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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환 칼럼]정권의 종말

beautician 2017. 1. 12. 10:00


이 글은 존경하는 ROTC 11기 선배님이시자 인도네시아 한인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한인뉴스의 논설위원이신 김문환님의 칼럼을 퍼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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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인사회는 우리가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인도네시아 국가원수가 19년 전 탄핵의 위협을 받고 하야하는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 왔던 탓에 작금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 는 정치현상이 자꾸 그 당시의 형상에 오버랩 되곤 한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결정 적 주도세력이 국회였으며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동반되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나누기 도 한다. 그런데 우리 한인사회는 최근 어떤 시위나 소요사태가 예견되는 경우 악성루머에 흔들려 대뜸5월사태상황과 직결시키려는 성급함을 보이기도 한다. 어언 반세기의 역 사를 넘어서고 있는 우리 한인사회도 이제는 이곳 사회현상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판단할 수 있는 성숙함을 보여야 할 때라고 본다. 필자는5월폭동이라고도 부르는 사건팩트를 당시의 언론보도와 사후 저작물에 근거하여 아래와 같이 재구성하여 보면서 우리 한인사 회가 이를 반면교사로 삼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1997년 말 정권말기 징후가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오는 스산한 사회분위기 속에 마침 태 국발 IMF 사태가 쓰나미처럼 인도네시아에 상륙하자 민생고에 허덕이던 국민들을 대변하 여 대학 캠퍼스 내에선 연일개혁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성토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국 민들의 열망을 담은 민중의 소리는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1998 5 12일 일몰시간 서부자카르 타에 소재한 뜨리삭띠 대학 시위대가 교정으로 되돌아가는 시각에 4명의 대학생이 저격을 받아 희생된다. 소위5월 폭동의 방아쇠가 당겨진 셈이다. 그 다음날인 13일 오전, 4 명의개혁운동의 순교자들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는 장례식이 뽄독인다 지역 따나 꾸 시르(Tanah Kusir) 공동묘지에서 거행된다. 유족은 물론 동료 학생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몇몇 여학생은 졸도하기도 하였다.Gugur Bunga(꽃은 떨어지다)라는 진혼곡이 흘러 나오자 식장의 분위기는 더욱살림, 끡 끼안 기 등의 얼굴이 TV 화면이 비춰지고 있었다. CNN 방송 마이크가 아민 라이스 코앞에 다가왔다. 그 는 옆에서 슬픔에 젖어있던 전국이슬람학생연맹 (KAMMI) 의장인 화흐리 함자(현 국회부의장)에 게 이렇게 한마디를 던지고 있었다.화흐리, 신의 이름으로 이 무거운 짐을 내가 짊어지겠네.

 

장례식이 끝나자 교정에서는 수도권 각 대학에 서 모여든 학생들에 의한 시국토론회가 열리고 있 었다. 12시 정오 시간대, 캠퍼스 밖에서 학생들의 집회를 관망하던 시민들이 감정에 북받쳐 인근지 역을 지나던 차량들을 정지시켜 파손하기 시작했 다. 어느 누군가가 인근 주유소에 방화하자 굉음 과 동시에 그 일대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군중은 인근 토파즈 쇼핑몰 을 약탈하며 폭도로 돌변하였다. 오후 2시경 근 처를 지나던 두 대의 트럭이 탈취되었다. 한 대는 그대로 전소되었으며, 나머지 한 대는 폭도에 의 해 질주시켜 인근 파출소로 돌진하도록 페달 위 에 통나무를 얹어놓고 그 자신은 직전 뛰어 내렸 다. 이 트럭은 무고한 한 고교생을 희생시키며 파 출소를 대파시켰다. 또 한 무리의 폭도들은 고속 도로로 진입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약탈과 폭력 을 자행하였다. 수까르노 핫따 국제공항에서 영문 도 모른 채 시내로 들어오던 화교들과 외국인들이 지갑을 털리거나 몽둥이로 내려친 파편에 맞아 피 를 흘리기도 하였다. 화교로 오인된 한국인 피해 자도 속출하였다.

 

카이로 시간 저녁 6 15분 대사관 관저, 이슬 람국가정상회의에 참석 중이던 수하르또 대통령 은 동포간담회를 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국내 사태를 언급하며,만약 국민들이 원한다면 사임 할 용의가 있다는 폭탄발언을 내뱉었다. 그러나 국내의 하비비 부통령은 어떤 긴급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각하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봅시다.

