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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령 티모르 (Portuguese Timor)
포르투갈령 티모르는 1702년부터 1974년 사이 포르투갈의 식민지 상태였던 동티모르를 뜻한다. 포르투갈은 그중 대부분의 시기를 티모르섬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분할해 지배했다 (사진: 네덜란드령 동티모르 시절 국기)
유럽열강들이 몰려오기 전 티모르섬은 인도와 중국 사이를 잇는 해양무역 네트워크의 일부를 이루었다. 티모르섬의 특산품은 향기로운 백단향 나무였다. 백단향은 상쾌하고 달콤한 향기가 특징인 반기생성 열대 상록수로 나무는 조각용, 분말은 향유의 재료가 되기도 하는 다목적 식물이다.
처음 티모르섬을 찾아온 유럽 열강은 16세기 초 포르투갈이었고 뒤이어 16세기 후반 네덜란드가 들어왔다. 그들은 말루꾸의 향료섬들을 찾아나섰던 길이었다. 1515년 포르투갈이 빤떼 마카사르(Pante Macassar- 아마도 마카사르 해변이란 뜻) 근처에 상륙했다. 포르투갈인들은 티모르섬에 백단향이 씨가 마를 때까지 베어 가져갔다. 1556년엔 도미니칸 수도원(Dominican friars)이 리파우(Lifau) 마을에 세워졌다.
1613년 네덜란드가 나타나 이 섬의 서쪽을 차지했다. 그 후 3세기에 걸쳐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열도 전역을 지배했지만 포르투갈령 티모르라 불리게 되는 티모르섬의 동쪽 반만은 예외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옥수수를 주식작물로, 커피를 수출용 작물로 티모르에 도입했다. 티모르식 조세 및 인력관리 방식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세금은 노동력이나 커피 또는 백단향으로 내도록 했다. (사진: 에센스오일 추출을 위해 잘게 자른 백단향 나무) 포르투갈은 티모르 사회에 용병제도도 도입했는데 티모르 부족장들이 이웃 부족들과 전쟁을 벌일 때 포르투갈 군인들을 고용하곤 했다. 티모르인들은 포르투갈인들에게서 산 화승총으로 사슴을 사냥해 사슴뿔을 공급하고 가죽을 수출했다.
포르투갈인들은 로마 카톨릭과 라틴 필기체계, 인쇄기계, 정규 학제 등을 동티모르에 도입했다. 동티모르에 들어온 포르투갈인들은 일반 포르투갈인들과 토파즈(Topasses)라 불리는 이들이었는데 토파즈는 다코스타(Da Costa)와 호메이(Homay)의 두 강력한 집안이 이끄는 무리들로 주로 우쿠시(Oecussi)와 플로레스(Flores)에 살았다. 다코스타는 포르투갈계 유태인 상단이었고 호메이는 네덜란드인이었는데 17세기와 18세기에 티모르에서 크게 흥했다. 교회와 공공사업에 포르투갈어가 사용되었고 포르투갈계 아시아인들은 포르투갈어와 말레이어를 썼다. 식민정책에 따라 언어와 지식, 종교에 있어 포르투갈인들과 필적할 만한 남자들에겐 포르투갈 시민권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1970년까지 1,200명의 동티모르 귀족들, 딜리 시민 또는 대도시 시민들이 포르투갈 시민권을 획득했다. 식민지시대가 저물던 1974년엔 30%의 인구가 로마 카톨릭을 믿었지만 태반의 현지인들은 땅과 하늘의 신들을 섬기는 다신교를 가졌다.
(사진) 1930년대 현지 병사들을 거느린 포르투갈 지휘관
1702년 리스본에서 첫 총독인 안토니오 코엘로 게레이로(António Coelho Guerreiro)를 리파우(Lifau)에 파견했다. 리파우는 순다끄찔 열도(Sunda Kecil=Lesser Sunda Islands) 전체의 수도가 된다. 그 이전 수도는 솔로르(Solor)와 라란투카(Larantuka)였다. 포르투갈의 지역관리는 지속적이었고 내륙 산악지역에서는 더욱 그랬다. 도미니칸 수도원이 세워지고 네덜란드가 간헐적으로 습격해 오는 와중에 티모르인들이 포르투갈 상인들과 경쟁하게 되었다. 당시 총독부의 통치력은 대체로 딜리 지역에 한정되었고 전통적 부족장의 권위와 영향력에 크게 의존하는 형국이었다.
