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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보의 5인 (Balibo Five) 본문
발리보의 5인(발리보 파이브-Balibo Five)는 호주 TV 네트워크에 근무하다가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 침공이 임박한 시기에 살해당한 일단의 저널리스트들을 말한다. 발리보는 서티모르 국경에 인접한 동티모르의 한 마을로 본격적인 침공 이전 이루어진 인도네시아군의 1975년 10월 16일 공격으로 이들 기자들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이들 다섯 명의 죽음을 조사하러 발리보를 뒤따라 방문한 로저 이스트(Roger East)도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딜리의 선창에서 처형당했다.
발리보의 5인은 기자 그렉 쉐클턴(Greg Shackleton, 29세)과 음향녹음 토니 스튜어트(Tony Stewart, 21세) 등 두 명의 호주인과 멜번 HSV-7 방송국(세븐 네트워크)의 카메라맨 개리 커닝햄(Gary Cunningham, 27세), 그리고 시드니 TCV-9 방송국(나인 네트워크)의 영국인 카메라맨 브라이언 피터스(Brian Peters, 24세)와 역시 영국인 기자 맬컴 레니(Malcolm Rennie, 29세)를 말한다.
발리보의 5인 (Balibo Five)
기자들은 인도네시아군이 발리보를 공격해 올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인도네시아군이 외국 언론인을 공격하진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렉 쉐클턴이 타운스퀘어의 집 벽에 호주 국기를 그리고 ‘AUSTRALIA'라는 글씨를 쓰는 모습도 동영상에 남아있다. 빅토리아 정부와 TV-7과 TV-9 방송국들이 종자돈을 출연해 2003년에 세운 발리보 하우스 트러스트(Balibo House Trust)가 기자들이 살해되었던 이 집을 구매해 현재 공동체 학습센터로 사용하며 보존하고 있다.
2007년 고위 외교관은 조사관의 조사 결과 기자들이 인도네시아군에게 살해되었고 그 방법이 매우 고의적이었다”고 말했다.
역사가 페르난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다섯 명의 기자들은 그들이 호주인들이며 언론인이라는 신분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그들은 비무장이었고 복장만으로도 민간인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항복 제스쳐로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들은 처참하게 살해되었고 그건 지휘관이 살해명령을 내렸다는 뜻이다. 그런 후 인도네시아군은 그들의 시신을 군복으로 갈아 입히고 그들 곁에 무기를 놓아 사진을 찍음으로써 그들이 합당한 공격대상인 전투원이었다고 주장하려 했다.”
로저 이스트(Roger East)는 호주 AAP-로이터 통신의 기자로 이들 다섯 명의 죽음을 조사할 목적으로 동티모르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1975년 12월 7일 딜리에서 인도네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그 다음날인 12월 8일 총살당했고 그의 시신은 바다에 버려졌다. 이 사건으로 그는 발리보의 5인 중 잊혀진 여섯 번째 희생자라고 불리게 된다. 이스트의 검시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진: 로저 이스트)
1999년 국가범죄당국(National Crime Authority)의 전 회장이자 호주 정부 법무관 톰 셔먼(Tom Sherman)이 요청한 발리보 5인과 로저 이스트의 죽음에 대한 정부 청문회에서 다섯 명의 살해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으나 그들의 시신을 화장함으로써 전투 중 유탄에 맞아 죽었다고 둘러댄 ‘기념비적 대실수’의 모든 증거를 파괴하려는 했다며 인도네시아를 비난했다. 그러나 로저 이스트의 경우 발리보 사건과는 확연히 달랐다.
“로저 이스트를 살해한 장소는 도심에 가까웠으므로 목격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죽음에 대한 증거는 매우 명백했다. 두 증인이 증언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두 명의 증인이 더 나섬으로써 살인에 대한 강력한 상황증거가 확보되었다. 로저 이스트에 대해 난 그가 1975년 12월 8일 늦은 오전 딜리의 부두 지역에서 신원 미상의 인도네시아 군인에 의해 간이 처형되었을 개연성이 크다고 결론 내렸다.” 톰 셔먼의 말이다.
그렉 쉐클턴의 미망인 셜리 쉐클턴(Shirley Shackleton)은 이 사건을 알리기 위해 사건의 진실을 묻는 운동을 주도했다. 그녀는 동티모르 독립투쟁을 소리높여 지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사진: 그렉 쉐클턴)
2007년 호주 조사관은 이들이 인도네시아군 병사들에게 용의주도하게 살해당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한편 인도네시아군의 공식해명은 마을에서 교전 중 기자들이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호주 정부는 인도네시아와의 관계악화를 우려해 이 일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조사결과가 나온 후 신임 호주 수상 케빈 러드(Kevin Rudd)는 “책임자들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합니다…..그냥 옆으로 치워둘 성질의 사안이 아닙니다”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수상으로 선출된 후 그는 별다른 의미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2008년 이들 살해당한 기자들이 묻힌 묘지의 방문도 거절했다. 호주 정부가 이들을 기만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활동가가 된 셜리 쉐클턴은 2010년 12월 17일 “살인사건이 이후 진행되던 조치들이 조사관의 보고서가 나온 후 오히려 멈추고 말았다”고 말한 바 있다.
