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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1) 본문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https://en.wikipedia.org/wiki/File:LocationEastTimorNamed.svg
1. 기본정보
-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기간: 1975년 12월 7일부터 1999년 10월 31일까지 (23년 10개월)
- 침공에서 정식 독립국가 수립까지: 1975년 12월 7일부터 2002년 5월 20일까지 (26년 5개월)
-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을 저항한 단체는 CNRM(후에 CNRT로 개명) 프레틸린(Fretilin-Falintil), UDT임.
- 동티모르 합병을 지지한 국가: 호주, 캐나다, 말레이시아, 미국(이상 1991년까지), 영국(1991년까지 지지하고 무기공급은 1997년까지 지속함)
- 동티모르 합병을 반대한 국가: 포르투갈, 모잠비크, 리비아, GAM(아쩨해방운동), 소련(1975~1991), 러시아(1991~1999), 호주, 캐나다, 중국, 말레이시아, 영국, 미국(이상 1999년)
애당초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합병을 지지했던 호주, 캐나다, 말레이시아, 영국, 미국 등은 1991년 11월 12일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산타크루즈 공동묘지에서 발생한 집단학살 장면이 전세계에 보도되어 공분을 사며 동티모르 독립지지 여론이 확산되자 슬며시 동티모르 독립지지로 선회했다.
- 인도네시아 측 사령관 및 지휘관: 수하르토 대통령, 쁘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 소장, 위란토(Wiranto), 뜨리 수뜨리스노(Tri Sutrisno), 호세 아빌리오 오소리오 소아레스(José Abílio Osório Soares) 동티모르 주지사, 유리코 구테레스(Eurico Guterres) 동티모르 주지사
실제로 동티모르 강점기에 육군 고위장성이었던 이들은 동티모르에서 벌어진 학살과 집단살인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프레틸린 반군과의 실전이 벌어지던 동티모르는 야심을 가진 육군 장교들에게는 출세와 진급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코스와도 같았다.
- 동티모르 측 사령관 및 지휘관: 따우르 마탄 루악(Raur Matan Ruak), 니노 코니스 산타나(Nino Konis santana), 마후노 불리릭 까라타야노(Ma;huni Bulerek Karathayano), 자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 니콜라우 도스 레이스 로바토(Nicolau dos Reis Loato), 로게리오 로바토(Rogerio Lobato)
- 강점기 중 사망자 추정치: 10만~30만명
2. 개요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은 1975년 12월에 시작해 1999년 10월까지 계속되었다. 동티모르는 수 세기 동안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1974년 포르투갈 본국에서 일어난 쿠데타가 결과적으로 식민지 해체로 이어졌는데 이로 인해 동티모르 상황이 급속히 불안정해졌고 미래 역시 불확실해졌다. 소규모의 내전이 있은 후 1975년 11월 28일 독립지향의 프레틸린(Fretilin)당이 수도 딜리(Dili)에서 승전선언과 함께 동티모르의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인도네시아군은 동티모르 지도자들의 도움요청에 응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1975년 12월 7일 동티모르를 침공해 1979년까지 현지 무장저항세력들을 굴복시켰다. 많은 이들이 진정한 자유결정이라 인정하지 않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전체 모임”(Perhimbunan Popular)를 거쳐 인도네시아는 이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의 한 주(洲)로 복속시켰다.
침공직후 유엔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는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행동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해당 지역에서 즉각적인 철군을 촉구했다. 이때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 부속 주로 인정한 나라는 호주와 인도네시아뿐이었다. 이것은 이권때문임이 분명해 보였는데 두 나라는 그후 티모르 갭(Timor Gap)이라 부르는 동티모르와 호주 사이의 해역에서 발견된 자원들을 어떻게 분배하느냐 하는 회담을 시작했다. (그림: 티모르 갭) 미국, 일본, 캐나다, 말레이시아 등의 국가들도 인도네시아 정부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동티모르 침공과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인도네시아는 국제사회에서 명성과 신뢰성에 크게 잃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약 24년간 동티모르의 인민들을 일상적이고도 조직적인 고문, 성노예, 재판을 거치지 않은 처형, 학살, 그리고 의도적으로 기획된 기아에 시달리게 했고 1991년 수도 딜리에서 벌인 산타크루즈 학살(Santa Cruz Massacre)은 전세계의 공분을 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살인행위가 서방에 보도되었다. 인도네시아 강점에 대한 현지의 저항 역시 거셌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강점상태를 종식시키려 노력해 온 카를로스 필리페 시메네스(Carlos Filipe Ximenes Belo)와 호세 라모스-호르타(José Ramos-Horta)라는 두 사람에게 1996년의 노벨평화상이 주어지기도 했다. 1999년 동티모르의 미래를 결정짓는 투표결과는 독립찬성이 압도적이었고 유엔이 관리하는 과도기를 거쳐 2002년 동티모르는 마침내 독립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동티모르의 포용, 진실, 화해 위원회’는 인도네시아 강점기간 동안 기아와 폭력으로 90,800명에서 202,000명 사이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들 중 17,600~19,600명이 처참한 죽음을 맞았거나 실종되었다고 발표했다. 1999년 당시 동티모르의 전체 인구는 대략 823,386명이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진실위원회는 이 폭력적 살해사건의 70% 정도가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저질러 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9년 투표로 독립이 결정되자 인도네시아군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 그룹들이 파상공격을 가하며 폭력이 창궐하면서 동티모르의 사회간접자본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호주군이 주축이 된 ‘동티모르를 위한 국제군’(Internaitonal Force for East Timor-INTERFET)이 질서회복에 나섰고 ‘동티모르의 유엔 과도행정부’(United Nations Transitional Administraion in East Timor)는 2년간 해당지역을 신탁통치하며 1999년에 자행된 범죄들을 조사하고 기소하는 ‘중범죄 조사국’(Serious Crimes Unit)을 설치했다. 인도네시아 법정이 사건의 숫자와 유죄건수를 크게 제한하자 이를 관망하던 많은 국가들이 이를 비난하며 동티모르에 국제사법재판소 설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옥스포드 대학은 한 학술회의에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을 제노사이드라 정의했고 예일대학에서도 이를 제노사이드 연구 프로그램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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