포르투갈령 티모르의 수도는 1769년 딜리로 옮겨졌다. 그 사이 여러 현지 왕국들(Liural)의 지배자가 된 토파즈들이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같은 시기에 네덜란드도 티모르섬의 서편을 식민지화하여 현재 인도네시아 영토에 해당하는 열도 전체를 차지했다. 포르투갈령 티모르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사이의 국경은 리스본 조약(Treaty of Lisbon)에 의해 확정되었고 두 나라는 티모르섬을 양분하는 것에 동의했다. 1916년 영구중재법정(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된 분할선이 오늘날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국경으로 자리잡았다.
Lesser Sunda Islands
포르투갈에게 있어 동티모르는 19세기 말까지 소홀히 취급당하는 무역관 정도의 의미였다. 사회간접자본, 위생, 교육 등에 대한 투자는 바닥을 맴돌았다. 백단향은 여전히 주요 수출품이었다가 19세기 중반부터 커피 수출의 중요성이 갑자기 커졌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통치가 강력한 곳은 대개 가혹한 수탈을 겪었다.
20세기 초입에 접어들면서 본국의 위태로운 경제상황으로 인해 포르투갈은 식민지를 쥐어짜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동티모르에서도 포르투갈에 대한 저항이 점점 커져갔다. (사진: 포르투갈령 동티포르의 군대 휘장 (1935~1975) 1910~12년 사이의 티모르 반란을 포르투갈은 모잠비크와 마카오의 식민지군대를 데려와 진압했는데 그 결과 3천 명의 동티모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1930년에는 일본의 준국영회사 난요 코하츠(Nanyo Kohatsu-남양흥발주식회사) 개발회사가 일본 제국해군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큰 돈을 출연해 포르투갈령 티모르 최고의 농장 SAPT와 합작회사를 만들었다. 이 합작회사가 1930년대 중반까지 이 섬을 드나드는 수출입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면서 일본의 이해가 증대되는 상황이 영국, 네덜란드 호주 당국의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포르투갈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선언했지만 1941년 12월 일본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포르투갈령 티모르는 영국, 호주, 네덜란드의 소규모 연합군이 점령했다. 그러나 1942년 2월 티모르 전투(Battle of Timor)를 통해 일본군의 침공이 감행되었다.
티모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2년 2월 20일 일본군이 포르투갈령 티모르와 네덜란드령 티모르에 진주하면서 스패로우 포스(Sparrow Force)라고 불리는 빈약한 장비와 얼마 안되는, 호주, 영국, 네덜란드령 동인도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의 저항전을 말한다. (사진: 티모르 전투의 스패로우 포스) 강고한 저항을 했지만 일본군에 밀린 연합군의 태반은 결국 전투 사흘만에 항복하게 된다. 하지만 수백 명의 호주 특수부대원들이 게릴라전을 계속해 일본군에게 1천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발생시켰다. 그들은 서남쪽 티모르해 건너편 650km 떨어진 호주 다윈으로부터 항공기와 선박을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았다. 후속 전투에서 일본군은 큰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했으나 결국 호주군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었다.
이 전투는 1943년 2월 10일까지 1년 가까이 계속되었고 여기서 소개되어 철수한 마지막 호주군들은 1941~1942년 일본군의 침공이 시작된 이후 동남아시아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연합군으로 기록된다. 이로 인해 티모르에 진주한 일본군은 결과적으로 6개월 이상 발이 묶여 더 이상 다른 지역으로 전개하지 못했다. 포르투갈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동티모르인들과 포르투갈 총독부 인원들이 연합군과 함께 총을 들거나 그들에게 음식과 피난처 등 여러 도움을 제공했다.
일본군 치하에서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합의한 국경은 무시되고 섬 전체가 일본육군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티모르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은 게릴라를 지원해 호주군이 철수할 때까지 저항전투를 계속했는데 그 결과 일본군의 가혹한 보복이 서부 티모르에서 자행되어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 강점기간 동안 약 4만~6만 명의 티모르인들이 사망했고 경제는 파탄났으며 기근이 창궐했다.
제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포르투갈은 다시 돌아와 예전 식민지를 되찾았는데 섬의 서쪽부분은 1949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인도네시아에 편입되었다.
경제재건을 위해 식민지 총독부는 현지 추장들을 통해 노동력을 공급받았는데 이는 오히려 농업분야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41년 티모르인들의 교육을 포르투갈 정부가 교회에 넘겨주자 동티모르에서 교회의 역할은 점점 더 커졌다. 전쟁이 끝난 후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 원래는 매우 낮은 상태였던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레벨의 교육이 크게 높아졌다.