 

위란또 국군사령관이 처음으로 매스컴에 등장하 여 기자회견을 열고 있었다.우선 4명의 대학생 사망에 대해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현행법에 의거하여 철저히 사건경위를 조사하겠습니다. 이틀째인 14일 새벽 6시 할림공항엔 위란또 국군 사령관, 쁘라보워 전략사령관을 비롯한 다수의 군 수뇌부가 모여들어 동부자와 말랑(Malang)으로 향하는 허큘리스 군용기 트랩을 오르고 있었다. 전략사령부 직속부대인신속대응타격대를 예 하 제1사단에서 제2사단 소속으로 이관하는 행 사에 참석하고자 함이었다. 군수뇌부가 자카르타 를 등진 이날 폭동의 규모는 더 확대되어 자카르 타 전지역으로 번지며 통제불능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꼬따 지역 화교들이 주 타겟이 되고 있 었다. 이날 오후에는 북부자카르타 구능 사하리 (Gunung Sahari) 지역에 있는 최대재벌 림수룡 의 자택이 공격을 받아 폭도들에 의해 가재도구가 박살나고, 그의 초상화는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있 었다. 말랑에서의 행사를 마치고 오후 늦게 귀임 한 위란또 사령관은 밤 9 30분 처음으로 군작 전회의를 주재하였다. 수도권 치안유지를 위해 특 전사는 정, 부통령의 관저, 전략사령부는 공공기 관, 해병대는 외국공관을 사수하도록 분담되었다.

 

5 15일 금요일 새벽 4시 수하르또 대통령 일 행은 이집트에서의 일정을 하루 단축하고 급거 귀 국하였다. 이른 아침 대통령 관저에선 하비비 부 통령, 주요각료, 위란또 장군 등이 모여들어 2시 간 반 동안 긴급각료회의가 열렸다. 아직 변두리 지역에선 산발적인 약탈이 계속되었지만 자카르 타의 상황은 전체적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틀 간의 폭동으로 자카르타 지역에서만 288명 사망, 101명 부상 등의 인명피해와 53곳의 쇼핑센터 및 시장, 4천여 곳의 가게, 12곳의 호텔, 1,119대의 차량, 821대의 오토바이, 1,026채의 가옥 및 교 회, 9군데의 주유소등 엄청난 물질적 피해를 가져 왔다. 사망자의 대다수는 약탈을 위해 들어갔다가 화염에 갇혀 미처 현장을 빠져 나오지 못한 약탈 자 자신들이었다. 특기할 사항은 100여건 이상의 성폭행 범죄가 있었다는 점이다.처연해지고 있었다.

 

이 범죄의 피해자들은 주로 화교계 부녀자들이 었다. 5 15일 금요 기도시간 직전, 수하르또는 공보부장관을 통해 며칠 전 이집트에서의사임 발언에 대해 해명하였다.만약 국민이 본인을 신임하지 않더라도 무력을 통해 권력을 유지할 생 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나는 신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더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5 16일 토요일, 수하르또는 자택에서 국회 의장(MPR/DPR)인 하르모꼬 등 의회지도자들을 접견하였다. 하르모꼬 의장은 국민의 염원을 전달 한다며 개각 및 국민협의회(MPR) 임시총회를 제 안하였다. 이에 대해 수하르또는 개혁은 중단없이 진행될 것이며, 개각은 곧 단행될 예정이나 임시 총회건은 즉답을 피하였다. 직후 우이대학(UI)대 학 총장 아스만 부디산또소 총장이 들어섰다. 2시 간에 걸친 면담 중 총장은수하르또의 사임을 권 고한다.는 학장단 명의의 성명서를 전달하였다. 이에 대해대통령이 된 것은 개인적인 의지가 아 니며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전권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다. 국민들이 진정 원한다면 하 야 못할 이유도 없다.라고 반응하였다.

 

5 16일 저녁 8, 위란또 사령관의 기자회견 전에 국군공보국장이 보도자료를 미리 배포하였 다. 그 내용에는대국민사과와 더불어수하 르또 사임을 지지한다는 5 15일자 NU 의 입장 에 찬성한다 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회견이 시 작되어 위란또 장군은 마이크를 잡자마자, 대통령 의 긴급호출을 받아 회견을 중단하고 황급히 빠져 나갔다. 위란또가 대통령을 접견한 직후 수하르또 는 쁘라보워와 무흐디 장군을 불러 대통령의 사임 을 주장하는 군의 여론이 사실인지 여부를 점검하 도록 지시하였다. 대통령은 이 보도자료에 대 해 화흐룰 라지 국군관리참모부장과 유도 요노 국군사회정치참모부장에게 의 혹의 눈길을 보냈다. 이후 위란 또, 유도요노 장군을 포함 한 수뇌부 장성들이 곧 체포될 것이란 소문이 파 다했다. 그 중 제1 타겟은 유도요노 장군이었다. 다른 소식통에 의하면 위란또와 그 측근장성들이 난국타개를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대권을 잡을 것 이란 소문도 돌았다. 어떻든 두가지 풍문의 중심 인물은 유도요노 장군에게 모아졌다. 유도요노 장 군은 부인과 차남을 자신의 국군사령부 집무실로 피신시켰다. 장남은 육군사관학교에 재학 중이었 다. 그리고 특전사 정예요원 4명의 경호를 받았다. 마침 특전사 제1여단장이 유도요노의 처남 에디 위보워 대령이었다.

