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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란 무엇인가-무라카미 하루키의 답변

beautician 2017. 5. 22. 09:00

소설이란 무엇인가?

독후감-직업으로서의 소설가(무라카미 하루키 양윤옥 옮김)

 

배동선

 

평생 글을 썼지만 써왔지만 2016년 재외동포문학상 소설부문에서 수상하면서 내 이름 뒤에 갑자기 작가란 칭호가 붙는 게 흐뭇하면서도 한편 살짝 겸연쩍은 게 사실입니다. 나 자신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뭐 하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오히려 돈 벌기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작가라는 꼬리표에 익숙해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단편소설 달랑 한 편 발표해 놓고 소설가라고 불리는 건 여전히 무척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니 제가 소설이 무엇인가 일반론을 논할 주제는 전혀 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소설을 써 본 경험같은 건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일입니다. 그런데 마침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을 읽고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하며 무척 공감한 바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위상이라면 소설의 본질을 논할 만합니다. 물론 소설 ‘’노르웨이의 숲’’ 200만부 이상 팔린 이후 생활고와 영원히 이별하고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며 국제적 활동을 하고 있는 그가 말하는 소설가의 길은 내게 해당되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 특히 장편소설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어쨌든 좋은 길라잡이가 될 책입니다. 그 인상적인 부분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부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소설을 쓰기 위해선 기발한 소재보다 약간의 매직이 필요하다.

 

원문에서는 영화 ET에서 ET가 창고의 잡동사니를 쓸어 모아 그걸로 즉석 통신장치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소설쓰기에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재료 그 자체의 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거기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매직입니다. 일상적이고 소박한 재료밖에 없더라도, 간단하고 평이한 말밖에 쓰지 않더라도, 만일 거기에 매직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것에서도 놀랍도록 세련된 장치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전쟁이나 쯔나미의 경험을 갖지 않고서도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소재들만을 가지고 놀라운 소설들이 쓰여지는 것이죠. 그 소재들을 엮어 매력적인 스토리로 만들어가는 매직이라는 것은 결국 작가의 재능 또는 운이란 뜻이겠죠. 거꾸로 말하면 아무리 훌륭한 소재들을 투입한다 해도 그 매직이 없다면 좋은 스토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누구나 소설 몇 편은 나올 만한 인생을 살아내는데 거기에 약간의 매직이 가미된다면 흥미진진한 소설이나 감동적인 수필, 시로 재탄생할 것이라는 얘기로 이해됩니다.

 

2. 장편소설을 쓰는 무라카미 하루키 식의 방법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개한 장편소설을 쓰는 자신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1) 몇 개월에 걸쳐 초고 완성

2) 일주일쯤 쉰 후 고쳐쓰기 시작. 여기서 대폭적으로 손을 보며 통일성 없는 챕터를 통째로 빼거나 한 뭉터기 씩 새로 써 넣기도 하고 등장인물 성격, 시간설정, 맥락 등을 전체적으로 고쳐나감. 이 작업으로 한 두 달 경과

3) 일주일쯤 후 다시 고쳐쓰기

4) 그런 다음 보름에서 한달 가량 완전히 잊어버리고 양생 또는 숙성 그런 다음 전에 보이지 않던 결점들이 보여 이를 수정

5) 3자에게 읽어보고 독후감 요구 (무라카미의 규칙은 트집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는 것) 기본적으로 턱턱 걸림을 제거하는 일. 이 고쳐쓰기는 비판 받은 부분만 집중적으로.

6) 다시 읽어달라 하고 비판에 대해 다시 수정. 이 과정을 반복 (뜯어고치며 문장을 수정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함)

7) 출판사에 넘긴 후에도 수없이 교정지 퇴고 그런 끝에 장편소설이 책으로 완성.

 

여기서 몇 개의 편견이 깨집니다. 펜을 들면 단숨에 결말까지 써내려 갈 것 같은 문호도 책을 내기까지 수없이 원고수정을 한다는 것과 발간 전에 제3자나 출판사 에이전트에게 먼저 보여준 후 조언과 독후감에 따라 또다시 수정작업을 한다는 부분들 말입니다.

 

TV나 영화에서 소설가들은 타이프라이터에 종이를 끼워 넣고 일차 시작하고 나면 고민도 수정도 하지 않고 일사천리로 마지막 장까지 마쳐 버리는 것처럼 묘사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기도 마지막 순간까지 수없이 수정한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의 장편소설을 끝마치기까지 1년 전후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는 소설가가 되려면 하나의 작업을 긴 시간 동안 만들고 다듬어내는 집중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3. 일인칭에서 삼인칭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등단 후 20년 남짓 일인칭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소설의 분량이 늘어나고 범위가 커지면서 일인칭으로 소화하기 어려워지기 때문.나 역시 평생을 일인칭으로 글을 써왔습니다. 아직 삼인칭은 아직 엄두도 못내고 있고요.

 

4. 문학상이란 작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 그러나 자유이용권은 아닙니다. 작가의 세계로 들어간 후 어떻게 살아가며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5. 사라져 간 신인작가들 그래서 문학상을 받으며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작가들이 재기 넘치는 소설 한 두 편을 남긴 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곤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이유를 소설가의 정원은 한정이 없지만 서점의 공간은 한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약간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소설 한 권쯤은 비교적 술술 써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부분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소재를 오랜 시간 축적하지 않아도, 매직을 쓰지 않아도 되고 장편소설에 1년 이상의 집중하고 인내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들이 작가들 앞에 많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문학서나 인문학서의 번역이나 평론 같은 것들 말입니다. 번역작업은 대체로 기계적 작업이고 평론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통찰력만으로 어느 정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런 일들이 소설가가 되는 것보다 확실한 수입이 보장된다는 부분입니다.

 

위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급했던 모든 부분들이 정말 마음에 와 닿았던 이유는

- 내가 살아오며 겪었던 경험들은 그리 대단한 소재가 아니다

- 그 어떤 수정도 필요하지 않은 소설을 단숨에 써 내려가는 문호들의 천재성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 일인칭 시점을 빠져 나가지 못하는 한계성

- 문학상을 받은 후의 현실. 여전히 글 쓰는 일로 돈 벌기 어려운 현실.

- 그래서 나도 결국 포기하고 사라질 것인가?

라는 부분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장 결론 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날 내가 쓴 책이 한 200만부 팔리면 나도 이런 걱정을 다시는 안 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