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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칼럼

뚜구따니(Tugu Tani) - 떠나가는 아들의 초상

beautician 2018. 9. 22. 10:00

뚜구 따니(Tugu Tani) – 농민용사의 동상

 



 

빠뚱 뚜구따니(Patung Tugu Tani-농부 동상) 또는 빠뚱 빠흘라완(Patung Pahlawan-영웅동상)이라 불리는 청동상(靑銅像)은 자카르타의 감비르역 가까이에 있는데 짜삥(Caping)이라 부르는 끝이 뾰족한 밀집모자를 쓴 남자와 한 여인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소련이 인도네시아와의 우정의 표시로 선물한 것으로 마트베이 겐리코비치 마니저(Matvey Genrikhovich Manizer)와 그의 조수이자 아들 오십 마니저(Ossip Manizer)의 작품입니다.

 

동상의 여인은 올림머리를 하고 인도네시아 전통의상인 끄바야(Kebaya)를 입고서 준비된 음식이 담긴 접시를 한 남자에게 내밀고 있습니다.  꼿꼿한 자세의 남성은 일반적으로 인도네시아 농부들이 사용하는 꼬깔처럼 끝이 뽀족한 밀집모자인 짜삥을 쓰고 있고 대검까지 장착한 긴 소총을 어깨에 매고 있죠. 독립전쟁을 위해 떨쳐 나서는 아들과 그 어머니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 동상이 서부이리안의 인도네시아 편입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다지 설득력은 없어요. 서부이리얀(지금의 서파푸아)을 인도네시아에 합병하기 위한 뜨리꼬라(Trikora) 작전에는 육해공군과 경찰군이 동원되었지만 농민군은 동원되지도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마트베이의 작품들은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어느 정도 상통하는 바 예술작품에서도 혁명성이 엿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Matvey Manizer

 

1959년 니키타 후루시쵸프 서기장을 만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 수카르노는 거기서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입각한 동상들을 도시 곳곳에서 발견하고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차제에 그는 고위관료를 통해 당시 소련 예술아카데미의 부원장으로 재직하던 마트베이를 소개받았는데 당시 마트베이는 1950년 이반 파블로프(Ivan Pavlov)의 동상을 랴잔(Ryazan)시에  세운 것을 마지막으로 10년 가까이 작품활동을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이반 파블로프는 조건반사 실험의 대명사인 파블로프의 개에서 나오는 그 파블로프입니다. 플란다스의 개 말고요.

 


랴잔 소재 이반 파블로프의 동상

 

수카르노는 마니저 부자를 인도네시아에 초청하면서 동상제작을 요청했고 마트베이는 영감을 얻을 목적으로 인도네시아 방문을 수락합니다. 1960년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던 그는 서부자바에서 독립전쟁에 나서는 아들을 응원하면서도 부모를 두고 먼저 죽어서는 안된다며 반드시 돌아올 것을 신신당부했다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급히 준비한 음식을 건내며 떠나는 아들의 안전을 간곡히 빌었습니다.

 

그는 소련에 돌아가자마자 작업을 시작해 그 이야기 속의 이미지를 동상으로 형상화 했습니다. 동상제작이 완료된 것은 1963년의 일입니다. 이 동상은 인도네시아와 소련의 우정의 표시로서 그 해 해상으로 운송되어 인도네시아에 전달되었고 현재의 멘뗑지역에 세워지면서 영웅 동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여기에 수카르노가 자기 영웅들을 존중하는 민족이야말로 위대한 민족이다라는 글귀를 동상의 받침대에 붙인 것입니다.

 

이 동상이 공산주의적이라 하는 이들은 제작자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그것도 지도층 인사라는 점뿐만 아니라 동상의 여성이 겸손하며 복종적 모습인데 비해 남성은 울퉁불퉁한 근육에 가슴을 내밀고 영웅적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점을 지적합니다. 농부인데도 군복을 입고 무장한 상태로 스스로를 과시하는 듯한 모습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상징한다는 것이죠.

 

물론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주역은 네덜란드 군사학교 KNIL 출신들과 일본군 보조부대로 조직된 헤이호(Heiho) 또는 국토방위대(PETA)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군의 파시스트적 잔재가 포함된 모습을 담지 않으려 했던 마니저가 굳이 무장한 농민을 모델로 삼은 것은 당시 소련공산당을 비롯한 대부분 공산당군대들이 농민들로 구성되었던 것처럼 독립전쟁 당시 인도네시아군에서도 장교들을 제외한 일반병사들은 거의 모두 농민출신이라는 점에 착안했던 것이라 보입니다. 특히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와 밀월관계를 즐기던 수카르노는 육해공, 경찰군 외에 자신이 특별한 군사적 배경이 되어줄 제5의 군대를 조직하려 했고 그 결과물은 북한의 노농적위대와 거의 비슷한 모습이 될 터였습니다. 그러니 제5의 군대 또는 노농적위대의 주력처럼 보이기 쉬운 뚜구따니의 농민병사가 공산주의를 상징한다는 것은 무리한억측이 아닙니다.

 

9.30 공산쿠데타 이후 공산주의와 관련된 모든 것이 민감하게 터부시되는 인도네시아에서 이 동상을 허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온 것은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그러나 이 동상이 인도네시아 민중의 투쟁사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폐기요청은 매번 기각되었습니다.

 

이 동상은 오늘도 아리아쥬타 호텔 앞 멘뗑 거리 한 가운데에 서있습니다.

 

2018. 9. 21.




 

 

P.S. 사족이지만 2012 1 22일 마약에 취한 아프리야니 수산티(Afriyani Susanti)라는 여성이 다이하추 제니아 차를 몰고 이 동상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고속으로 사람들을 치어 여러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지금도 뚜구따니의 비극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