1994년 브라이언 피터스의 여동생 모린 톨프리(Maureen Tolfree)는 그녀의 고향인 브리스톨에서 인도네시아에 BAE 호크 전투기를 인도네시아에 판매하는 것을 반대하는 데모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티모르 이슈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음악가 폴 스튜어트(Paul Stewart)는 그의 21살 짜리 형 토니가 죽었을 때 아직 청소년이었다. 그는 나중에 콜린 버클러(Colin Buckler – 페인터스 & 도커스 밴드의 멤버)와 함께 딜리 올스타스(Dili Allstars)를 구성했다. 그들은 동티모르 음악가인 길 산토스(Gil Santos)와 함께 1992년 인도네시아군의 동티모르 저항군 지도자 자나나 구스마오 체포에 항의하는 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스튜어트는 2009년 영화 발리보(Balibo)의 자문으로 참가했는데 힘들지만 의미있는 경험이었으며 마침내 진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제 동티모르에 악기를 기부하는 자선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이 영화가 당시 기자들이 무참히 살해되었는데도 제대로 된 조치를 하지 못한 호주 정부의 무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도 말했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이주일쯤 후 내 어머니가 정부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자카르타에 있는 대사관에서 누군가가 전화했던 것인데 ‘관 제작비 청구서를 어디로 보내야 할까요?’ 라는 내용이 전부였어요.” 스튜어트의 말이다. 맬컴 레니의 어머니 미나(Minna)와 사촌 마가렛 윌슨은 죽을 때까지 이 문제를 파해치기 위해 매달렸다. (사진: 케빈 러드 호주 수상)
2006년 국제 언론연구소(International Press Institute)는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에게 미국 조사관들이 발리보 5인의 죽음과 1975년, 1999년에 동티모르에서 살해당한 다른 세 명의 죽음을 완전히 조사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주장하며 사건을 다시 열어 재조사해야 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영화감독 로버트 코놀리(Robert Connolly)는 “기자들이 살해당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들이 교전 중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는 현재 인도네시아와 호주의 견해는 솔직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우린 지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범들도 검거하고 있는데 발리보 5인 사건의 사법정의 요구를 묵살한다는 건 미친 짓이다”라고 말했다. 호주 국회에서 닉 제노폰(Nick Xenophone) 상원의원과 스캇 러드램(Scott Ludlam) 상원의원은 상원에서 이 문제를 자주 발언했을 뿐 아니라 뉴스 매체를 통해서도 많은 캠페인을 펼쳤다. 제노폰은 시드니 모닝 헤럴드지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비밀해제된 호주 정보자료들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최고사령부가 발리보 5인 살해사건의 국제외교적 파국에 매우 당황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호주는 그때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았고 그걸 본 인도네시아는 군은 이를 자기들이 뭘 해도 괜찮다는 “그린 라이트”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동티모르인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는 것을 깨닫고 만 것이다.”
2007년 2월 5일 뉴사우스웨일즈(New South Wales) 조사관실은 피터스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원래 브리튼 시민이었지만 유가족들의 변호사는 피터스가 사망 당시 뉴사우스웨일즈의 주민이었다는 주장을 성공적으로 펼쳐 그 지역 법률을 적용받을 수 있었다. 이는 발리보 5인 사건에 대한 첫 공개조사였다.
첫날엔 1998년과 1999년 하비비 정권의 공보장관을 지냈던 유누스 요스피아(Yunus Yosfiah)가 1975년 발리보 공격을 지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기자들 시신을 군복으로 갈아 입히고 총을 놔두어 그들이 전투원으로 전투에 참여한 것 같은 인상을 주려 했다는 혐의도 제기되었다. 호주 매체들은 호주 방위신호국(Defence Signals Directorate)이 이들 다섯 명이 상관 명령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인도네시아군의 무선통신을 도청했다고 보도했다. 한 목격자가 다섯 기자들의 죽기 전 모습을 묘사했다. “그때 인도네시아 육군대위 유누스 요피아와 그의 부하들이 비무장으로 손을 들고 있는 기자들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내 눈으로 그들이 총을 쏘는 것을 직접 보았어요. 총을 쏜 사람들은 한 두 명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그 백인들에게 마구 총을 갈겨댔습니다.” (사진: 유누스 요피아, 사진은 대령 시절)
제시된 증거에 따르면 발리보 5인 중 마지막 희생자는 침실에 들어가 문을 잠궜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밖으로 나온 후 대검에 등을 찔려 죽었다. 마크 테데시(Mark Tedeschi)는 조사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도네시아군이 고의적으로 발리보에서 다섯 명의 기자들을 살해한 것에 대해 목격자의 증언을 포함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최소한 기자 세 명은 유누스 요스피아 대위의 명령에 의해 총살되었고 다섯 번째 희생자는 크르스토포러스 다 실바(Christoforus Da Silva)라는 장교가 등에 대검을 찔러 살해했습니다. 고작 대위가 스스로의 결정으로 기자들을 죽였다면 그의 상관들로부터 징계를 받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대영제국 검찰청은두 사람을 고의 살인의 전쟁범죄로 기소할 충분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뉴사우스웨일즈 조사관실은 “발리보 5인은 1975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할 목적으로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고의로 총격과 칼질로 살해되었다”고 결론지었다.
