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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칼럼

디포네고로 전쟁과 강제경작제도

beautician 2018. 9. 16. 10:00

디포네고로 전쟁과 강제경작제도

 

<막스 하벨라르>의 배경이 되는 1840년대에는 동인도 전역에서 네덜란드에 대한 반란이 거의 끝나가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책의 본문에서도 등장하는 것과 같이 네덜란드는 당시 람뿡에서 벌어진 농민군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중이었고 수마트라 북부의 메단, 아쩨 지역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발리의 왕국들을 대상으로도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타비아의 네덜란드 총독부는 물론 본국 재정마저 파탄낼 정도의 거대한 전쟁이 10여년 전 그 막을 내린 상태였어요. 그것은 자바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디포네고로 전쟁이었죠.

 

이 전쟁이 얼마나 치열하고 파괴적이었는지는 여러 지표들이나 전사상자 수치를 들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반증하는 것은 네덜란드군이 디포네고로군에게만 집중하기 위해 동인도 전역의 모든 반란군들과 휴전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1825년 자바 전쟁이 발발하면서 네덜란드군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했고 디포네고로군의 세력이 자바섬 전체로 퍼지면서 총독부가 있는 바타비아를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맞설 네덜란드군은 병력의 절대 숫자가 충분치 않았을 뿐 아니라 그나마 동인도 전역에 흩어져 각각 고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죠. 네덜란드는 자바섬의 전황을 뒤집기 위해 타 지역의 네덜란드군들을 모두 자바섬으로 소환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 지방세력들의 군소반란에 매달릴 여유가 없을 만큼 네덜란드는 디포네고로군에게 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네덜란드 본국으로부터도 추가 파병을 받아야 했죠. 디포네고로 왕자가 좀 더 확실히 밀어붙였다면 네덜란드의 동인도 식민지 강점은 이때 그 종말을 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소는 헨드리끄 머르쿠스 드콕 장군(General Hendrik Merkus de Kock)이 도입한 벤뗑 스텔셀 전략(Strategy Benteng Stelsel)인데 이는 요새 시스템 전략정도로 번역됩니다. 반군 지역을 점령하면 신속하게 간이 요새를 세워 해당 지역을 영구적으로 확보하고, 촘촘히 구축된 요새망 사이에 통신로를 기민하게 운용하여 각 지역 반군들을 격리시키고 궁극적으로 역외로 몰아내거나 섬멸하겠다는 것이었죠. 이 전략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디포네고로군은 마침내 수세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성공의 이면에는 네덜란드의 경제적 딜레마가 있습니다. 대규모 군대를,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식민지에서 유지한다는 것, 더욱이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일이죠. 그런데 네덜란드군은 거기에 더해, 전쟁 후반기에 이 요새 시스템 전략의 일환으로 자바섬 일대에 300개가 넘는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결국 그 과정에서 디포네고로 왕자는 총독부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본국의 국고마저 완전히 거덜내 버렸던 것입니다.

 

1830년 드콕 장군이 휴전협상을 빌미로 불러낸 디포네고로 왕자를 마글랑에서 나포하면서 5년간의 자바전쟁은 마침내 그 종지부를 찍게 되지만 이제 네덜란드로서는 그간의 막대한 재정적자를 신속히 메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쥐어짜기 위해 등장한 것이 강제경작제도’(Cultivation System=Cultuurstelsel)라는 정책이었어요.

 

바타비아 신임총독 요하네스 반덴보쉬(Johannes Van Den Bosch)가 도입한 이 제도로 인해 농부는 자기 농지의 5분의 1을 할애해 설탕, 커피, 인디고 같은 환금작물 제배해야 했고 농지가 없는 주민들은 1년의 5분의 1을 정부 토지에서 노역해야만 했습니다. 좀 더 손이 많이 가는 작물임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벼를 경작하는 정도의 비용만을 지불했고 그나마 판매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윤은 나누어 주지 않으면서 비용이나 흉작에 대한 책임은 모두 농부에게 지웠습니다. 심지어 세금을 낸 농부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되거나 비용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례도 빈번했습니다. 자기 농지를 관리할 틈도 없이 환금작물 재배에 강제동원되어야 했던 자바인들은 강제경작제도가 시행되던 40년 동안 몇 번씩이나 가혹한 기근을 맞아야 했고 동인도 전역에서 아사자들이 속출했습니다. 3모작이 가능한 천혜의 땅 자바에서 말이죠. 디포네고로 전쟁에 대한 네덜란드의 처절한 보복이었던 것일까요?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막스 하벨라르>1840년대 서부 자바의 반뜬과 르박, 수마트라의 나딸과 빠당 등을 그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강제경작제도가 한창 시행되고 있던 무렵입니다. 동인도의 주민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부가해 이교도로서의 죄악을 정화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성직자들의 정신나간 소리에 네덜란드 본국의 기독교인들은 열성적으로 아멘을 외치고, 책의 화자 중 한 명은 르박의 토양이 커피재배에 적합치 않은 이유가 토양개선을 위해 나태한 주민들의 노동력을 쥐어 짜라는 신의 계시라고 말하는 모습이 본문에 등장하죠. 저자 물타뚤리는 주인공 막스 하벨라르의 입을 빌어 이를 통렬히 비판합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근대소설 <막스 하벨라르>가 결과적으로 강제경작시대의 종말을 가져오고 훗날 세계공정무역의 아이콘이 된 것은 이제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변에는 반담 장군(또는 환 담머 장군: General van Damme)에 대한 작가의 앙심도 깔려 있습니다. 반담 장군의 실존 모델인 안드레아스 빅토르 미힐스 대령은 드콕 장군 밑에서 디포네고로 전쟁에 참전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훗날 바타비아 총독대행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는데 소설 속에서처럼 저자 물타뚤리와 실제로 나딸에서 회계문제로 충돌합니다. 당시 수마트라 서부해안의 주지사이기도 했던 미힐스 대령을 감독관이라는 미관말직의 물타뚤리가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고 매우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공직에서 떨려나면서 이를 갈았음도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책 속에선 반담 장군/미힐스 대령에 대한 비난과 자신을 위한 변호가 많은 지면을 차지합니다. 물타뚤리가 이 책을 개인적 복수의 도구로 사용한 측면도 부인할 수는 없는 대목입니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것은 1860년으로, 미힐스 대령은 그보다 11년 전인 1849년 발리 정복전쟁 중에 전사했고 네덜란드의 국고를 파탄시킨 드콕 장군과 디포네고로 왕자는 각각 1845년과 1855년에, 10년의 터울을 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물타뚤리는 그들이 모두 죽은 후 <막스 하벨라르>를 출간했으니 이 책은 어쩌면 끝까지 살아남은 자의 주장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불멸의 고전으로 남은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타당한 인간애에 대한 깊은 성찰을 그 기저에 담고 있기 때문이죠.

 

물타뚤리, 즉 에두아르트 다우베스 데커르도 1887에 유명을 달리합니다. <막스 하벨라르>가 처음 출판되고 10년 후인 1870, 그동안 동인도를 피폐하게 만든 강제경작제도가 마침내 폐기되는 것을 목도한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