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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혜사랑의 이유

beautician 2017. 3. 14. 23:50


인도네시아에는 쁘라보워 수비안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2014년 대선에서 조코 위도도와 맞붙어 석패하고 만 그린드라당의 당수입니다.

그가 그린드라당(Partai Gerindra) 즉 '위대한 인도네시아 운동당'(Great Indonesia Movement Party)의 당수가 된 것은 2008년 초의 일입니다.


1951년 생인 그는 1970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74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합니다. 



1970년 열아홉살의 쁘라보워는 이렇게 잘 생긴 육사생도였습니다.



그는 동기생 중엔 조코 위도도에 앞서 10년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지낸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대장으로 전역했죠. 그러나 쁘라보워는 1998년까지 유도요노를 완전히 따돌리고 가장 앞서 달린 동기생이었지만 중장, 쓰리스타로서 군생활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것은 1998년 5월에 벌어진 자카르타 폭동과 수하르토의 하야 때문이었습니다. 1998년 3월 그는 3년간의 육군 특전사(KOPASSUS) 사령관을 마치고 별 셋을 달고서 육군전략예비사령부(KOSTRAD) 사령관이라는 핵심 중의 핵심 군 요직으로 진출합니다. 그 직위는 1965년 '9월 30일 사태'라고 불리는 군 반란사건 당시 이를 진압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맡고 있던 자리였습니다. 명실공히 쁘라보워는 군에 있어서만은 수하르토의 후계자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윤국전략예비사령관 시절


물론 그 배경에는 당시 막강한 실권으로 인도네시아를 좌지우지하던 독재자 수하르토 대통령과의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1983년 32살의 나이로 수하르토의 딸과 결혼했던 것입니다. 수하르토는 당시 기껏 대위를 달고 소령 진급심사를 기다리던 젊은 장교 쁘라보워를 자기 사위로 낙점했던 것이죠. 그로부터 15년 후인 1998년 그는 삼성장군이 되어 있었고 반정부 시위와 폭동으로 자카르타가 초토화되어 수하르토가 마침내 하야 성명을 발표하자 그 이틀 후 전략예비사령부 휘하의 병력들을 이끌고 대통령궁을 향해 처들어가는 쿠데타를 감행합니다.


물론 그 날의 사건에 대해 그것이 쿠데타가 아니었다는 견해도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의기양양하게 대통령궁에 들어갔던 그는 당시 하비비 대통령과 위란토 국방장관을 만난 후 웬일인지 병력을 철수시키고 자신도 쫒기듯 군복을 벗고 맙니다. 그 배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는 끈 떨어진 갓처럼 속절없이 군에서 밀려나고, 수하르토의 딸과도 이혼한 후 망명하듯 요르단으로 떠납니다. 그 이혼은 위장전술이었을까요? 아니면 수하르토의 복귀를 이뤄내지 못한 못난 사위에 대한 형벌이었을까요?  그와 수하르토의 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옛날 투입된 한 작전에서 피탄되어 생식기가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누구도 확인해 준 바 없는 소문입니다.


그런 그가 다시 자카르타에 나타난 것은 2004년의 일입니다. 그는 수하르토가 만든 정당인 골카르 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만 당내 경선에서 형편없는 표를 얻어 낙마한 후 와신상담하죠. 그해 메가와티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면서 동기생 유도요노가 대선에서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늘 자신의 등만 바라보던 동기생이 군통수권자인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되는 것을 바라보던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런 그가 2008년 뜬금없이 그린드라당을 만들고 그 당수로 취임합니다.

그의 동생 하심 조요하디꾸수모가 누산타라 그룹이라는 재벌회사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도 제지회사를 인수해 단기간에 재벌 반열에 올랐으니 재력은 일단 대단했습니다. 1983년부터 1998년까지 15년간 수하르토의 사위였던 그의 집안에서 그 정도의 뷰를 일군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수하르토의 자녀들은 1998년 당시 모두 이미 굴지의 재벌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수하르토의 둘째아들 밤방과 막내아들 토미가 인도네시아 국민차를 자기가 수입해 공급하겠다며 싸움을 벌이다가 급기야 집안에서 총을 꺼내들고 총격전을 벌인 끝에 그 유탄에 수하르토의 영부인 티엔 여사가 맞아 숨졌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합니다. 그 사건을 겪은 후에 결국 토미가 수입한 기아의 세피아가 '띠모르'라는 브랜드를 달고서 인도네시아 국민차로 선정됩니다. 그 정도로 다들 부자였고 돈 앞에 눈에 뵈는 게 없었죠.


그런데 누산타라 그룹의 전재산을 쏟아 붓는다 해도 당시 인구 2억 3천만명의 거대한 인도네시아에서 전국 규모의 정당을 단시간 내에 만들어 2009년도 대선에 뛰어 드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이때 쁘라보워는 이렇게 천명합니다.