2009년 9월 9일 호주 연방경찰도 발리보 5인의 죽음에 대한 전쟁범죄 수사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2009년, 전 인도네시아군 병사 가똣 뿌르완토(Gatot Purwanto)는 ABC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처형된 것이 아니라 고의로 총질을 하여 죽인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들이 숨어 있는 집에 다른 군인들이 총을 쏘아 댈 때 자신은 거기서 3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우린 그들이 외국인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기자인지는 몰랐어요. 거기선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고 만약 그들이 아군이 아니라면 우린 본능적으로 그들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적이라고 생각해야 하죠.” 발리보 5인을 처음 발견했을 때 그는 특수부대 대위 유누스 요스피아 가까이에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통해, 나중에 인도네시아 공보부 장관까지 오르게 되는 요스피아가 해당 살인을 지시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호주 전쟁기념관 소재 종군기자 기념비
2015년 10월 15일 제노폰과 페르난데스는 시드니 모닝 헤럴드지에 “우리는 발리보 5인을 오늘날 다시 기억해야 한다. 기자들이 일반 시민보다 더 중요한 인간들이어서가 아니다. 기자들이란 인권침해에 대한 정보를 외부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많은 이들이 종군기자 기념비(War Correspondents Memorial) 앞에서 열린 새벽 예배에 모여들어 발리보의 5인과 로저 이스트를 추모했다. 추모객들은 희생자 가족, 주요 호주 언론사 네트워크의 대표들, 언론인 연맹, 전 호주 외교관들 그리고 제노폰 상원의원 등을 망라했다. 2015년 9월 종군기자 기념비가 처음 설치되었을 때 맬컴 턴불 수장은 “우리의 민주주의는 자유롭고 용기있는 언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종군기자들은 종종 엄청난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진실을 말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연설한 바 있다.
이 사건을 다룬 <발리보(Balibo)>라는 영화가 호주 애리너필름(Arenafilm)에서 2009년 제작되었다. 데이빗 윌리엄슨(David Williamson)이 시나리오를 쓰고 로버트 코놀리(Robert Connolly)가 메가폰을 잡았다. 이 영화는 희생자들을 생전에 만나보았던 호주 기자 질 졸리프( Jill Jolliffe)가 쓴 ‘은폐’(Cover-Up)를 원작으로 했다. 이 영화는 여기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에 대한 비난이 사법처리 요구로 번지면서 논란의 원천이 되었다. 이 영화는 대체로 페르난데스의 역사학술자료들을 기반했고 페르난데스는 그 후 “동티모르의 독립: 다양한 시각들’(The Independence of East Timor: Multidimensional Perspectives)을 썼다. 발리보 사건은 훗날 각색되어 1982년 로저 워드(Roger Ward)가 시나리오를 쓰고 테리 브룩(Terry Bourke)이 감독한 영화 <형제들(Brothers)>의 초반 에피소드에 사용되기도 했다. (사진: 발리보 영화 포스터)
2011년 멜번 씨어터 캄파니(Melbourne Theatre Company)와 호주 서부의 블랙 스완 스테이트 씨어터 캄파니(Black Swan State Theatre Company)는 호주 극작가 에이던 페네시(Aiden Fennessy)에게 발리보의 5인을 테마로한 새로운 작품을 쓰도록 요청했다. ‘국익’(National Interest)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살해당한 기자 토니 스튜어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2012년 퍼쓰와 멜번에서 공연되었다. 2012년 5월 20일 첫 공연에 맞춰 동티모르 대통령 호세 라모스-호르타가 토니 스튜어트에게 추서된 공로훈장을 그의 형제 폴 스튜어트에게 수상했다.
‘국익’ 연극 공연 중 한 장면
https://en.wikipedia.org/wiki/Balibo_Five
발리보 사건으로 인해 동티모르는 외신기자들에게 악명높은 곳이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에서 외신 언론을 대체로 철저히 통제했고, 그래서 동티모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인도네시아 본토는 물론 해외에 좀처럼 알려지지 않았다. 그사이 동티모르에는 부통령을 역임한 뜨리 수뜨리스노(Tri Soetrisno), 하비비 시절 전군사령관 위란토(Wiranto), 쁘라보워 수비안토 특전사령관 등 쟁쟁한 장성들이 거처가며 훈장과 계급을 추가하는 곳이 되었고 서파푸아나 아쩨 반군과 싸우는 인도네시아군의 실전 훈련장같은 곳이 되었다. 그리하여 1975년부터 시작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은 1999년에 끝났지만 그 시대의 악행과 전쟁범죄들은 그 다음 세기에 들어선 후에도 오래동안 청산되지 않았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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