크루즈 묘지까지 걸어서 이동했다그 과정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동티모르의 국기를 꺼내 들었다비록 큰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지만 군중들은 평화롭고 질서정연했다고 대부분의 증인들이 말해주고 있다이것은 1975년 이후 처음 등장한 가장 크고 가시적인 시위였다

 


(왼쪽부터) 에이미 굿맨, 앨런 네인, 막스 스톨 - 산타크루즈 학살현장 취재기자들

 .

 인도네시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던 짧은 시간동안 몇몇 시위 참석자와 게르한 란따라(Geerhan Lantara) 소령이 칼에 찔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스탈에 따르면 란타라 소령이 티모르 국기를 든 한 소녀를 포함한 시위대를 먼저 공격했다고 하며 또 다른 프레틸린 활동가 콘스탄시오 핀토는 인도네시아군과 경찰들이 시위대를 구타했다고 증언했다. 운구행렬이 묘지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일부는 묘지 울타리 앞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자 약 200명가량의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도착해 무기를 꺼내 들고 집회장소로 진입해 들어가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장레식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참석자들은 묘지 밖으로 몸을 피해 내달렸지만 최소 250명의 동티모르인들이 여기서 살해되었다.

희생자들 중엔 정치학과 학생이자 호주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활동가인 뉴질랜드인 카말 바마다지(Kamal Bamadhaj)도 있었다. 이 학살은 에이미 굿맨과 앨런 네인 등 두 명의 미국인 기자들 눈 앞에서 벌어졌고 영국 요크셔 TV에서 일하는 맥스 스탈이 카메라에 담았다. 스탈이 학살현장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굿맨과 네인은 티모르인들과 인도네시아 군인들 사이에 서서 티모르인들의 방패가 되어주려 했다. 그러자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굿맨을 구타하기 시작했고 이를 말리려 뛰어든 네인도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 골절을 당했다. 스탈은 우여곡절 끝에 영상이 담긴 필름을 숨겨 호주로 가지고 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다윈에 도착하여 인도네시아와 한 통속인 호주에게 필름을 압수당할 것을 우려해 네덜란드 언론인 사스키아 쿠벤버그(Saskia Kouwenberg)에게 필름을 맡겼다. (사진: 사스키아 쿠벤버그 네덜란드 언론인) 이 영상은 19921월 영국 ITV를 통해 모든 냉혹함으로: 동티모르의 학살’(In Cold Blood: The Massacre of East Timor)이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스탈의 영상은 굿맨, 네인 및 다른 이들의 증언과 함께 전 세계로부터 격렬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 다큐멘터리는 1992년 처음 만들어진 국제사면위원회 영국 미디어 어워드(Amnesty International UK Media Awards)를 수상했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이 사건을 시위대에 폭력으로 인해 발생한 우발적 반응 또는 그저 오해라고만 설명했다. 하지만 이에 수긍하지 않는 이들은 퀘리카이(Quelicai), 라크루타(Lacluta), 크라라스(Keraras) 등에서 기록된 인도네시아군의 대규모 폭력의 역사적 기록들과 군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인도네시아 본국의 일단의 정치가 관료들, 이렇게 두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 당시 인도네시아군 총사령관 뜨리 수뜨리스노(Tri Sutrisno)는 학살이 벌어지고 이틀 후에 이렇게 발언했다. “우리 군을 우습게 봐서는 안된다. 마침내 우린 더 그들에게 발포할 수밖에 없었다. 저 선동자들처럼 덜 떨어진 것들은 총을 맞아 죽어 마땅하고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오랜 식민지 시절을 겪었던 인도네시아가 다른 민족, 남의 땅을 점령하였을 때 그 오만함이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

 

이 학살사건의 반응으로서 전 세게의 활동가들이 동티모르와 연대를 결성했다. 동티모르 강점이 시작된 이래 개인과 단체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네트워크가 동티모르의 인권과 자결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지만 1991년 학살 이후 그들의 활동에 긴박감이 더해졌다. 미국에서는 동티모르 활동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곧 미국 전역 10개 지역에 지부가 만들어졌다. 포르투갈과 호주, 일본 독일, 말레이시아, 아일랜드, 브라질 등에서도 연대 단체들이 줄지어 만들어졌다.

 


(사진) 199811월에 있었던 산타크루즈 학살 재현 장면

 

학살장면은 TV를 통해 전세계에 방영되어 인도네시아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미디어들의 성장으로 인해 신질서 정권이 인도네시아 국경을 넘나드는 정보를 점점 더 얼마나 통제하기 어렵게 되느냐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1990년대에 냉전이 종식되면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점점 더 국제적 우려의 시각을 받아야 했다. 산타크루즈 학살의 동영상 복제본이 거꾸로 인도네시아 안으로 유입되어 인도네시아인들도 자기 정부가 무슨 일을 했는지 가위질 되지 않은 원래의 영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다수의 민주주의 성향의 학생그룹들과 잡지들이 동티모르 문제뿐만 아니라 신질서 정권 전반, 넓은 시각의 역사,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미래 등에 대한 보다 공개적이고 비판적인 토론을 주도했다.

 

  미국 의회는 인도네시아군에 대한 미국 무기 판매는 계속하면서도 인도네시아군 요원들에 대한 훈련프로그램 IMET에 대한 자금지원을 삭감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9년 미군과 인도네시아군 사이의 연대를 단절했다가 2005년이 되어서야 훈련과 합동작전을 재개했다. 2012년 오바마 미대통령은 군예산은 156천만불로 증액하고 인도네시아 특수부대에 대한 미국의 직접 훈련을 다시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 학살사건을 계기로 포르투갈 정부는 외교전에 박차를 가했다. 포르투갈은 유럽연합 회원국들이게 동티모르 이슈를 제기해 그들이 인도네시아를 대함에 있어 압박을 행사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인도네시아와 경제적 관계가 돈독하고 무기까지 파매하고 있던 영국 같은 나들은 자국 이익에 해가 될까봐 유보적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호주에서는 동티모르의 주권이 자카르타에 있음을 인정한 연방정부에 비난이 쏟아졌다. 학살 당시 호주 정부는 인도네시아군과의 연대를 더욱 고양시키던 중이었다. 그러나 1999년 독립찬반 투표 이후 발생한 폭력상황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도네시아와의 군사적 연대를 잠정적으로 끊었다. 호주 외무상 캐럿 에반즈(Gareth Evans)는 그 사건이 일탈일 뿐이며 국가 정책을 기반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1112일은 독립한 동티모르의 국가휴일로 제정해 동티모르인들이 역사상 가장 피비릿내 났던 날로 기억하는, 다른 한편 자신들의 독립투쟁에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 날을 기념하고 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