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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표기법, 난 반대한다

beautician 2023. 5. 29. 11:12

외국어 표기법, 정말 최선일까?

 

 

 

외국어 표기에 대해서는 2005년 12월 28일 문화관광부에서 제정, 공표한 ‘외래어표기법’이 가장 최근의 것인 모양이다.

 

제1장 표기의 기본 원칙

  제1항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 자모만으로 적는다.

  제2항 외래어의 1 음운은 원칙적으로 1 기호로 적는다.

  제3항 받침에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다.

  제4항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5항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

 

수십 페이지는 족히 될 법한 이 규정의 골자는 위의 다섯 줄이 전부인 것 같다. 해당 규정의 나머지는 각 언어별 표기 일람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오래 살며 통, 번역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 위의 규칙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제4항의 된소리 금지 원칙이다. 인도네시아는 된소리의 나라인데 말이다.

 

제4항의 문제와 관련한 논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무엇을 외래어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외래어는 어원이 외국어란 뜻이지만 모든 외국어는 외래어일까?

 

두 번째는 들리는 데로 표기하는 것이 왜 표준맞춤법에 어긋난다는 것이냐 하는 부분이다. 된소리를 쓰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은 어떤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외국어가 된소리로 들리고 그 된소리가 해당 외국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왜 들리는 데로의 된소리로 쓰는 게 문법에 맞지 않도록 규정이 정해진 것일까?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은 수카르노(Soekarno)다. 그는 인명사전에 그렇게 나와 있고 그렇게 통용되고 있으나 위의 기본원칙 제5항의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의 규정에 따라 실제 발음은 ‘수까르노’이지만 ‘수카르노’로 표기한다. 이의 없다. 그래서 내가 2018년 출간한 책 제목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라고 달렸다.

 

수카르노의 장녀는 인도네시아 5대 대통령을 지낸 메가와티다. 그녀의 풀네임은 Megawati Soekarnoputri. 현지 발음대로 하면 메가와띠 수까르노뿌뜨리. 하지만 기본원칙 제4항에 따라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라고 표기해야 맞다는 것이다. 여기부터 벌써 동의하기 힘들어진다.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은 현지 발음에 대한 천시, 또는 왜곡을 기반으로 하는가?

 

그런 단어들은 수도 없이 많다.

대접한다는 뜨락띠르(traktir)는 ‘트락티르’라고 표기해야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는 인도네시아인은 거의 없다.

 

자카르타의 지명 중 뜨븟(Tebet)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건 뭐라 표기해야 하나? 트븟? 테벳?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발리의 쿠타 해변(pantai kuta)은 원래 ‘빤따이 꾸따’라고 발음되지만 한국 도서나 기사에 실으려면 ‘판타이 쿠타’로 ‘순화’해야 한다. 자카르타의 빤따이까뿍(panti kapuk)은 ‘판타이카푹’으로. 현지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수상한 발음으로 바꿔주는 게 정말 ‘순화’일까?

 

한동안 한국 일간지 아시아투데이에 기사를 공급했고 지금도 인도네시아 교민신문에 현지 기사를 번역해 제공하지만 내 기사 속 된소리(경음)를 대부분 격음으로 바꾸어 표기되는 것들을 보면서 외래어표기법에 의문을 넘어 반감을 품게 되었다. 저것은 언어를 ‘순화’한다는 명목으로 원래의 발음, 해당 국가의 발음법을 무시하고 왜곡하는 것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복숭아 맛이 나서 복숭아 맛 난다고 하듯이 그렇게 들려 들리는 데로 썼는데 그게 무슨 문제일까?

 

무엇보다고 세종대왕이 만들어 주신 훈민정음은 다양한 의성어까지도 표기할 수 있을 만큼 섬세한 언어인데 그 표기역량을 왜 스스로 포기하고 제한해야 하는 걸까? 이에 대한 국어학자들 또는 국립국어원의 답변을 듣고 싶다. 경음보다 격음이 더 있어 보여서 그런가?

 

왜 모든 외국어를 외래어로 취급하려 하는지도 묻고 싶다.

세계 각국의 외국어들은 한글로 표기되기 위해 만들어져 사용되어온 언어가 아니다. 특히 사람들의 이름은 원래의 발음대로 불러줘야 한다. 그래서 예전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라고 부르던 인물들을 요즘은 마오쩌둥, 조우언라이, 등샤오핑이라 불러준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는 수까르노, 시마뚜빵(제2대 인도네시아군 사령관), 안띠까 뻐르까사(직전 통합군 사령관)을 각각 수카르노, 시마투팡, 안티카 퍼르카사라고 웃기게 표기해야만 한다는 것일까?

 

그걸 왜 통일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요컨데 왜 ‘바이든’을 ‘날리면’으로 통일해야 하냐고?

 

옛날 윌버트(Wilbert)라는 미국친구가 있었다. 당시엔 원래 Wilbert라면 ‘r’발음을 장음으로 취급해 ‘윌버어트’라고 표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이 친구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거의 25년 전 일이니 초창기 한류팬인 셈이다. 그때만 해도 아직 수기로 쓴 편지가 오가던 시절이었는데 이 친구가 목재로 잘 마감된 작은 상자를 선물로 보내며 첨부한 편지 말미에 삐쭉빼쭉한 한글로 이렇게 쓴 것이 인상적이었다.

 

‘당신의 친구 윌븟으로부터’

 

영어 원어민인 그 친구에겐 우리가 윌버어트라고 쓰는 그의 이름을 들리는 데로 ‘윌븟’이라 쓰는 게 너무나 당연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가 그렇게 이해하고, 따라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바와 같이 ‘윌븟’이라 불러주는 게 맞다.

 

외래어 표기법이 아니라 ‘외국어 표기법’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

 

 

202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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