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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수하르토 (3) 본문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전대통령 (3)
경제
경제를 안정시키고 신질서정권에 대한 장기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수하르토 정부는 ‘버클리 마피아’(Berkeley Mafia)라고 통칭되는 미국 유학파 인도네시아 경제학자들을 주축으로 경제정책에 새로운 변화를 주려 했다. 그들은 보조금을 줄여 정부의 채무를 축소시키려 했고 환율정책을 개혁하면서 1966년 660%에 달했던 인플레이션은 1969년 19%로 개선되었다. 창궐하던 기근 역시 1967년과 1968년 USAID의 식량원조(쌀) 유입으로 크게 완화되었다.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국내유통되는 자금의 규모가 너무 빈약했으므로 신질서 정부는 수카르노의 자급자족 경제정책을 완전히 뒤집고 1967년 외국인투자법 제정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일부 특정 경제부문을 해외자본에 개방했고 수하르토 자신도 유럽과 일본을 다니며 인도네시아에 대한 투자를 종용했다. 그리하여 최초로 다시 유치하게 된 해외자본들 중엔 프리포트 유황회사(Freeport Sulphur Company)/국제니켈회사 (International Nickel Company) 등 광산회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가 규제하는 틀 안에서 국내 사업가들(대부분 화교)이 1960년대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경공업 분야의 수입대체를 이루며 아스트라 그룹, 살림 그룹 같은 기업체들을 일구어 재계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프리포트의 파푸아 그라스버그 광산(좌), 인터내셔널 니켈 캄파니 인니 법인 로고(우)
1967년부터 인도네시아에 관한 정부간 회합(the Inter-Governmental Group on Indonesia-IGGI)의 10개 회원국으로부터 정부가 확보한 저리 외채가 유입되어 재정적자를 메우기 시작했다. IGGI펀드와 1973년 오일쇼크 당시 획기적으로 증가한 석유수출대금의 괄목할 만한 증가에 힘입어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기 시작했는데 이 5개년 계획은 REPELITA(5개년 계획-Rencana Pembangunan Lima Tahun) 이라 명명되어1969년부터 1998년까지 제 6회차에 걸쳐 시행되었다.
수하르토는 비공식 경제분야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는데 군과 군가족들이 운영하는 야야산(yayasan)이라 불리는 자선단체들을 동원해 촘촘한 네트워크를 짜 국내외 기업들에게 정부지원과 허가를 내주는 댓가로 막대한 ‘기부금’을 받아냈던 것이다. 그 수입의 일부는 실제 자선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대부분은 자금세탁되어 정치적 조력자들을 포상하고 신질서 정부에 대한 지지를 유지하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1975년 수하르토의 측근인 입누 수또워(Ibnu Sutowo)가 경영권을 쥐고 있던 국영 석유회사 뻐르타미나가 잘못된 경영과 부패로 인해 외채상환불능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 외채를 국가가 대신 지불해 주면서 국가의 채무는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입누 수또워는 뻐르따미나 사장 재직시절 수디르만 거리 끝자락의 빠뚱 뻐무다 멈방운(Patung Pemuda Membangun-건설적 청년상), 속칭 앗뜨거동상을 제작해 헌납한 인물이다. (사진-입누 수또워 당시 뻐르따미나 사장, 출처: https://today.line.me/id/pc/article/Ibnu+Sutowo+dan+Pertamina+Tentara+yang+Main+Bisnis+Minyak-89MkMV)
외교정책
수하르토 정부는 집권 초기였던 냉전시대에 표면상 중립정책을 채택하고서도 인도네시아 경제회복을 위한 지원을 확보한다는 목적으로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서방과도 조용히 손을 잡았다. 수하르토의 강력한 반공전선에 감명받은 서방국가들은 지체없이 지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중국이 9월 30일 쿠데타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인해 인도네시아는 1967년 10월 중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가1990년에 다시 회복했다.
