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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삶을 살아간 친구에게

beautician 2018. 12. 1. 11:54


완쩌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나보다 열 살 쯤 아래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나이같은 신상정보를 따로 물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는 미용사였고 내가 미용기기를 수입판매하던 10여년 동안 최소한 수십번 만났더랬죠.




이 사진 오른쪽의 완쩌는 평범한 남자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에겐 이 사진에서처럼 여성들에게만 있음직한 무언가가 살짝 엿보입니다.

저때가 2008년이었습니다. 당시 보타니 스퀘어가 생기기 전 보고르에서 가장 좋은 몰이었던 에카로카사리 몰의 브라운 살롱이 있던 시절, 그곳의 가장 아름다웠던 스타 미용사 데시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그는 브라운 살롱이 아니라 같은 계열인 루디하디수와르노 살롱이 잘 나가는 미용사였어요.

브라운 살롱과 같은 층에 있었죠.


왼쪽에서 두번째가 데시, 오른쪽에서 두번째 예쁜 분이 엘리 아줌마



같은 미용실에 있던 고참 미용사 엘리 아줌마가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2013년 6월의 일입니다.

당시 10년간 내 생활을 지탱하던 미용사업이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으며 급전직하하던 시기였습니다. 평소 가깝게 지냈던 엘리 아줌마는 요양을 한다며  한동안 보이지 않았는데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쯤 만났던 그녀의 얼굴엔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없습니다. 죽음이 가까와 있었죠. 엘리 아줌마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실감을 주었습니다. 내가 찾아갔던 그 장례식장엔 예전 브라운 살롱과 루디하디수와르노 살롱의 미용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그곳에 완쩌도 있었습니다.



이메이, 데시, 완쩌


당시 완쩌는 여자가 되어 있었어요.

그는 현지인들이 속어로 반찌, 또는 벤쫑이라 부르는 여성 정체성을 가진 남자였고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인 끝에 여성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결혼도 했다고 들었어요. 물론 남자와 결혼한 거죠.


어떤 이들은 완쩌같은 이들을 경멸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난 그렇게 험한 입을 놀리는 이들을 굳이 비난하거나 윽박지를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완쩌와 같은 이들은 평생 꿈꾸었던 바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꿈꾸던 작가가 되고 정치가가 되는 것처럼 그는 평생 꿈꾸었던 '정말 여자'가 되어가던 중이었습니다. 난 그들을 비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편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하는 이들을 욕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더욱이 완쩌 같은 이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습니다. 


저런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썪는 것같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쓸 데 없는 눈은 썩어 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주변엔, 우리 주변엔, 우리가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완쩌같은 이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편견과 불이익과 싸우며 원하는 바를 향해 나가려는 이들은 그들이 색다른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든, 총을 들지 않겠다는 굳은 신앙적 신념이 있든 반드시 존중되고, 그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최소한의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얼마전 그 완쩌가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완전한 여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죽음을 맞은 완쩌와 같은 이들에게 '에이즈'의 굴레를 씌우려 합니다. 실제로 내 주변에서 일곱 명 정도 에이즈로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완쩌의 사인은 신부전이었어요. 그녀의 콩팥이 더 이상 삶을 지탱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시신이 급히 중부자바의 고향으로 옮겨졌기에 이번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마음은 편치 않았어요.

더욱이 그녀가 살아오며 견뎌온 삶의 무게를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녀가 이제 도착한 편견도, 차별도 없는 그곳에선 온전한 스스로가 되어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2018.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