'우린 토미를 우리 당의 대통령 후보로 고려하고 있다'라고요.


토미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집안에서 총싸움이나 벌이는 망나니였을 뿐 아니라 자기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를 청부살해하고 1년 이상 도피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도 황제처럼 옥살이를 했던 인물입니다. 1990년대 말에 벌어진 인도네시아 증권거래소 주차장의 폭탄테러의 배후에도 그가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그런 또라이를 그린드라당의 대권 후보로 고려한다고요?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경악했겠지만 수하르토 일가는 그 말에 크게 고양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1998년 수하르토가 하야한 후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영욕의 세월을 보내던 그들에게 다시 한번 세상의 정점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건 32년간 독재기간 동안 재벌이 된 자녀들의 회사와 개인 주머니 뿐 아니라 국내외 모처에 다양한 형태로 숨겨 두었던 천문학적 금액의 수하르토의 비자금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입니다. 누구도 그 내역을 얘기해 주지 않지만 일천하게 시작한 그린드라당은 순시각에 전국단위의 정당을 결성해 수많은 지구당들을 창설하고 그해 총선에서 26석을 얻어 의회로 진출했고 2009년에는 대선에 출마해 결선투표에서 메가와티와 짝을 이룹니다. 대통령후보는 메가와티였고 쁘라보워는 부통령 후보였죠. 그 엄청난 자금은 어디서 나온 것들일까요? 


쁘라보워 수비안토 그린드라당 당수


그린드라당은 그렇게 창설되었고 2014년에는 마침내 당시 대세였던 조코 위도도와 맞붙어 대선에서 박빙의 대회전을 벌일 정도로 세를 떨쳤습니다.


그런데 토미는 그 사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요?

앞서 기술한 것처럼 토미는 아예 그럴 깜냥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걸 쁘라보워도 모를 리 없었습니다. 

쁘라보워에게는 토미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봇물처럼 쏟아지는 수하르토 일가의 막대한 자원이 필요했던 것이죠.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헌재에서 인용되고 이틀 후 그녀가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가자 꼬리에 불붙은 여우처럼 치달리며 그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친박 정치인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 절박한 심정은 익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중엔 두 달 앞으로 닥쳐온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나서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사실은 이번 국정농단 사건으로 인해 양심이 있다면 후보를 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되는 여당에서, 아니 여당이었던 곳에서 오히려 가장 많은 후보들을 내는 진기한 장면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들이 보이는 마이크로 지지율은 전례가 없을 정도입니다. 바보도 아닌데 절대 당선될 리 없다는 것을, 어쩌면 경선조차 통과할 리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파면된 근혜공주를 지키겠다며 나서는 사람들의 속내는 2008년도 쁘라보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돈입니다.


그들은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봄까지 수십, 수백만의 시민들이 십시일반 주머니를 털어 모금하여 비용을 충당해 왔던 광화문 광장의 역사적 촋불혁명 현장에 맞서 소위 맞불집회, 태극기 집회로 표현되는 친박집회를 줄기차게, 그것도 대대적으로 열면서 몇 가지를 증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일을 그렇게까지 할 수 있지만 그 정체가 잘 보이지는 않는, 그러나 매우 탄탄하고도 유기적인 그림자 속의 조직과 또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화수분과 같이 절대 마르지 않는 거대한 자금이었죠. 수하르토가 32년간 부를 축적했던 것처럼, 또 많은 사람들이 조사하고 추정하는 것처럼 박정희 역시 29년의 독재기간은 물론 그 뒤를 이어 그 큰 딸이 대를 이어 어쩌면 국격에 맞게 훨씬 더 큰 부를 모처에 축적해 놓지 않았겠어요? 그중 아주 작은 일부가 지난 겨울부터 거의 반년 가까이 오직 박근혜 개인만을 위해 시중에 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친박 집회


이제 민간인이 되어 사법처리를 앞 둔 근혜공주는 자신을 지켜줄 정권이 들어서 주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고 친박 정치인들은 그 거대한 자금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것을, 아니면 최소한 자신의 금전적, 정치적 위상을 한껏 올려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죠. 거기서 접점이 생깁니다. 그것이 몰락해 가는 저 당에서 가장 많은 후보들이 나오고 있는 이유이며 그들 중 상당수가 박근혜와의 줄긋기를 하기보다는 자신만이 박근혜를 지켜줄 수 있다고 외치는 이유이죠. 


최소한 나한테는 그렇게 보입니다.

예전에 토미를 추대하겠다던 쁘라보워의 속마음처럼 말입니다.




2017. 3. 14.



P.S. 하지만 그런 막대한 자금이 정말 있다면 그것은 몇몇 정치인들의 탄탄한 배경을 만드는 것 따위에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국가로, 국민에게로반드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