수하르토가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괴멸시키자 소련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무기수출을 중단했다. 그러나 1967년부터 1970년 사이에 외무상 아담 말릭은 수카르노 시절 소련과 여타 동구권 공산국가들에게 빌린 엄청난 부채를 재조정하는 여러 합의를 이끌어 내는 수완을 보였다. 지역적으로는 1966년 8월 말레이시아와의 대결정책을 종식했고 1967년 8월에는 인도네시아가 동남아국가연합(ASEAN)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이 조직은 당시 더욱 혼전 속으로 접어들던 베트남전같은 갈등이 없는 동남아국가 간 평화로운 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나 카네이션 혁명의 결과, 포루투갈이 동티모르의 식민지에서 철수하자 좌파 세력인 프레틸린(Fretilin- Frente Revolucionária de Timor-Leste Independente)이 국민적 지지를 얻어 선거에 승리하면서 동티모르는 내전상황에 빠져들었다. 당시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제럴드 포드 미국대통령과 구 휘틀럼(Gough Whitlam) 호주 수상을 포함해 서방국가들의 동의를 받아, 수하르토는 공산국가 수립을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동티모르 내전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동티모르인들이 토착그룹인 UDT와 APODETI를 지지하도록 유도하는 것에 실패하자 수하르토는 1975년 12월 7일 동티모르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침공을 감행했고 급기야1976년 7월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시켰다. ‘고립과 멸절’이라고 명명된 군사작전이 1977년부터 1979년 사이에 수행되며 내지의 프레틸린 거점들을 분쇄했지만 게릴라들의 저항이 계속되면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티모르섬 절반에 해당하는 이 지역에 1999년까지 강력한 군세를 유지했다. 인도네시아 강점기인 1974년부터 1999년 사이 동티모르에서는 최소 90,800명, 최대 213,600명이 분쟁과 관련해 목숨을 잃었다. 이들 중 명백히 타살당한 이들은 17,600~19,600명 선이고 나머니 73,200명~194,000명은 이와 관련한 기근과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들이다. 인도네시아군은 이들 죽음의 70%에 대한 직접적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수히 수하르토의 집권기간 동안 침공과 점령으로 인해 발생한 동티모르의 사망자들은 최소 10만명 정도를 헤아린다.
동티모르에서 훈련중인 쁘라보워 수비안토 소령의 부대
아포데티(APODETI)와 UDT 병사들(좌), 독립을 외치는 프레틸린(우)
다시 경제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성장은 수하르토 정권을 30년간 지탱해 주었다. 1996년 인도네시아의 빈곤율은 11%로 떨어져 1970년의 45%와 괄목할 만한 개선을 보였다. 1966녑부터 1997년의 기간동안 인도네시아의 실질 GDP 성장은 연 5.03%였고 인당 실질 GDP는 806불에서 4,114불까지 치솟았다(이 자료는 다시 조사해야 할 듯. 너무 높음) 이중 제조업은 10%에 미치지 못했고 대부분의 총생산은 석유나 농업 부문에서 발생했다. 1997년까지 제조업은 25%, 공산품 수출은 53%로 늘어났다.(증가율인지, 뭐에 대한 비율인지 정확치 않음) 정부는 일련의 빨라빠(Palapa) 통신위성 발사로 대변되는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일으켜 1990년대 중반의 인도네시아 사회간접자본은 중국과 비슷한 수준을 이루었고 수하르토는 이러한 성과를 내세워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983년 MPR의 결정으로 그는 ‘개발의 아버지’란 칭호까지 얻었다.
보건소 프로그램과 같은 수하르토 정부의 의료 프로그램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의 기대수명을 1966년의 47세에서 1997년 67세까지 늘렸고 유아사망율도 60% 이상 감소시켰다. 정부는 1973년 인프레스(inpres=Instruksi Presiden 대통령 교시) 프로그램을 발동시켜 1983년까지 초등학교 취학율을 90%까지 끌어올렸고 남녀간의 교육수준의 간극을 거의 해소했다. 지속적인 농업지원을 통해 1984년엔 쌀 자급자족도 달성하여 유엔 식량기구(FAO)로부터 수하르토가 금메달을 수상했다.
