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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데모하다 잡혀가서 ROTC 짤린 선배

beautician 2017. 12. 29. 17:18


내가 학군단에 입단했을 때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ROTC 출신의 70-80%가 공수부대로 배정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건 비단 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 대학의 영어영문과 출신 ROTC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었을 것입니다. 특전사가 미군과의 합동훈련에 자주 동원되기 때문에 영어가 능통한 재원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거였죠. 외대에서는 불어과도 적잖게 특전사에 갔습니다. 물론 특전사에서 그렇게 빈번하게 영어를 썼는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외대 영어과 ROTC 들은 깃수 당 늘 7-8이었고 이들 중 한 두 명을 빼고는 모두 특전사로 갔습니다. 24기였던 내 운명도 70-80%의 확율로 그렇게 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특전사 출신 불어과 선배가 나를 찍어 제3땅굴 브리핑장교로 끌고 가는 바람에 내 운명은 극적으로 바뀌지만 우리 기수의 나머지 3명 중 2명은 특전사,1명은 특공여단으로 배정되면서 75% 확율은 여전히 유지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그 특전사 선배가 날 끌고 갈 때 꼼짝없이 공수부대로 가는 거라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런데 7-8명이던 영어과 ROTC숫자가 24기에선 갑자기 4명으로 줄었는가 하면 우리가 입단하기 전, 22기 선배 한 명이 사고를 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학군단 2년차때 학군단복을 입고 반정부 시위에 참가했다든가 반정부 삐라를 뿌렸다든가 해서 잡혀들어가면서 ROTC에서도 퇴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외대 영어과들은 사상이 위험한 반정부 분자들이 많이 끼어있다는 판단에 따라 입단 정원을 반으로 대폭 줄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미 입단한 23기 8명을 뒤늦게 퇴출할 수는 없었지만 새로 뽑는 24기는 그래서 4명만 선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특전사의 영어수요는 그대로였을 테니 앞서 언급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다면 4명 모두 군복무 내내 특전사에서 낙하산을 탔어야 했을 것입니다.


군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난 그 용감한 22기 선배가 누구인지 자못 궁금했습니다. 물론 임관하지 못했으니 22기라고 깃수를 부르는 것이 적절치 못할 수도 있으나 그가 ROTC 생활을 1년 반 정도 한 것만은 분명한 일입니다. 당시 ROTC 출신들이 거의 100% 대기업에 취직되던 시절 비교적 약속되어 있던 미래를 반정부 시위를 위해 내던진 그는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그러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2011년 하반기에 비로소 그 선배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꼼수다'를 듣다가 정봉주 의원이 자신이  ROTC를 하다가 데모로 짤렸다는 얘기하는 것을 들었던 것입니다. 인터넷을 뒤져 관련 얘기들을 찾아보니 그때 그 22기 선배가 바로 정봉주 의원이었습니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지만 그가 했던 어떤 행동때문에 내가 영향을 받았던 시기가 그렇게 두 번 있었던 겁니다. ROTC 때와 나꼼수 때.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몇 달 후 그는 BBK 저격수로 찍혀 선거법 위반이란 허울을 쓰고 1년간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선배라서가 아니라 옳은 일을 하다가 나쁜 놈들의 보복을 받는 게 뻔한데도 옥살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개탄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과거로 돌리고 이제 활기찬 방송인이 되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저 사람이 내 선배라는 생각에 속으로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가끔은 좀 부끄러울 때도 있고 때로는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그가 2017년 12월 29일 사면복권된 것은 사필귀정입니다. 

그의 사면을 비난하는 인간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그의 정치권 복귀가능성을 아예 막아버리려 핏대를 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면되어야 마땅한 이유를 넘치도록 안고서 옥살이를 했던 것이고 그가 앞으로 정치일선으로 복귀할지 아니면 방송인으로 남을지는 오로지 그가 선택할 일입니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내일 빨간 빤쭈를 입을지 노팬티로 돌아다닐지 스스로 선택할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후배로서, 지지자로서, 동료 시민으로서 정봉주 전의원의 사면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2017.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