1973년 가독(可讀)인구가 전체의 93%였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교회의 덕을 입어 교육받은 동티모르의 소수 엘리트들이 인도네시아 강점기 당시 독립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Carnation Revolution)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통해 세워진 포르투갈 신정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에 대한 점진적인 비식민지화 프로세스를 선호했다. 이에 따라 1974년 4월 동티모르에서도 정치정당들이 처음으로 공식인가 되었고 UDT와 프레틸린, 그리고 아포데티(Apodeti) 등 세 개의 정당이 두각을 나타냈다.(사진: 리스본의 카네이션 혁명) UDT는 포르투갈령 유지를 선호하다가 독립지지로 선회했고 프레틸린은 사회주의 보편원칙에 입각해 독립할 권리를 부르짖었고 나중엔 자신들이 유일하고도 진정한 국민들의 대변자라고 주장했다. 제3당인 아포데티는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와 합병하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할 것이라 주장했다
1974년 11월 14일 육군장교인 마리오 레모스 피레스(Mario Lemos Pires)가 포르투갈령 동티모르의 신임총독 겸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한편 티모르 신생정당들 사이의 정치적 반목은 곧 무장충돌로 번졌고 여기엔 총독부 경찰관들과 포르투갈 군의 티모르인 군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모스 피레스는 얼마 되지 않는 포르투갈군 병력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측근들과 함께 딜리를 떠나 25km 가량 떨어진 아타루오 섬(Ataruo Island)으로 행정부를 옮겼다. 그와 동시에 그는 리스본에 증원병력을 보내달라 요청했고 본국에서는 전함 NRP 아폰소 쎄르퀘이라(the NRP Afonso Cerqueira)를 보내 10월 초 티모르 해역에 진입했다.
얼마 후인 1975년 11월 28일 프레틸린은 이 지역을 “동티모르 민주공화국” (República Democrática de Timor-Leste)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인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포르투갈 전함 NRP 아폰소 쎄르퀘이라아(왼쪽)와 NRP 조아오 로비호(오른쪽)
그러자 1975년 12월 7일, 이에 크게 반발한 인도네시아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암묵적 동의 또는 묵인을 받아 동티모르에 침공을 감행했다. 오전 3시 두 척의 포르투갈 코르벳함인 NRP 조아오 로비(NRP João Roby ) 호와 NRP 아폰소 쎄르퀘이라 호가 아타루오에 정박해 있던 중 해상과 공중에서 다수의 표적물들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건 딜리 공격에 나선 인도네시아군의 항공기와 선박들이었다. 레모스 피레스와 그의 측근들은 아타루오를 떠나 포르투갈 전함에 승선해 호주 다윈으로 피신했다.
조아오 로비와 아폰소 쎄르퀘이라는 해군 타스크포스 UO20.1.2(나중에 FORNAVTIMOR로 개명)를 포함해 인도네시아 침공에 대항하는 군사행동으로서 티모르 해역을 계속 순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포르투갈이 보낸 세 번째 전함 NRP 올리베이라 에 카르모(NRP Oliveira e Carmo)는 1976년 1월 31일 도착해 NRP 아폰소 쎄르퀘이라와 교대했다. 포르투갈 전함들은 1976년 5월까지 이 지역에서 작전하다가 군사적으로 인도네시아군을 몰아내는 것이 명백히 불가능해 보이게 되자 남은 NRP 올리베이라 에 카르모도 리스본으로 돌아갔다.
1976년 7월 17일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자신의 27번째 주로 공식 합병했다. 그러나 유엔은 이 합병을 비준하지 않고 동티모르의 합법정부는 여전히 포르투갈이라 간주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의 강점기가 끝나고 유엔 과도정부를 거친 후 동티모르는 2002년 마침내 공식적으로 독립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포르투갈의 식민시대는 사실상 1975년에 끝났고 공식적으로는 1999년 유엔과도정부가 들어서던 시점에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첫 동티모르의 화폐는 1894년에 소개된 포르투갈 티모르 파타가(Portuguese Timorese pataca)였다. 그러다가 1958년 포르투갈 티모르 에스쿠도(Portuguese Timorese escudo)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포르투갈 에스쿠도와 연동되어 있었다. 1975년 인도네시아와 합병된 이후에는 인도네시아 루피아화가 사용되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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