1980년대 초, 수하르토 정부는 1980년대 석유과잉공급으로 인한 유가폭락으로 석유수출이 급감하자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갖게 된 값싼 인건비와 몇 차례에 걸친 환율절하를 발판 삼아 수출용 제조업으로 경제기반을 성공적으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산업화의 전면에 화교기업들이 대두해 대기업으로 급성장하면서 국가경제를 좌우할 정도의 힘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대기업들 중에는 림 시우 리용(Liem Sioe Liong -현지명 수도노 살림 Sudono Salim)의 살림그룹, 위 엑 쫑(Oei Ek Tjong -현지명 에카 찝타 위자야Eka Tjipta Widjaja)의 시나르 마스 그룹, 찌아 한 뿐(Tjia Han Poen -현지면 윌리암 수르야자야 William Soeryadjaya)의 아스트라그룹, 리 모 티(Lie Mo Tie- 현지명 목타르 리야디 Mochtar Riady)의 리포그룹, 빵 준 펜(Pang Djun Phen-현지명 쁘라요고 빵에스뚜Prajogo Pangestu)의 바리토 퍼시픽 그룹 그리고 봅 하산(Bob Hasan)의 누삼바 그룹(Nusamba Group)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수하르토가 이들 한 줌도 안되는 화교기업들을 초대형 그룹으로 성장하도록 지원한 것은 그들이 소수인종 출신이므로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세력이 되지 않을 터였고 과거 경험상 그들이 국가의 실질성장을 도울 부와 자본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판단때문이었다. 수하르토의 지원에 호응해 이들 기업들은 수하르토에게 정권유지비용 지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림시우리용(살림 그룹), 위엑쫑(시나르마스 그룹), 지아한뿐(아스트라 그룹),
목타르 리야디(리포그룹), 쁘라요고 빵에스뚜(바리토 퍼시픽 그룹), 봅 하산(누삼바 그룹)
1980년대 말, 수하르토 정부는 저축을 늘리고 성장에 필요한 국내 자금조달처를 확보해 준다는 취지에서 은행 부문의 규제를 완화하기로 결정했다. 수하르토는 이른바 ‘1988년 10월 팩키지’(PAKTO 88)라고 하는 법령을 공표했는데 이는 은행설립과 대출확대 요건들의 대폭 완화를 골자로 했다. 그 결과 1989년에서 1991년 사이 수많은 은행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 숫적으로 50%가 증가했다. 저축을 늘리기 위해 정부는 TABANAS 프로그램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자카르타 증권거래소도 1977년에 다시 개장해 1990년 규제완화 이후 국내 IPO들의 기염과 해외자본의 유입으로 질풍 같은 성장을 기록했다. 갑작스럽게 대출자금이 풀려1990년대 초의 경제성장이 무섭게 일어났으나 금융부문의 취약한 규제환경은 결과적으로 수하르토 정권을 무너뜨리게 만드는 1997년 파국적 위기의 씨앗을 뿌린 셈이 되었다.
