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아 현대사

쓴 사람 읽은 사람 마음이 다 같을 순 없어요

beautician 2018. 7. 9. 10:30

 

 

 

서문

 

이 책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일이 이리 커질 지 몰랐습니다.

 

자카르타의 길들은 당연히 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몇 년씩 그 길을 지나면서도 너무나 당연히그 이름의 의미를 모른다는 건, 외국어의 한계와 인도네시아에 돈 벌러 왔다는 원래의 목적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너무 생각없이 살아간다는 자책감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 도로를 달려야 할 이유가 없는 한국의 독자들에겐 아무 관계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충무로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담고 퇴계로가 퇴계 이황의 사상을 기리는 도로인 것처럼, 자카르타 주요 도로의 이름들, 그것도 인도네시아 거의 모든 도시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중앙통 도로들에 붙인 수디르만, 탐린, 수까르노, 하타, 야니 가똣 수브로토 같은 이름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의 역사관과 가치관을 살짝 들여다 보는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독립전쟁의 영웅 수디르만 장군의 생애와 소년 장교 다안모곳 소령의 이야기를 정리해 써본 것이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이 책에서도 그 두 사람의 이야기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술됩니다. 자카르타의 번화한 수디르만 거리는 인도네시아 경제의 중심지로 수많은 다국적기업 지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자카르타에서 서쪽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다안모곳 거리에는 현지 교민들이 일 년에 한번씩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러 가는 운전면허시험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쓰게 된 저명한 민족주의 독립투사이자 초대 대통령인 수까르노의 이야기는 그렇게 한 두 꼭지 정도로 끝낼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독한 마음 먹고 요약하려 한다면 달랑 두 세 줄로도 줄이지 못할 리 없지만 인도네시아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인도네시아의 역사 속에 수많은 왕국들과 위대한 제왕들, 영웅들이 있었지만 수까르노가 그중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아닐지언정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람임에는 이견이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수많은 도로에 붙여진 이름들 대부분이 그와 정치적, 시대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에겐 많은 공과가 있고 역사적 평가도 국가나 정치적 진영에 따라 상당부분 엇갈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350여년간 계속되었던 네덜란드 강점기를 끝내는 독립투쟁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인물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의 일생을 들여다 보며 그와 교류하거나 협력, 또는 반목하고 제휴하거나 적대시했던 사람들과 그 사이에 벌어졌던 중대한 사건들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정리하고 번역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 과정에서 수까르노라는 한 인물에 대한 소개가 아닌 그의 생애를 아우르는 일정기간의 현대사를 쓰게 된 것입니다. 기껏해야 아마추어 역사가 정도인 필자의 경륜으로 처음부터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쓰려 했다면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수까르노가 카리스마를 발하며 전성기를 맞던 시절, 인도네시아가 현재의 모습 대부분을 갖추었으니 이 책은 현대사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교과서나 논문처럼 딱딱하게 서술하기보다는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가능한한 흥미롭게 풀어나가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프롤로그 첫 부분을 인도네시아가 열대기후에 몇 개의 섬으로 이루어지고 어떤 민족들이 산다는 식의 코트라 시장조사보고서 같은 문구로 시작하는 것에 스스로 무척 거부감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광대한 인도네시아가 품고 있는 섬이나 언어나 민족의 숫자 같은 것은 사실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겐 전혀 중요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분들이 따로 계십니다. 인도네시아를 연구하거나 동남아 이웃 나라들을 포괄해 비교연구한 정치학, 지리학, 인류학 교수님, 박사님들이 얼마든지 계시고 요즘도 더욱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발리로 가는 신혼부부와 관광객들을 제외하곤, 지난 수십 년간 인도네시아행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사람들 태반이 자발적으로든, 등 떠밀려서든, 대체로 상업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현지사업을 위한 상당한 수준의 시장조사는 했겠지만 현지 역사나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마저 닦고 있으리라 기대하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인도네시아 역사를 굳이 모르더라도 경제활동에 뭔가 큰 지장이 있을 리 없습니다. 출장자들이나 교민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맞게 되는 주말과 연휴들을 알차고 안전하게 즐기려면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유명 여행지들, 산간오지의 여행정보와 사건사고에 대한 단편적인 뉴스들만으로 어쩌면 충분할 지 모릅니다. 불과 지난 세기 말까지만 해도 오지 취급을 받았던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도 이젠 기행문들과 관광정보들이 인터넷 공간에 차고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회화책들과 문법책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글로 되어 있는 그 이상의 정보를 얻으려 할 경우 앞서 언급한 저 교수님, 박사님들의 딱딱한 연구서적들로 훌쩍 건너 뛰어야 하는 건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일반 서적이 그다지 많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런 서적들을 내놓기에 시장이 아직 너무 작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지 않은 기행문과 문법책과 학술서적들만 존재하던 인도네시아 관련 인문학 서적 시장에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출판하기로 한 아모르문디 출판사의 결정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난 이 책을 쓰고 정리하고 퇴고하는 동안 기본에 충실하려 애썼습니다. 나중에 어떤 목적으로든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근거없는 야사나 잡설보다는 기본적으로 정사를 기반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해 번역했고 자카르타와 반둥 시내에 있는 다수의 역사 박물관들을 수차례 방문하며 검증작업도 시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글 자료가 전혀 작성되어 있지 않은 특정 역사상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해 한글자료를 남긴다는 부분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한편 도로명은 물론 건물, 회관, 학교, 군함 등에 붙여진 영웅들과 위인들에 대해 최소한의 상식을 제공하자는 애당초의 취지에도 충실하려 했습니다. 어쩌면 몰라도 상관없는 것이겠지만 알게 된다면 인도네시아와 인도네시아인들을 좀 더 깊숙이 이해할 기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도로명들이 위인들의 이름만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왕국들과 위대한 제왕들, 재상들의 이름들도 등장합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도로명들만 완전히 꿰뚫는다면 어느정도 현지 전문가 반열에 이미 올라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사를 알게 되면 인도네시아인들의 자긍심이 왜 그토록 드높은지, 그들이 우리와 얼마나 비슷하고 또 얼마나 다른지 나름대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를 마음에 품은 이들에게 아무쪼록 이 책이 이 나라와 이 사람들을 조금 더 알아 가는 통로가 되길 바랍니다.

 

2018. 2

 

 

나름대로 열심히 쓴 서문이지만 출판사의 정중한 수정 요구에 따라 완전히 다시 써야 할 모양입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