 

폭풍이 지나간 5 18일 월요일의 아침이 밝았 다. 엄청난 재앙을 당하고도 출근길에 오른 시민 들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새로운 시대 가 도래할 것이란 기대감이었을까? 그러나 자카 르타의 관문인 수까르노-핫따 공항은 이상기류 가 감돌았다. 화교계와 외국인들이 속속 모여들 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타고 온 고급승용차를 즉석에서 처분하는 장면도 엿보였다.국민계몽 일(Hari Kebangkitan Nasional) 5 20일 을 가하여 재야 지도자인 아민 라이스가 주도하는 100만명 민주행진이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 벌어질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대탈출소동이 었다. 대통령궁 턱밑인 모나스 광장에서 100만명 이 운집하는 행사에 대해 군부는 이를 방관할 수 없었다.2의 천안문사태를 각오하고라도 이 를 무력으로 극력 저지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미국 정부는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중인 제7함대 소속 함정 수척을 발리섬에 파견하여 자국민 후송작전 을 펼치고 있었으며, 일본정부는 특별기를 쉴새없 이 띄워 국민들을 귀국 시켰다. 한인사회도 동요 하기 시작했다. 국적기를 증편하였으나 한계가 있 었다. 항공표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자 진출 대기 업을 중심으로 가족우선 대피작전으로 나갔다. 가 장들은 그대로 남아 직장과 가정을 지키기로 묵계 되었다. 해병전우회 회원들은 빨간 모자를 쓰고 방망이를 하나씩 들었다.

 

5 18일 저녁 국회의사당, 하르모꼬 의장은 국회 원내 교섭단체들이 대통령의 퇴진을 권고 하기로 합의하였다. 즉각 사임하지 않으면 국민협 의회 임시총회를 열어 탄핵으로 갈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대통령의 충복이었던 하르모 꼬의 충격적인 배신이었다.

5 19일 화요일, 대통령은 군부지도자인 위란 또, 쁘라보워가 배석한 가운데 이슬람 종교지도자 9명을 궁으로 초치하여 의견을 경청하였다. 중용 을 지키며 존경받던 누르흘리스 마짓(Nurcholish Madjid)이 가장 큰 목소리로 대통령의 하야를 주 장하였다. 아울러 재야에선 아민 라이스가100 만 민주행진을 강행할 것이라며 수하르또의 목 을 계속 조르고 있었다. 근로자연맹도 행진에 가 담할 것이라 하여 원군이 되어 주었다. 또 다른 측근 기난자르 경제조정부장관은 골까르당 소속 12명의 경제각료들의 일괄 사표를 모아 대통령 에게 제출하였다. 재기불능의 강펀치를 맞은 것이 다. 국내의 사임압력이 절정에 이르자 울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 클린턴 대통령,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 존 하워드 호주수상도 돌아가며 전화를 걸 어 수하르또의 사임을 권고하였다. 하르모꼬 국회 의장은 고립무원에 빠진 수하르또에게5 22 일 금요일까지 사임하지 않으면 탄핵절차에 들어 가겠다.고 최후 통첩하였다.

D-day 5 20일 새벽 4, 아민 라이스의 목소리가 새벽 긴급뉴스를 타고 긴박하게 흘러 나 온다.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불 가피 오늘 오전 열릴 예정이던 민주행진을 취소한 다.후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전날 밤 늦게 전략 사령부 참모장이 아민측에 전화 걸어 만약 민주행 진이 강행될 시, 피바다를 불러올 것을 각오하라 고 아민에게 직접 경고하였던 것이다.

결국 민주행진은 시작 몇 시간 전 에 전격 취소되어 안도하였지만 대 통령은국회의 22일한 사임 최후통첩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고민에 싸였다. 520 , 군부의 정치담당 총책인 유도요노 장군은 재 차 각계 원로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 자신의 비 망록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521일 정치개 혁위원회 발족, 22일 개각, 28일 대통령 사임>.

이날 오후 유도요노 장군의 직속상관인 위란또 사 령관이 대통령 관저에 들어섰다.각하, 국군은 더 이상 각하를 지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는 각하가 탄핵을 받는 불명예를 당하지 않 기를 바랍니다.최후의 일격이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유도요노 장군은 대통령 측근으로부터 내 일 아침 전격 사임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군 부가 정해놓은 28일에서 일주일 앞당겨 하야하기 로 대통령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5 21일 목요일 아침 10시 대통령궁, 생존하는 국가원수 중 쿠바의 카스트로 다음으로 가장 장기 집권한 수하르또는 무려 32년간의 통치를 마감하 는 짤막한 사임서를 직접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본인은 이제 국정수행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경제각료의 집단사임, 최근 발족시킨 개혁위원회 를 거부 당하는 등 아무도 본인과 함께 일하기를 원치 않았기에 사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헌법 이 정한 바에 따라 부통령인 하비비에게 자동적으 로 인도네시아공화국 대통령직이 승계됩니다. 곧이어 대법원장 앞에서 하비비 신임대통령이 취 임선서를 마치고 뒤로 빠지는 순간, 국군사령관 위란또 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우리 국군은 국 가원수의 교체와 하비비 신 정부를 지지하며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의 안전과 명예를 끝까지 지켜 드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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