족벌주의
그리고 경제발전은 부패, 결탁 족벌주의(Korupsi, Kolusi, dan Nepotisme/KKN)의 급속한 확산을 불러왔다. 1980년대 초, 수하르토의 자녀들, 특히 시티 하르디얀티 룩마나(Siti Hardiyanti Rukmana-뚜뚯Tutut), 후토모 만달라 뿌뜨라 (Hutomo Mandala Putra-또미 Tommy), 그리고 밤방 뜨리핫모죠(and Bambang Trihatmodjo)는 탐욕스러운 어른으로 성장해 정부가 발주하는 알짜 계약들을 그들의 기업들이 모두 따갔고 시장을 독점하여 타업체들에게 경쟁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고속도로-유료도로 시장은 뚜뚯이 독점했고 국민차 시장은 밤방과 또미가, 영화시장은 수하르토의 사촌인 수디위깟모노 (Sudwikatmono)가 시네플렉스 21을 세워 독점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수디위깟모노, 시네플렉스21(시네마21) 창업주
그의 가족들은 인도네시아 전국에 걸쳐 36,000km2의 부동산을 소유했는데 그중엔 자카르타 중심부 사무실 지역 100,000m2와 동티모르 전체토지의 거의 40%를 포함했다. 이와 별도로 수하르토의 가족 구성원들은 인도네시아의 가장 알짜 국내기업 1,251 군데로부터 공짜주식을 넘겨받기도 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수하르토가 지원하던 화교 후원자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또한 외국기업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하르토의 가족 구성원들이 소유한 회사들과 전략적 파트너쉽을 구축하는 것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수하르토의 가족들이 운영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야야산(재단)들을 더욱 덩치를 불려 매년 공공부문은 물론 민간부문에서 수백만불 씩의 찬조금을 휩쓸어 갔다.
2004년 초, 독일에 본부를 둔 반부패 비정부단체인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는 지난 20년간 스스로 가장 돈을 많이 벌었다고 추정되는 지도자들의 명단을 발표했는데 수하르토의 그의 가족들이 상위에 랭크되었고 그들이 빼돌린 액수는 150억~350억불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1980-1990년대의 신질서 정권
1980년대에 수하르토는 시민단체들을 거세하고 선거를 뒤에서 조종하며 군의 폭력에 기대어 정권을 유지했다. 수하르토는 1976년 6월 전역하면서 군 전체를 재편해 각 사령관들에게 집중되어 있던 지휘권을 대통령에게 집중되도록 만들었다. 이제 그는 최소한 수카르노처럼 군 장성들에게 등 떠밀려 실각하진 않을 터였다. 1983년 3월 그는 레오나르두스 벤야민 무르다니 장군(General Leonardus Benjamin Moerdani )을 통합군 사령관으로 지명했는데 그는 이후 일부 사안에서 정부와 각을 세우는 분자들을 강경하게 분쇄하는 강경노선을 선택했다. 한편 그는 로만 카톨릭 신자였으므로 수하르토에게 정치적 위협이 될 소지는 적었다.
레오나르두스 벤야민 무르다니 장군은 통칭 ‘베니 장군’으로 불렸다.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치솟은 범죄율을 통제하기 위해 육군 부대들이 1만 명에 달하는 범죄혐의자들을 살해했다. (Petrus Killings 참조) 수하르토가 빤짜실라 만을 유일한 이념으로 가르치려 했던 것이 이슬람법이 세상 그 어떤 사상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믿는 보수 이슬람 그룹들의 시위를 불러왔다. 1984년 9월에 벌어진 딴중쁘리욱 학살에서 육군은 보수 무슬림 시위자들 중 100명에 달하는 인원을 살해했다. 보로부드르 폭탄테러를 포함해 보복적 성격의 일련의 소규모 폭탄테러들이 줄을 이었는데 이로 인해 수백 명의 보수 이슬람 활동가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엔 훗날 국회의장이 되는 AM 파트와(AM Fatwa)와 나중에 제마 이슬라미야(Jemaah Islamiyah)의 수장이 되는 아부 바까르 바시르(Abu Bakar Bashir)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1989년 자유아쩨 운동조직이 경찰서를 공격하여 시작된 소요를 진압하는 군 작전을 통해 2000명이 살해된 끝에 1992년에 가서야 소요가 종식되었다. 1984년에 수하르토 정권은 언론을 보다 단단히 틀어쥐기 위해 모든 미디어들이 언론운영허가(SIUPP)을 받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내놓았는데 이 허가는 정보통신부가 언제든 맘내키면 폐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냉전이 종식되고 공산주의에 대한 서방의 우려가 사그러지자 인권에 대한 수하르토의 행적이 더욱 국제적인 우려를 샀고 특히 1991년 동티모르의 산타크루즈 학살은 대표적인 악재였다. 수하르토는 1992년 비동맹운동의 수장으로 선출되었고 1989년에는 APEC의 창립멤버가 되어 1994년 APEC 정상회담을 보고르에 유치하기도 했다.
AM 파트와(좌), JI의 아부 바까르 바시르
대내적으로는 수하르토의 가족들이 비즈니스와 권력을 독점하자 상대적으로 권력에 대한 접근로가 좁아지고 알짜배기 사업기회 잡기가 어려워진 군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988년 3월 MPR 회기 중 군에서 배정된 의원들은 수하르토의 최측근인 수다르모노(Sudharmono)가 부통령으로 지명되는 것을 막으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수하르토는 그의 권력의 근본을 군에만 한정하지 않고 다른 부문으로 다양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슬람 세력의 지원을 이끌어내려 했다.그는 매스컴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취재진에게 휩싸여 1991년 하지 순례를 다녀와 하지 모하마드 수하르토(Haji Mohammad Suharto)라는 이름을 얻었고 이슬람의 가치관을 칭송하며 신앙심 깊은 장군들을 승진시켰다. 그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이 대기업들을 독식하고 있던 현실에 분개하며 이제 분연히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나던 무슬림 사업가 사회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1990년 11월 ICMI(인도네시아 이슬람 지식인 협회 - Indonesian Islamic Intellectuals' Association)를 설립했고 1978년부터 연구기술처 장관으로서 줄곧 측근에 두었던 BJ 하비비(BJ Habibie)를 그 수장으로 앉혔다. 이 시기에 1994년 4월 메단에서 소요와 화교들을 타깃으로 한 인종폭동이 자주 일어났다.
1990년대에 이르러 수하르토 정부는 하비비(Habibie), 하르모꼬(Harmoko), 기나자르 까르타사스미타(Ginandjar Kartasasmita), 악바르 딴중(Akbar Tanjung) 같이 수하르토에게 발탁되어 합류한 민간인 출신 정치가들이 넘쳐났다. 하비비의 영향력이 커진 증거도 도처에 나타났다. 주요 인도네시아 잡지 두 곳과 타블로이드 신문 한 곳이 1993년 해산된 동독해군의 함대 거의 전체를 하비비가 사들인 것에 대한 비난 기사를 실었는데 이는 그 선박들 대부분이 수리불가능한 고철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정보통신부가 나서 1994년 6월 21일 이들 매체들의 폐간을 명령했다. 그것은 하비비가 수하르토의 총애를 입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왼쪽부터 BJ하비비, 하르모코, 기난자르 까르타사스미타, 악바르 딴중
수하르토의 경제개발에 힘입어 1990년대부터 인도네시아 중산층이 증가하면서 그 중산층들은 수하르토의 독재와 그 자녀들의 부패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고 30년에 육박하는 신질서 정부의 대대적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1996년 수카르노 전대통령의 딸이자 그간 대체로 체제순응적이던 PDI 당의 당수였던 메가와티 수카르노뿌뜨리(MEgawati Soekarnoputri)가 확대일로의 사회불만에 편승해 힘을 키웠다. 이를 두고볼 수 없었던 수하르토는 수리야디(Suryadi)가 이끄는 PDI 당의 다른 분파를 매수해 메가와티를 당수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1996년 7월 27일 수띠요소(Sutiyoso) 중장이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과 고용된 깡패용역들이 자카르타에서 시위를 벌이던 메가와티 추종자들을 공격해 피비릿내나는 소요와 약탈로 번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200여명의 민주주의 활동가들이 체포되었고 이들 중 23명은 수하르토의 사위였던 쁘라보워 수비얀토 중장이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띠요소 중장은 훗날 자카르타 주지사를 역임하면서 오늘날 자카르타 전역에 뻗어있는 '버스웨이' 시스템을 도입한 인물이다.
왼쪽부터. 메가와티 수까르노뿌뜨리 전 대통령, 수리야디 PDI전총재, 수띠요소 자카르타 시장
2018.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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